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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생소한 고대 한국의 ‘중원절’


2023-08-10      글|위셴룽(喻顯龍)



고대 한국과 중국은 전통 역법의 영향으로 춘제(春節, 음력 설), 단오절같이 비슷한 명절이 많았다. 그러나 일부 명절은 다양한 이유로 역사의 흐름 속에서 변화를 거듭해 현재의 한국인들에게는 생소한 명절이 됐다. 중원절(中元節)이 대표적인 예다.


유래와 유입

중원(中元)이라는 이름은 도교에서 비롯됐다. 도교는 천지수(天地水) 삼계를 대표하는 ‘삼관(三官)’인 ‘천관, 지관, 수관’에게 제사를 지냈다. ‘삼관’의 탄생일은 각각 음력 1월 15일, 7월 15일, 10월 15일로 각각 상원, 중원, 하원이라고 불렀다. 도교가 창시됐을 때는 마침 불교가 중국에 갓 유입된 시기였다. 불교는 7월 15일에 우란분절(盂蘭盆節)로 법회를 열고 망령을 제도하는 등 활동을 했다. 따라서 도교의 중원은 어쩌면 불교 문화와 어느 정도 관계가 있거나 역사의 흐름 속에서 상대방의 문화 요소를 흡수한 것인지도 모른다. 결국 중국 남북조 시기에 전통 민속과 유가의 효도, 도교와 불교 문화가 융합된 명절이 형성됐다. 당나라 때에 이르러 국가에서 도교를 추앙하자 ‘중원’이 7월 15일을 기념하는 고정 명칭이 됐고 지금까지 이어졌다.


중원절은 늦어도 고려시대에 유입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신라시대는 불교를 숭상해 7월 15일에 제사를 지내는 풍습이 이미 있었을 것이다. 또한 중원에 내포된 도교 문화도 일부 신라인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신라의 최치원은 도교를 믿어 도교 활동 관련 문장을 많이 남겼다. <중원재사(中元齋詞)>에서 최치원은 중원절을 ‘대경양진(大慶良辰)’이라고 칭하고 도교 규칙에 따라 ‘보단(寶壇)’을 설치하고 제사를 지냈다.


고려시대에 중원절은 관리의 법정 휴일로 공식 지정됐다. <고려사> 기록에 따르면 관리는 중원절 전후로 즉 7월 14일, 15일, 16일 3일 동안 휴식을 취했다. 흥미로운 점은 현대 한국인이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8월 15일 ‘추석’에는 겨우 하루 쉬어 고려시대 중원절에 대해 중요시하는 것보다 많이 미치지 못한 것 같다. 이 밖에 고려 문신 정포의 <신격전행중원초례문(神格殿行中元醮禮文)>과 민사평의 <중원초례문(中元醮禮文)>은 중원 제례 활동이 고려 상류사회에서 매우 보편적이었으며 불교 문화 외에 중원절의 도교 문화 개념도 고려의 인정을 받았다고 설명했다.


조선시대 중원절의 변천

조선왕조는 고려의 중원절 전통을 일부 계승했다. 예를 들어 조선 태종은 삼원일(상원, 중원, 하원절의 총칭)의 제사를 매우 중요시했다. 그러나 신불(神佛) 숭배를 반대하는 유교 때문에 중원절의 도교와 불교 활동은 점차 제한됐다. 조선왕조에서도 중원절은 계속 발전했다. 어쩌면 중원절이 유가의 조상에 대한 제사와 효도 문화를 포함하고 있고, 조선 민간 풍습에 융합해서 일 수도 있다. 그러나 고려시대에 비하면 조선시대 중원절의 지위는 확실히 크게 하락했다. 성종 시대의 대신 신숙주와 정척 등이 편찬한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는 ‘설날, 동지, 한식, 단오, 중추’ 5개 명절을 제사에서 중요한 위치에 놓았고, 중추 즉 ‘추석’이 중원보다 중요해지기 시작했다. 이렇게 중원절은 조선 왕궁에서 종교적 색채가 연해졌고 경축 연회 활동으로 대체됐다. 연산군은 1504년 중원절에 대비전 밖에서 연회를 베풀도록 했다. 사원 안에서는 중원의 우란분절 활동이 단독으로 보존돼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조선 민간에서 중원절은 주로 농업 제사와 달맞이 등 풍습과 결합했다. 민간에서는 중원절을 ‘백종(百種)’, ‘망혼일(亡魂日)’ 등으로 불렀다. 중원절이 되면 조선 백성들은 잔치를 하고 풍작을 축원하며 달맞이 등 행사를 했다. 정조 말기 <승정원일기>에 ‘중원가절, 일가환희지시(中元佳節, 一家歡喜之時)’라는 문구가 있는 것으로 보아 중국의 중원절이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고 망령을 제도하는 등 무거운 분위기인데 반해 고대 한국의 중원절 분위기는 상대적으로 밝고 가벼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현대 한국인은 ‘백종’과 ‘중원’을 하나로 결합해 음력 7월 15일을 ‘백중(百中)’이라고 부르고 중원이라고는 잘 부르지 않는다. 그러나 고대에는 ‘중원’이라는 명칭이 오랫동안 공식 문서에 사용됐다.


추석과 중원

당대 한국인에게 익숙하고 추석과 관련이 깊은 문화 이미지인 가족 모임, 그리움, 달, 계화(桂花) 등은 조선시대 한시에서 보면 중원절과 관련이 많다. 조선 중기 문신 김광현은 ‘칠월중원야, 천청계영다(七月中元夜, 天清桂影多)’라고 했다. 경종 시대 호조판서 조태억은 중원절에 보름달을 바라보며 가족을 그리워하면서 ‘탄두추석오사자. 해상중원이억친(灘頭秋夕吾思子. 海上中元爾憶親)’이라고 했다. 여기서는 추석과 중원절을 하나로 봤다. 조선 중기 문신 남용익은 중원절에 가족에게 ‘요사골육공단원(遙思骨肉共團圓)’이라고 쓴 편지를 보내 홀로 외지에 있는 외로움을 표현했다. 반면 문신 유영하는 적막함이 싫어 중원절에 유생들을 초대해 잔치를 열고 친구들과 시문을 나누면서 즐겁게 보냈다.


실학자 이익은 중원과 상원, 추석은 모두 보름달을 숭배하는 원시 종교에서 비롯됐다고 생각했다. 조선 정조는 중원절 밤에 내각을 재숙(齋宿)하도록 하고 군신들과 함께 시문을 지었다. 정조는 시문에서 중원을 중추라고 칭했다. 대신 이곤수가 올린 시문에서는 ‘매세중원영가지(每歲中元迎駕至)’라고 했다. 이는 정조가 매년 중원절에 재계(齋戒)를 함으로써 천지 자연에 대한 경외를 표현한 것이고, 어쩌면 이를 빌려 세상을 떠난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한 것일 수도 있다.


20세기 들어 중원절의 중요성은 더 희석됐고 ‘추석’이 많은 기능을 흡수하고 대체했다. 1920년대 한국의 상공조합은 7월 15일 중원절에 했던 전통 활동을 전부 8월 15일 추석으로 조정했다. 그러나 일부 지역에서는 여전히 중원절 풍습을 유지하고 있다. 어쨌든, 중원절 문화는 고대 한국 문화에 점차 흡수됐다. 중국과 한국 양국의 중원 문화는 조금 다르게 표현됐지만 비슷한 문화 함의와 역사 연원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바로 중한 인문 교류의 무한한 매력이 아닐까 한다. 

글|위셴룽(喻顯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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