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훙산에서 떠오른 중화문명의 서광


2023-09-21      글|쉬하오(徐豪)

황허(黃河) 유역의 양사오(仰韶)문화, 창장(長江) 유역의 허무두(河姆渡) 문화, 시랴오허(西遼河) 유역의 훙산(紅山) 문화 등 3대 강 유역은 중화 문명 다원일체의 기원으로 유구한 중화 문명을 열었다.


랴오닝(遼寧)은 훙산 문화의 핵심 분포 지역이자 훙산 문화 연구의 중심지다. 1980년대부터 고고학자들은 차오양(朝陽) 뉴허량(牛河梁)에서 제사 중심의 대규모 유적군을 발견했고, 이것을 대표로 한 훙산 문화 고고학 연구가 중화 문화와 문명의 기원을 여는 시간 열쇠가 됐다.


뉴허량유적 제2지점 사진/랴오닝성문물고고연구원


문명이 밝아오다

훙산 문화는 지금으로부터 약 6500년에서 5000년 전에 발생해 1500년의 발전 시기를 거쳐 지금으로부터 5500년 전 전후로 전성기에 진입했다. 훙산 문화는 시랴오허 유역, 다링허(大凌河)·샤오링허(小凌河) 유역, 롼허(灤河) 유역 및 주변 지역에 분포했다. 랴오닝, 네이멍구(內蒙古), 허베이(河北) 3개 성을 아우른다.


랴오닝성 문물고고연구원 명예원장이자 ‘훙산 문화 일인자’로 불리는 궈다순(郭大順)은 훙산 문화는 ‘원시형’ 고대국가 문명이라고 설명했다. 올해 85세인 궈다순 명예원장은 인터뷰 전날 뉴허량 유적지에서 고찰을 마치고 돌아왔다고 말했다.


랴오닝성 차오양(朝陽)시 젠핑(建平)현과 링위안(凌源)시 경계에 위치한 뉴허량 유적은 보호구 면적이 58.95㎢에 달한다. 유적지는 지금으로부터 5500년에서 5000년 전으로, 훙산 문화 말기이자 훙산 문화의 절정기다. 여신묘(女神廟), 대형 제단, 적석총군(積石塚群), 옥예기(玉禮器)와 도기가 대량 발굴돼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됐다.


훙산 문화 여신상 측면도 사진/랴오닝성문물고고연구원


중국은 세계 4대 문명 고국 중 하나다. 그러나 현대사회에 들어선 이후 사학자들은 중국의 문명사를 4000년 전의 하(夏)나라부터 계산하고 하나라 이전 1000년은 실물 증거가 부족하다고 해서 전설의 시대라고 하는 관점이 생겼다. 뉴허량 유적이 발견되자 중국 고고학의 태두이자 베이징(北京)대학 고고학과 창립자인 쑤빙치(蘇秉琦)는 “훙산 문화의 단(壇), 묘(廟), 총(塚) 3종 유적은 중국 북방지역의 기원전 문화 발전의 최고 수준을 대표한다. 이곳에서 우리는 중화 5000년 문명의 서광을 봤다”고 말했다.


궈다순 명예원장은 “하나라 이전은 룽산(龍山) 시기로 룽산 시기는 부계 사회였다. 다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양사오 시대는 모계 사회인데 훙산 문화는 양사오 문화 말기인 모계 사회에 해당된다. 훙산 문화에서 갑자기 발견된 일련의 물품은 문명사회 진입과 관계가 있는데 한때 학계는 받아들이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과거에는 중화 문명은 중원이 중심이고 창청(長城) 이북의 문화는 중원의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했다. 뉴허량 유적지에서 옥기가 발견될 줄은 생각하지 못했고, 이후 단, 묘, 총이 또 발견될 줄은 몰랐다. 이런 일련의 예법 관련 유적은 매우 이례적인 것으로 국내외에서 큰 관심을 받았다”고 말했다.


중국 사회과학원 고고연구소 연구원이자 뉴허량 유적 고고발굴 프로젝트 책임자인 자샤오빙(賈笑冰)은 제례의식 행위와 예제(禮製)는 훙산 문화의 사회·경제 발전의 핵심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뉴허량 유적에서 대규모 공공 제례 활동 관련 건축물이 다량 발견된 것으로 보아 사회 동원 능력이 강력했던 것으로 보인다. 석벽과 원통형 기물로 구축된 대형 고분 부속 시설과 규범에 따른 옥기의 사용과 분배를 봤을 때 사회 계급이 확립된 것으로 보인다. 제례 예절 관련 원통형 기물과 옥기의 생산, 전문화된 분업은 생산기술과 사회 관리가 최고 수준이었다는 것을 나타낸다”고 강조했다.


쑤빙치는 <중국 문명 기원 신탐(中國文明起源新探)>이라는 책에서 중국 문명의 기원은 분열, 충돌, 융합 세 가지 모델이 있으며 이 세 가지 모델이 발생한 지역을 꼽았다. “관중(關中) 서부에서 시작돼 웨이허(渭河)에서 황허로 유입돼 펀수이(汾水)를 거쳐 산시(山西) 전역을 통과하고, 산시 북쪽에서 서쪽으로 향하는 곳에서 네이멍구 허타오(河套) 지역과 연결돼 동북 방향으로 향하다 쌍간허(桑幹河)와 허베이(河北) 북서를 지나 다시 동북과 랴오허 서쪽인 랴오닝 서쪽의 라오하허(老哈河), 다링허(大凌河) 유역과 맞물려 ‘Y’ 자 형태의 문화 벨트를 형성한다. (중략) ‘Y’ 자 형태의 문화 벨트는 중국 문화사에서 가장 활발한 민족의 용광로였다. (중략) 때문에 ‘Y’ 자 형태의 문화 벨트는 중국 문화의 총근계(總根系) 중 가장 중요한 직속 근계(根系)다.” 쑤빙치의 설명이다.


‘직속 근계’ 상의 뉴허량 유적은 고증할 수 있는 중화 문명사를 1000년 넘게 앞당겼다.


훙산 문화 사구통형 옥기 사진/텅옌옌(騰妍妍)


‘단묘총옥룡봉(壇廟塚玉龍鳳)’

뉴허량 유적 발견은 사구(斜口) ‘필통(筆筒)’과 관계가 있다.


1981년 궈다순 명예원장이 차오양시 젠핑현에서 문물 전면 조사 전 교육을 하고 있을 때였다. 어느 날, 문화참(文化站) 참장이 인근 마자거우(馬家溝)의 한 농가에 ‘옥필통’이 있다는 중요한 정보를 알려주었다. 다음 날 교육이 끝나자마자 궈다순 명예원장은 자전거를 타고 15km를 달려 마자거우로 향했다. 그곳에서 ‘옥필통’을 봤다. 연구자들은 이것을 머리칼을 묶는 것이라고 생각해 한동안 ‘마제형옥고(馬蹄形玉箍)’라고 불렸으나 지금은 보편적으로 ‘사구통형 옥기’라고 부른다. 고고학자들은 또한 기물이 출토된 뉴허량 언덕을 찾았고 이곳에서 동서향, 길이 2m, 너비 0.8m 규모의 석관묘를 발견했다. 무덤에서 발견된 옥환 한 개는 훙산 문화 옥기가 공식적으로 무덤에서 처음 발굴된 것이다.


이후 독특한 적석총, 삼중원제단 등이 속속 발견됐다. 그러나 제일 처음 발견된 뉴허량 유적지는 제2지점으로 지정됐다. 여신묘 유적 소재지를 첫 번째 지점으로 삼아 일련번호를 매겼기 때문이다. 1983년 10월, 제2지점에서 북서쪽으로 약 1km 떨어진 뉴허량 주 산등성이 중심 부분에서 주실과 좌우 측실, 북실, 남3실이 ‘아(亚)’ 자 형태로 연결된 다실 구조의 유적지가 발굴돼 모습을 드러냈다. 11월 2일, 주실 서쪽에서 완벽하게 보존된 인간 머리 조각상이 발굴돼 국내외를 놀라게 했다. “그녀는 하늘을 바라보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기나긴 기다림 끝에 마침내 밝은 세상을 본 기쁨을 말하고 싶은 것 같았다. 그래서 사람들이 둘러쌓다.” 궈다순 명예원장은 그때를 이렇게 묘사했다.


제1지점과 제2지점의 묘, 단, 총이 결합된 건축군 가운데 여신묘가 유적군 전체의 핵심인 듯하다. 다른 훙산 문화 유적지와 결합해 대조하면 뉴허량 유적군은 전체 훙산 문화의 성지이자 제사 중심이라고 여겨졌다.

궈다순 명예원장은 훙산 문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단묘총옥룡봉’으로 꼽으면서 “중화 문화 전통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이라고 말했다. 궈다순 명예원장은 기자에게 뉴허량 유적은 남북 중축선에 따라 배치하는 ‘북묘남단’ 구도를 사용했다면서 묘와 단은 조상과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최고 수준의 예제 건축이며, 여기에 사용된 구조와 배치는 5000여 년 전 훙산 문화에서 명청 시대의 베이징까지 계속돼 강력한 전승력을 보여주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훙산 문화가 중화 문명의 직근계라는 것도 보여주었다”고 말했다.


대중에게는 훙산 문화의 옥기가 더 잘 알려졌다. 현재까지 출토된 훙산 문화의 옥기 수량은 300여 점으로 주로 네이멍구자치구 남동쪽과 랴오닝성 서부 지역에 분포돼 있었다. 뉴허량 유적은 지금까지 공식적인 고고학 발굴과 출토를 통해 훙산 문화 옥기가 제일 많이 발견된 곳이다. 훙산 문화는 ‘옥이 있어야 장례가 이루어진다’는 풍습이 드러나며 옥기가 천지를 관통하고 조상의 영혼과 신령과 소통하며 신분의 나타내는 예의 제도의 핵심적인 물질적 매개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용과 봉황 등 후세가 숭배하는 토템과 상서롭다는 정신적 신앙도 훙산의 옥기에 나타나며 ‘용의 후손’이 여기서 시작됐다.

왜 ‘훙산’인가?


동북쪽에 위치한 훙산 문화가 어떻게 형성되고 발전했으며 후세에 영향을 미쳤을까?


장싱더(張星德) 랴오닝대학 역사학부 교수이자 박사과정 지도 교수는 승문 도기(繩紋陶器), 지자문 도기(之字紋陶器), 소면 도기(素面陶器)로 대표되는 3대 족군 집단을 예로 들어 설명했다. 그녀는 지금으로부터 최소 8000년 전, 중국 북방에 승문, 지자문, 소면 도기를 특징으로 하는 3대 족군 집단이 형성됐다고 말했다. 승문도기 집단은 황허 중류에서 주로 웨이허 유역에서 활동했다. 소면도기 집단은 타이항(太行)산 동쪽의 황허 하류 지역에서 활동했으며, 지자문도기 집단은 주로 랴오허 서쪽 지역에서 활동했다.


뉴허량유적에서 신규 발굴 작업이 한창이다. 제1지점인 여신묘 근처에서 석제제방기단 건축군 유적 9기로 조성된 유적지가 발견됐다. 사진/텅옌옌


지금부터 7000~6500년 승문도기 집단은 소구평저병(小口平底瓶), 소구첨저병(小口尖底瓶), 고복관(鼓腹罐)을 파생시켰고, 소면도기 집단의 참여 아래 어문채도(魚紋彩陶)가 특징인 한 파와 ‘꽃(花)’ 모양 채도가 특징인 한 파로 분화됐다. 아마도 그들이 전설 속 화하(華夏) 집단일 것이다. 소면도기 집단은 부(釜), 지좌(支座)와 조합돼 정(鼎)으로 진화됐다. 이 집단은 아마도 전설 속 동이(東夷) 집단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 지자문도기 집단은 지자문동형관(之字紋筒形罐)의 주요 기물군을 기반으로 용의 이미지를 높였다.


장싱더 교수는 “훙산 문화와 훙산 문명은 바로 이 세 개 집단이 충돌, 교류, 융합된 산물이다”고 말했다. 그는 기원전 6500년 전후로 황허 하류 지역의 족군이 가장 먼저 확장을 시작해 한 갈래가 네이멍구 중남부로 향해 산시 북부와 중부로 진입하여 최종적으로 산시 남부 지역에 이르렀다고 설명했다. 다른 한 갈래는 북쪽을 향해 랴오허 서쪽으로 진입하여 지자문도기 족군과 충돌해 현지 토착을 배타적으로 몰아내 양자는 시라무룬허(西拉木倫河)를 경계로 균형과 안정을 이뤘다. 지금부터 5500년 전후, 승문도기 족군은 소면도기 족군을 향해 확장하여 훙산 문화와 지속적으로 충돌하고 융합해 훙산 문화 구역 내 기존 족군과의 균형이 깨졌다. 이로써 시라무룬허 이남에서 지자문도기 족군이 새롭게 나타났다.


그는 “때문에 당시 뉴허량에서 여신묘 같은 대규모 제사 성격의 건축물이 나타난 것은 우연이 아니라 훙산 사람이 같은 조상을 찾아 충돌을 피하고 새로운 질서 수립을 모색한 것이다. 그들은 천 년 동안 구전으로 전해진 기억에서 조상의 이미지를 만들어 냈다”고 설명했다. 장 교수는 기자에게 이런 의미에서 보면 여신묘 단계부터 뉴허량은 훙산 문화의 종교 성지였다고 말했다.


궈다순 명예원장은 고대 국가 문명의 측면에서 해석하면 훙산의 고대 국가는 현지에서 만 년 문화 발전의 두터운 기반을 가졌고, 동시에 주변에 있는 화베이(華北)평원의 양사오 문화와 긴밀하게 교류했다고 말했다. 특히 훙산 문화 말기에 중원식 채도가 훙산 문화 제사 유적에서 다량 출토되는 등 남북 교류가 활발했고, 이는 훙산의 조상이 이질적인 문화 요소에 상당히 포용적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며, ‘단묘총’이 주류를 이루는 고대 국가 출현의 원동력이 됐다. 남북 문화 교류는 훙산 문화가 5000여 년 전 문명사회로 진입하는 동력이었고, 중화 문명이 다원일체 구도의 기반을 다지는 데 기여했다.


랴오닝성문물고고연구원이 소장한 훙산 문화 도기. 당시 제작기술 여건에서 토기 뚜껑을 수리해 사용한 흔적으로 보아 이 토기는 특별한 의미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진/텅옌옌


중화문명 특성의 발현

궈다순 명예원장은 “중화 문명은 눈에 띄는 특징이 다섯 가지가 있다. 첫 번째 특징은 연속성이다. 중화 문명은 5000년 동안 이어졌고, 집중적이고 체계적인 근계가 바로 훙산 문화”라고 설명했다. 그는 “훙산 문화는 중국 역사 발전에 토대를 마련했고, 중화 문명은 5000년 동안 이어져 지금까지 계승됐다”며 “이는 중화 민족이 자신의 길을 걷는 데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고, 미래 역사의 길의 방향을 결정했다”고 말했다.


훙산 선인(先人)들은 이질적인 문화 요소에 포용적이고 혁신적이었다. 궈다순 명예원장은 “훙산 문화는 전혀 보수적이지 않아 주변 문화의 선진적인 요소를 판단하고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훙산 문화의 채도(彩陶)는 모두 외래적인 요소로 흡수 및 계승, 혁신을 거쳤고 제사용 기구로 많이 사용됐다. 이는 훙산 문화의 포용성과 혁신성이 일반적으로 높은 게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며 지금도 본받을 만하다”고 강조했다.


장싱더 교수는 “훙산 문화의 수천 년 족군 동질감과 교류, 융합은 족준의 결집을 촉진했고 족군 동질감 형성 단계로 진입했다”면서 “역사가 지역 국가와 족군의 대 충돌 단계로 진입하면 동질감을 우선시할 수 있게 됐다. 이는 중화 문명의 독특한 통일성을 집중적으로 보여준다”고 말했다.

1983년 11월 2일, 고고학자가 발굴 작업을 하고 있다. 여신상은 출토 시얼굴이 하늘을 향하고 두 눈을 크게 뜨고 미소를 살짝 짓고 있었다. 사진/자료사진 복사본


랴오닝성 문물고고연구원 연구관원 궈밍(郭明)도 훙산 문화는 사회 정체성과 문화 동질감을 기반으로 한 ‘대동(大同)’ 관념을 드러냈다고 말했다. 개방과 포용의 사회적 특징은 중화 민족의 중요한 문화적 바탕으로 훙산 문화의 제사 성격의 유적에서 나타난 규범, 일치성과 일상생활 영역의 다양성과 포용성은 훙산 문화의 특징을 잘 보여준 것이다.


장싱더 교수는 “훙산 문화는 1000년의 동질감 기반이 있다. 문화 동질감과 발전 방식이 고도로 일치해 자신의 발전의 길을 모색해냈고 문명 교류와 상호 배움을 추구해 나갔다. 때문에 우리는 충돌에 직면하면 어떻게 선택하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안다”고 말했다. 그는 기자에게 ‘화합 발전’이 훙산 문화의 발전 노선이고, 중국이 수천 년 동안 계승해온 전통이며, 중화 문명의 평화성을 충분히 드러낸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따라서 중화 민족은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이고, 5000년 문명사는 이렇게 발전해왔다”고 강조했다.


뉴허량 유적으로 대표되는 훙산 문화 고고학 연구는 지금부터 5000년 전인 중국 문명사의 핵심 시기까지 포함하는 중화 문명의 기원을 여는 열쇠다. 그러나 뉴허량 유적에 대한 인식이 여전히 제한적이어서 여신묘 등 중요한 유적이 아직 심도 있게 발굴되지 않고 있다. 현재 ‘훙산 사회 문명화 과정 연구’는 ‘고고 중국(考古中國)’의 중요한 프로젝트에 편입됐다.


뉴허량 고고작업참(站)에서 기자는 ‘고고 중국’ 프로젝트에 참여한 대학생 10여 명을 만났다. 중국런민(人民)대학의 한 석사생이 기자에게 그들의 일상 업무를 소개해주었다. 청춘의 열정과 자신감이 넘치는 그들은 훙산 문화의 백 년 고고학 연구에 청춘의 힘을 계속 주입하고 있어 조만간 훙산 조상들과의 거리가 더 가까워질 것이다.

글|쉬하오(徐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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