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9-21
왕희지(王羲之, AD 303~361년), 자는 일소(逸少), 중국 동진(東晉) 시기의 서예가이다. 왕희지는 일찍이 여성 서예가 위삭(衛鑠)을 스승으로 모시고 장지(張芝)와 종요(鍾繇)의 서예를 계승했다. 후에 자신만의 서법을 창조해 후세에 깊은 영향을 끼쳐 ‘서성(書聖)’이라 불린다. 왕희지의 대표작들은 매우 많다. 전해져 내려온 당나라 시기의 모사본으로 <난정서(蘭亭序)>, <쾌설시청첩(快雪時晴帖)>, <상란첩(喪亂帖)> 등이 있다. 이중 <난정서>는 문장이 일품일 뿐 아니라 서법 역시 천하제일행서(天下第一行書)로 알려져 있다. 왕희지의 아들 왕헌지(王獻之)도 유명한 서예가이다. 후대에 이들 부자를 ‘이왕(二王)’으로 칭하기도 했다.
김춘추와 신라의 ‘집자’ 비문
AD 648년, 김춘추는 당나라에 출사해 당 태종(太宗)에게 칙사 대접을 받았으며, 당나라에서 석전대제(釋奠大祭) 등을 견학·참관할 수 있도록 허락 받았다. 당 태종은 김춘추를 매우 좋아하여 진사(晉祠) 비문을 포함해 많은 선물을 하사했다. 진사 비문은 당 태종이 당나라 황실 선조들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친필로 쓴 글이다. 비석에 새겨져 있으며 서법은 왕희지의 필법을 모방했다. 이는 당 태종이 왕희지의 ‘엄청난 팬’이었기 때문이다. 왕희지의 ‘서성’이라는 지위 확립은 당 태종의 추앙과 불가분의 관계라 할 수 있다. 아마도 이 시기에 당나라의 영향으로 신라 사람들이 왕희지 서예의 매력을 조금씩 알기 시작했을 것이다.
<삼국사기>에는 김생이라는 8세기 신라 서예가에 대한 짧은 기록이 있다. 김생은 미천한 출신이었지만 어려서부터 서예를 배워 예서(隸書)와 행초(行草) 모두 입신의 경지에 이르렀다. 그의 많은 작품들이 고려 시대에도 전해졌다. 고려의 학사 홍관이 사절단을 따라 송나라에 가게 되었는데, 그가 가지고 간 김생의 서예를 송나라 관원들에게 보여주자 송나라 관원들은 이를 왕희지의 작품으로 착각했다고 한다. 김생의 서법이 왕희지의 스타일을 흡수, 융합했을 수도 있음을 볼 수 있다.
이 외에도 신라 시기 많은 비문들이 왕희지체의 집자비(集字碑)다. 대표적으로 무장사 아미타불조상사적비, 성주사비 등이 있다. 집자란 서예가의 작품에 담긴 글들을 모으거나 모사해 자신의 문장으로 재구성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마치 서예가가 직접 글을 쓴 것처럼 보인다. 흥미로운 것은 9세기 말 경주 숭복사의 비문이다. 비문 작성자는 서법 조예에 자신이 있기 때문에 비문에서 자신을 중국 남제(南齊)의 서예가 장융(張融)에 비유하며 자신이 ‘이왕’의 서예 기교를 어느 정도 숙달했다고 여겼다.
고려에까지 알려진 왕희지의 사적
고려 왕실은 왕희지의 서예 작품을 소장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0세기, 중국에서는 당나라 말기 오대(五代)의 혼란을 겪으면서 고대의 진귀한 서적 일부가 사라졌다. 이에 송나라는 고려에 고서를 요청했는데 그중에 <왕희지소학편(王羲之小學篇)> 한 권이 있었다. 당시 고려의 귀족, 사대부 모두 왕희지를 잘 알고 있었을 것이라 짐작할 수 있다. 고려 말기, 공양왕은 대신 성석린이 일찍부터 유교 경전을 통독하고 서예에서도 종요와 왕희지의 문체를 이어받았다는 뜻에서 그를 ‘조통추로지서, 원계종왕지필(早通鄒魯之書, 遠繼锺王之筆)’이라 칭찬했다.
<파한집(破閒集)>에 따르면 고려의 장원(狀元) 유희운은 ‘우심척합공희지(牛心只合供羲之)’라는 시를 지었다고 한다. 이는 <진서∙왕희지전(晉書·王羲之傳)>의 전고(典故)에서 나온 말이다. 왕희지가 13세에 명사 주의(周顗)의 연회에 참석했는데, 주의는 왕희지를 자세히 관찰하고는 각별히 마음에 들어 진귀한 요리인 우심적(牛心炙)을 다른 손님들 보다 먼저 왕희지에게 맛보게 했다. 주의가 이처럼 왕희지를 극진히 대접한 덕분에 왕희지도 점차 유명해졌다.
또한 고려는 신라 시기의 집자 전통을 계승했다. 예를 들어, 고려 충렬왕 시기에 세워진 보각국사비명(普覺國師碑銘)은 승려 죽허(竹虛)가 명을 받아 왕희지의 서법을 집자해 새긴 것이다. 현재 경상북도 군위군 인각사에 소장돼 있다.
조선 시대에도 추앙 받아
<문종실록>에 따르면 조선의 문종은 조자앙(趙子昂)의 서예를 좋아하고 왕희지의 문체를 배우면서 서예가 높은 경지에 이르렀다고 한다. 또한 문종은 안평대군이 진상한 <왕희지진행초(王羲之真行草)> 등의 서첩을 교서관에서 번각하여 세인들이 참고토록 했다. 세조는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교서관에 소장된 명가의 서예 작품들을 성균관에 보내 유생들이 배우도록 했는데, 여기에는 왕희지의 <동방삭전(東方朔傳)>과 <난정서>가 포함돼 있었다. 1457년, 세조와 대신들은 서예를 논하고 직접 왕희지, 조자앙의 서첩을 꺼내 전시하며, 법첩(法帖)을 널리 배포해 서예에 능한 조선인을 많이 양성할 것을 명했다.
성종 때 어느 날 기영회(耆英會, 고급 관료나 공신으로 나이 많은 사람들을 초청하여 베푸는 연회)가 열리자 성종은 홍문관의 젊은 관원들에게 참석할 것을 명했으나 도승지 김승경의 반대에 부딪혔다. 김승경은 기영회가 존현양로(尊賢養老)를 위해 열렸기 때문에 젊은 관원들이 참석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했다. 성종은 이를 옳다 생각하지 않고 왕희지의 <난정집서(兰亭集序)>에 나오는 ‘군현필지, 소장항집(羣賢畢至, 少長咸集)’을 인용하며 나이가 많든 적든 모두 함께 모일 수 있다고 반박했다. 광원군 이극돈은 성종에게 여러 차례 서예 작품을 진상했다. 그중 <증도가(證道歌)>와 <원각경(圓覺經)>은 불경으로, 조선의 숭유 국책과 맞지 않았지만 광원군은 필적을 왕희지의 서법이라 생각해 ‘감헌지(敢獻之, 감히 이를 바친다)’ 했다. 성종은 이를 거부하지 않고 오히려 참고하고자 했다. 이로써 성종이 왕희지의 서예를 매우 좋아했음을 알 수 있다.
석봉 한호는 ‘조선 서예의 일인자’라 알려져 있다. 어릴 때부터 서예를 좋아해 ‘몽왕우군수이소서(夢王右軍授以所書, 꿈에 왕희지에게 글씨를 받아)’를 했고, 이로부터 ‘임첩약유신조(临帖若有神助, 범첩을 할 때마다 신이 돕는 것 같다)’라 했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는 물론 일본인들까지 명성을 듣고 그의 서예를 구하고자 했다. 명나라 관리 주지번(朱之蕃)은 한호의 서예가 왕희지, 안진경(顏真卿)과 경쟁할 수 있다고 여겼다.
영조 역시 왕희지를 추앙했다. 영조는 <난정서>를 읽으면서 보면 볼수록 재미있어 이를 대신들과 함께 공유했다. 조선 중기의 문신 최희량은 ‘문장한퇴지, 필법왕희지(文章韓退之, 筆法王羲之)’, 즉 한유의 문장이 으뜸이고 왕희지의 서법이 으뜸이라고 시를 지었다. 숙종 시기의 선비 이서는 서법에서 정자(正字), 행서(行書), 초서(草書)를 막론하고 왕희지를 집대성자로 여겼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왕희지는 중한 양국의 서예사에 깊은 자취를 남겼으며 서예가의 대명사가 되었다.
글|위셴룽(喻顯龍) , 상하이(上海)외국어대학 글로벌문명사연구소 전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