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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서양의 비교(하편)


2023-10-23      



서양 중심주의자들은 로마와 프랑크를 모델로 삼아 다른 문명을 이해했다. 프랑크의 ‘복합적 군권(君權)’에 대해 샤를마뉴 대제는 ‘프랑크 왕과 롬바르드 왕’의 족장 신분이 중심이고 로마 황제 신분은 두 번째라고 말한다. 샤를마뉴 제국은 다민족 연합체였다. 황제가 조서를 내리면 이탈리아와 프랑스, 독일로 나눌 수 있다. 일부 학자는 이런 패러다임을 중국에 적용했다. 예를 들어 미국의 신청사(新清史) 학자들은 청나라 황제도 복합적인 군권을 가졌다면서 청나라 황제는 만주족의 족장, 한족의 황제, 몽골인의 칸, 티베트 불교 문수보살의 화신 등 여러 신분을 겸임했다고 주장했다.


화하(華夏)와 내륙 아시아

중원, 동북, 몽골, 시짱(西藏)의 통일은 황제의 ‘다중 신분’을 유일한 연결고리로 삼았기 때문에 청나라 황실이 붕괴되면 각 민족은 각자 자유롭게 흩어질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관점은 만주와 몽골, 시짱과 중원의 통치 시스템을 완전히 무시한 것이다. 청나라는 동북에서 융통성 있는 방식으로 군현제를 추진했고, 도시에서도 만주족과 한족 격리 정책을 빠르게 제거했다. 한때 민족의 자치권이 있었지만 과도기를 거쳐 군현제가 됐다. 가령 몽골의 맹기제(盟旗制)와 남방의 개토귀류(改土歸流)가 있다. 중국의 이민족 군주는 자신의 신분을 족장이 아닌 중국의 황제라고 인식했으며, 이는 이민족과 한족을 나누지 않고 모든 중국인을 통치하는 합법성을 상징한다.


서양의 일부 학자는 더 나아가 ‘문화 기호’와 ‘신분 인식’을 통해 중국 역사를 해석한다. 신장(新疆), 시짱, 몽골 더 나아가 동3성을 ‘내륙 아시아’로 나누고, 북위에서 요·금·원·청 등 북방 민족이 건립한 정권에서 ‘내륙 아시아’의 문화 동질감을 찾으며, 이를 ‘침투 왕조’와 ‘정복 왕조’으로 나눴다. 그들은 유목민족 특유의 풍속 의궤에 따라 왕조의 내륙 아시아성을 판단한다. 예를 들어 몽골에서 유지되고 있는 알이타(斡耳朵)의 제사와 행국(行國), 행전(行殿) 풍속, 청나라에서 성행한 샤먼의식, ‘입간대제(立桿大祭) 같은 초원의 제천의식 등이다. 이것은 ‘예속(禮俗)’과 ‘정도(政道)’의 차이를 제대로 헤아리지 못한 것이다.


중화 문명의 핵심은 예의, 풍속, 예술, 생활습관이 아니라 어떤 기본제도를 사용해 정치 체계를 구축하느냐에 있다. 북방 출신의 천자가 검은 양탄자에서 즉위하든 교례(郊禮)에서 즉위하든, 관면을 쓰든 변발을 하든, 샤먼을 믿든 불교를 믿든, 천하 분할 통치가 아닌 유가와 법가 대통일을 시행하고, 부족 신권제가 아닌 군현 문관제를 시행하며, 민족간 차등이 아닌 백성을 하나로 보면 중국의 천자다.


신조식(信條式) 국가 신분

고환(高歡)은 선비족의 풍습대로 새 황제가 됐지만 관료제와 법률에서는 ‘한화(漢化)’를 계속했고, 북제의 법률은 수당의 법률로 발전했으며, 북제의 시험을 통한 관료 선발은 남조의 규모를 훨씬 뛰어넘었다.


서요의 야율대석(耶律大石)은 대패해 중앙아시아와 신장으로 물러나 카라키타이를 세우고 자신을 ‘구르칸(GurKhan)’이라고 칭했다. 당시 중앙아시아는 ‘이크타’라는 분봉제를 시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야율대석은 이크타를 폐지하고 중원 왕조의 제도를 도입했다. 행정적으로는 중앙 집권을 시행하고, 직할 영지에는 문관제를 시행했으며, 병권을 중앙으로 귀속시키고, 한자를 정부 공식 문자로 지정했다. 세금은 호당 ‘1디나르’를 징수했다. 러시아의 동양학자 바르톨트는 이를 ‘중국의 십일조’라고 했다.


원나라는 중앙집권제를 시행했다. 중앙에는 중서성을 두고 정무를 총관했고, 지방에는 ‘행중서성’을 설치했다. 문화적으로는 다양한 종교가 병존했지만 정치적으로는 여전히 유가와 법가로 통치했다. 다른 3대 몽골 칸국은 분봉제를 시행했지만 쿠빌라이는 1271년 <역경(易經)>의 ‘대재건원(大哉乾元)’을 취해 국호를 ‘대원(大元)’으로 변경한 뒤 중원 왕조로 변신했다. 원나라의 역대 황제는 유학을 배우거나 공자를 숭상하였고 관료제도는 한제(漢制)를 따랐고 존호, 묘호, 시호 등 한(漢)나라식 명칭을 사용했으며 도성, 궁궐, 조의, 인감·옥새, 피휘 등 한나라식 의식과 제도를 사용했다.


청나라의 정치제도는 더 말할 것도 없이 모든 이론 자원과 제도 안배에서 중화 문명을 따랐다. 초원 민족이 건설한 왕조의 풍속 의식은 아무것도 설명할 수가 없었다. 국가의 성격 변화는 통치 체제를 보면 알 수 있다. 샤를마뉴 대제는 ‘신성 로마’의 대관을 받아들였으나 카롤링거 왕조를 ‘로마’로 바꾸지 않았다. 프랑크의 통치 체계는 로마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반면 청나라는 체발역복(剃發易服)을 했지만 당연히 그대로 중국이었다. 그 통치 체계가 바로 중국이기 때문이다.


‘화하’와 ‘내륙 아시아’는 언제나 “네 안에 내가 있고”, “내 안에 네가 있다”로 요약된다. 하·상·주(夏·商·周) 3대에도 ‘내륙 아시아’가 있었다. 산시(陜西) 석묘(石峁)유적에서 유라시아 초원 스타일이 강한 석조 인물상과 돌성이 발견됐다. 은허(殷墟)의 고분에서 초원 민족 스타일의 영향을 받은 청동기가 대량 출토됐다. 간쑤(甘肅) 리(禮)현 진공대묘(秦公大墓)는 진나라 사람 중에 강인(羌人)과 저인(氐人)이 섞여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최후의 한족 왕조’라 불리는 명나라에도 사실 몽골 풍습이 많았다. 주원장(朱元璋)이 조서에 쓴 언어 스타일은 원나라 공문서의 경역(硬譯) 문체였다. 명나라 황제는 초원의 칸, 시짱의 문수보살과 전륜성왕, 이슬람교의 비호자라는 몇 가지 신분이 있었고 심지어 명나라의 의복도 원나라 풍이었다.


민족, 종교, 풍속, 신화로 세계를 나누는 것은 서양 문명의 습관이다. 그들의 역사에서는 현대의 문관 체계가 늦게 나타났고 정치 통합 사회의 전통이 적었기 때문이다. 최근 서양은 ‘문화 기호’와 ‘신분 정치’를 강화해 자신도 ‘부족 정치’의 분열 결과를 가져왔다.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신조식 국가 신분’의 국가 정체성을 언급하면서 “이런 정체성은 공통된 개인 특징, 생활 경험, 역사 유대나 종교 신앙 위에 구축되는 것이 아니라 핵심 가치관과 신념을 둘러싸고 구축되는 것이다. 이런 관념의 목적은 공민이 자기 국가의 근본 이념을 인정하는 것을 독려하고 공공 정책을 이용해 의식적으로 새로운 구성원을 융합하는 것에 있다”고 정의했다.


이하지변(夷夏之辯)과 중화무외(中華無外)

이하지변(한족과 오랑캐의 구분)은 천 년 동안 계속됐고 지금도 ‘무엇이 중국’이냐는 논쟁을 일으킨다. 많은 변론가가 전체적인 역사를 고려하지 않고 역사서의 ‘한 마디의 말’을 들어 논쟁을 일으킨다. ‘이하지변’은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에서 처음 등장했다. ‘남이여북적교, 중국부절약선(南夷與北狄交, 中國不絕若線. 남쪽의 오랑캐와 북쪽의 오랑캐가만날 정도로 중국의 상황이 위급하다.)’ 여기서 ‘북적’은 제환공이 처음으로 임금을 숭상하고 오랑캐를 물리친 ‘백적(白狄)’을 말하고, ‘남이’는 초나라를 말한다. 그러나 전국시대, 특히 진한 시대에 이르러 과거의 ‘화(華)’와 ‘이(夷)’가 모두 ‘편호제민(編護齊民)’이 됐고 천하가 모두 왕법(王法)을 시행하고 민족의 구별이 없어졌다.


두 번째 ‘화이지변’의 절정기는 남북조 시대로 서로를 오랑캐라고 부르며 정통을 다퉜다. 당나라 때는 ‘화이지변’이 약화됐다. 당태종은 “자고개귀중화, 천이적, 짐독애지여일(自古皆貴中華, 賤夷狄, 朕獨愛之如一)”이라고 말했다. 조정 안팎이 모두 각 민족의 엘리트라는 것이다. 이후 ‘안사의 난’은 번진(藩鎭)의 문제였지 민족 문제가 아니었다.


세 번째 절정기는 송나라 때였다. 송나라의 경제 문화는 절정에 달했지만 통일할 힘은 없었다. 요·금과 서하의 강력한 군사력 앞에서 송나라는 자기 고착화를 통해 높고 낮음을 구별했다. 진종은 봉선(封禪)과 천서(天書)를 연출했고, 사대부도 ‘화이지변’을 외쳤다. 그러나 요·하·금 모두 한(漢) 문명을 흡수했고 남북이 모두 같은 말을 사용했다. 원나라 때 ‘화이지변’은 다시 약화됐다. 소위 ‘사등인제(四等人制, 원나라 통치자는 한족과 다른 소수민족에 대한 통치를 유지하기 위해 몽골인을 통치 민족의 1등급으로 정하고 정복한 지역의 민족을 서역의 색목인, 북방의 한(漢)인, 남방의 남인 3개 등급으로 나눴다)’는 지금도 논쟁 중이다.


네 번째 절정기는 명나라 중기이다. 명나라 초기, 주원장은 반원복한(反元復漢)을 주장했지만, 나라를 세우자 즉각 원나라의 중원 입성은 ‘하늘의 뜻’이었다고 하면서 천하 통일을 선양하고 “화이무간, 성씨수이, 무자여일(華夷無間, 姓氏雖異, 撫字如一)”이라고 했다. 또 쿠빌라이를 역대 제왕묘와 삼황오제, 양한당송(兩漢唐宋) 개국 공신과 같이 제사를 지냈다. 토목지변(土木之變)으로 명 영종이 포로가 되자 명나라의 자존심이 크게 손상돼 쿠빌라이를 묘 밖으로 철수시켰다.

다섯 번째 절정기는 명과 청이 바뀔 때였다. 강희제가 공자를 참배한 이후 청나라의 황제들은 한(漢) 문명을 철저하게 따랐다. ‘화이지변’은 다시 한번 사라졌다.


이하지별(夷夏之別)은 문화제도론이다. 중화의 도통, 법통, 정통을 받아들이면 하늘의 뜻을 받을 수 있다. ‘천하무외’이기 때문이다. ‘화이지변’의 강약은 국가의 통일과 분열에 달려 있다. 천하가 분열되면 각 민족은 서로를 오랑캐라고 부르고, 왕조가 통일되면 집권자들은 ‘화이지변’을 없애려고 노력한다.


전세계 문명의 공통점과 차이점

로마도 마찬가지였다. 로마 제국이 번영할 때의 철학은 ‘세계주의’였다. 4세기 이전 로마의 사학자들은 ‘야만족(바바리안)’에게 찬사를 보냈다. 예를 들어 타키투스는 게르만인의 민주, 무예 숭상, 순박한 천성 등을 “우수한 풍속과 습관”이라고 칭찬했다. 로마 제국 중기 이후의 막시미누스, 필리프, 클라우디오스 등 황제들은 ‘야만족 혈통’이었다. 가이우스, 솔, 바쿠리우스, 아이티우스 같은 인물도 ‘야만족’이었다. 심지어 서고트의 침입에 저항한 로마의 장군 스틸리코는 반달족이었다. 4세기 이후 제국이 분열되자 로마인은 원한이 가득했다. 6세기의 사학자는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야만족을 대거 유입시켰다”며 제국 멸망의 원흉이라고 비난했다. 야만족도 ‘영웅의 출신’을 논증하기 시작했다. 테오도리쿠스는 말년에 보이티우스에게 배신을 당한 뒤 궁정 사학자에게 <고트인 역사>를 쓰게 하면서 자기 가족은 17대에 걸친 찬란한 역사를 가졌다고 강조했다.


모든 문명의 내부에는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다. 공동체가 분열될 때는 각 정치세력 중심은 경계를 정하고 자신을 공고하게 하기 위해 차이를 과장하고 영원히 분열될 때까지 공동체를 낮게 평가한다. 공통적인 조상, 언어, 기억, 신앙이 있어도 정치 중심 세력 간 경쟁이 있으면 이런 비극이 생긴다. 교파 분열, 민족 와해,도 예외가 없다.


정치 통일은 다양한 문화 존재의 기초다. 정치 일체화가 공고할수록 다양한 문화가 개성을 최대한 확장할 수 있다. 정치 일체화가 약할수록 다양한 문화가 서로 싸우고 결국 소멸한다. 일체와 다원은 한쪽이 쇠하면 다른 한쪽이 흥하는 것이 아니라, 같이 약해지고 같이 강해지는 것이다. 일체와 다원의 변증 관계를 이해하지 못하면 세계를 나누고 자신도 혼란스러워질 것이다. 



글|판웨(潘岳), 역사학 박사이고 중국공산당중앙위원회통일전선사업부(中央統戰部) 부부장, 중국 국가민족사무위원회 주임·당조(黨組) 서기이며, 중국공산당 제20기 중앙위원회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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