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9-21
다른 역사관은 다른 문명에서 비롯된다. 중국의 오호(五胡)는 중화 문명의 ‘합(合) 논리’를 함양했고, 유럽의 야만족은 로마 문명의 ‘분(分) 논리’를 강화했다.
자치와 군현
로마제국 제도의 본질은 기층 자치다. 이후의 유럽은 어떤 정치 체제를 채택하든, 국가 관리의 틀은 모두 도시 자치, 족군(族群) 자치, 영주 자치의 형태를 띠었다.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 민주 정치에서 로마제국의 자치 도시까지, 중세 초기 성루가 즐비한 봉건 왕국에서 중세 말기 이탈리아 도시공화국(베니스, 제노바)까지, 또한 ‘소공화국’ 방안에 따라 건설된 북미 각주의 공화국에서 유럽의 ‘한 민족 한 국가’ 모델에 따라 건설한 민족국가까지 다 그랬다.
시대를 막론하고 유럽인의 제도, 역사관과 가치 인식에서 기층 자치는 핵심 열쇠였다. 타키투스가 주장한 ‘야만족의 자유’에서 몽테스키외가 칭찬한 야만족 독립 할거의 성격까지, 기조(Guizo)가 주장한 앵글로 색슨인의 지방자치 전통에서 기원한 대의제 정신까지, 다시 알렉시 드 토크빌이 고찰한 미국의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지방자치까지, 모두 중국 현대 역사가 첸무(錢穆)의 말처럼 “유럽사를 살펴보면 그들은 그리스 때부터 늘 분열돼 각자 나라를 세우고 협력하지 않았다. 큰 적이 몰려오고 위기가 눈 앞에 있어도 각 지역은 여전히 융합하지 않았고 협력하지 않았다. 서양 역사는 복잡해 보이지만 사실 단순해서 외부적으로는 복잡하지만 내면은 단순하다. 서양 역사에서 말하는 영국인, 프랑스인은 화학 단위와 비슷하다. 반면 중국 역사상의 중국인은 화학의 혼합제와 같다.”
중국은 지배층이 바뀌어도 국가 관리의 기초는 늘 현향(縣鄉) 두 개의 기층 정권이었다. 영국의 역사학자 사무엘 파이너(Samuel E. Finer)의 말처럼 중국은 현대적 형태의 관료기구의 ‘발명가’다. 진한(秦漢) 시대 대일통의 중앙집권 군현제 국가 이후 기층 정권은 모두 중앙에서 파견하고 관리하는 문관 체계에 편입됐다.
역사적으로 짧은 봉건 할거 기간도 있었지만 대일통의 중앙집권 군현제가 항상 주류였다. 물론 정치 실권은 없는 식읍제도나 기층의 관료와 토호의 협력제도 같은 변형된 봉건제가 남아 있기는 하지만 자치는 제한됐고 국가 권력이 일찌감치 사회 구조의 각 층으로 이입돼 유럽식 기층 자치는 존재하지 않았다.
로마의 시각으로 진한 시대를 본다면, 중앙집권의 약점은 사소한 일이 전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이다. 지방의 반란이 쉽게 전국적인 폭동으로 번질 수 있다. 반면 로마에서 발생한 반란은 모두 지방 성격의 것으로 바로 이 점이 기층 자치의 장점이다. 사무엘 파이너는 “한(漢) 제국의 생존을 위협하는 중국식 농민 봉기가 로마에서는 발생한 적이 없다”고 생각했다.
진한의 시각으로 로마를 본다면, 로마 이후의 유럽이 종족 종교로 인한 문명 충돌이 천 년이나 이어질 수 있는 것이 이상할 것이다. 기원후 4~6세기 비잔티움과 페르시아는 6차례 전쟁을 했고, 7~11세기의 400년 동안 아라비아와 비잔티움이 전쟁을 했다. 8~15세기 800년 동안 스페인 기독교와 무슬림이 전쟁을 했고, 10~13세기 십자군은 9차례나 원정에 나섰다. 13~15세기에는 비잔티움-오스만 전쟁, 스코틀랜드가 영국에 항거하는 전쟁이 있었다. 1455~1485년에는 전 유럽이 30년 종교전쟁에 휩싸였는가 하면 거의 어느 한 세기 동안에도 민족과 종교의 진정한 화해가 이뤄지지 않았다.
‘문치(文治)’ 분야에서는 중화 문명이 고대 세계 전체를 앞섰다고 할 수 있다. ‘로마 자치’가 더 우수하다고 여기는 사무엘 파이너도 “한(漢) 제국은 다른 국가와 제국과 달리 군사적 영예를 무시했다”고 인정하면서 “한 제국은 군국주의에 진심으로 반대한 제국이었다. 한 제국의 특징은 ‘교화’에 있다. 즉 중국인이 말하는 ‘문(文)’이다. 종교적인 관용과 문명 교화 제창이 제국의 영광 이상을 구성했다”고 설명했다.
‘소 공동체’와 ‘대 공동체’
서양 사회는 ‘소(小) 공동체’에서 생존하는 것을 선호했다. 폴리스 정치에서 봉건 자치까지, 소공화국에서 다시 미국의 지방자치까지, 이것은 최종적으로 자유주의 개인권리 지상으로 변화했다. 중국 사회에도 다양한 ‘소 공동체’가 있었다. 예를 들어 가족, 향신, 각종 민간 사회단체가 있었다. 하지만 결국 하나의 ‘대(大) 공동체’를 추구했다. 즉 ‘가국천하(家國天下)’를 추구한 것이다.
서양의 많은 학자가 서양의 중세는 분열과 혼란의 시대였지만 발전을 이뤘다고 자신 있게 말한다. 현대 이전 유럽에서 발생한 일련의 전쟁으로 유럽에 상비군과 이성적인 관료제, 현대 민족 국가와 공업 자본주의가 생겼기 때문이다. 국지적으로 수백 년 동안 지속되고 한번에 상대를 괴멸할 수 없는 국부 전쟁으로 패전국은 경험을 계속 취합해 기술을 축적 발전시킬 수 있었다. 봉건사회의 분열성과 계급성은 상업자본 형성에 유리했고 상업이 통제하는 독립적인 도시가 출현해 자본주의로 나아가기 더 쉬웠다. 이런 봉건제와 국가가 약하고 여러 나라가 경쟁하는 체제가 근대 유럽이 모든 오래된 문명을 초월할 수 있었던 이유다.
달리 말하면 중국은 너무 통일적이어서 천 년 동안 국부 전쟁과 다원화된 경쟁 체제가 없었다. 중국은 권력이 너무 집중돼서 세습 귀족과 상인이 통제하는 자치도시가 없었고, 공업 자본주의가 형성될 수 없었다. 때문에 ‘대일통’은 오히려 역사 발전의 장애물이 됐다. 중국의 춘추시기에는 여러 나라가 경쟁하고 분봉제도가 있었다. 진나라가 6국을 통일하고, 한나라가 ‘폭진(暴秦)’의 여론 속에서도 ‘진나라 제도를 계승’한 것은 바로 전국시대 300년 동안 초대형 전쟁으로 백성들 사이에 ‘천하에 전쟁이 끊이지 않아 고달픈 이유는 제후가 있기 때문이다’라는 인식이 팽배했기 때문이다. 중국에 그런 단계가 없었던 것이 아니라 그런 단계를 거치고 포기한 것이다.
중화 문명의 현대화 전환에 대한 진정한 고찰은 대일통 유지를 기반으로 질서와 자유를 어떻게 동시에 실현하고 ‘대 공동체’와 ‘소 공동체’ 제도의 장점을 동시에 갖추냐는 것이다. 이것은 서양의 다원화된 자유주의보다 더 높은 기준이다.
글|판웨(潘岳),역사학 박사이고 중국공산당중앙위원회통일전선사업부(中央統戰部) 부부장, 중국 국가민족사무위원회 주임·당조(黨組) 서기이며, 중국공산당 제20기 중앙위원회 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