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3-19
소셜미디어에서 바비큐(燒烤)로 유명세를 탄 산둥(山東) 쯔보(淄博)는 한국인 관광객들도 명성을 듣고 찾고 있는 곳이다. 쯔보는 과거 제(齊)나라의 수도 임치(臨淄, 린쯔)였다. 2800여 년이 지난 지금, 그 당시 유적을 찾아 보긴 어렵지만 춘추전국시대의 역사를 떠올릴 때면 반드시 언급되는 인물 중 하나가 바로 관중(管仲)이다.
중국 춘추시대의 전설적 인물 ‘관중’
기원전 8세기 초에 태어난 관중은 성은 희(姬), 씨는 관(管), 이름은 이오(夷吾), 자는 중(仲)이다. 지금의 안후이(安徽)성 잉상(潁上)현 출신이다. 제나라 상경(上卿)에 올라 제 환공(桓公)이 춘추 첫 번째 패자(霸者)가 되도록 도와 후세에 ‘관자(管子)’로 칭해졌다.
어릴 적 집안이 가난했던 관중은 생계를 위해 친구인 포숙아(鮑叔牙)와 함께 장사를 하며 풍부한 경험을 쌓았다. 이후 종군하게 된 관중은 제나라에 와서 공자 규(糾)를, 포숙아는 공자 소백(小白)을 보필했다. 기원전 686년, 제나라에 내란이 발생했고 다른 지역으로 피신한 규와 소백이 왕위를 놓고 다투게 됐다. 수도 임치로 향하던 도중 관중은 공자 소백과 마주쳤다. 활로 소백을 쐈으나 화살이 구리 허리띠에 걸리면서 소백은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포숙아의 조언에 따라 소백은 죽은 척 해 관중을 속였고, 먼저 수도에 입성해 왕위에 올라 그 유명한 제 환공이 됐다. 이후 포숙아의 주청으로 제 환공은 과거의 원한은 따지지 않고 관중을 상경에 등용하고 ‘중부(仲父)’라고 칭했다.
관중은 국정을 주관하면서 내부적으로는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해 새로운 제도를 마련하고 상업 발전을 중요시했다. 대외적으로는 왕을 높이고 오랑캐를 배척한다는 ‘존왕양이(尊王攘夷)’를 추진해 쇠락해가는 주(周)나라 천자를 옹호하고, 제후회맹(諸侯會盟)과 군사 정벌을 통해 제 환공을 패자로 만들었다.
관중 이야기는 <좌전(左傳)>, <국어(國語)>, <전국책(戰國策)>, <사기(史記)>, <관자(管子)> 등 사서에 많이 기록돼 있다. 이 가운데 <관자>는 관자가 집필했거나 후세가 관중의 말을 수집한 어록이라고 전해오지만, 관중과 무관하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사서에 기록된 내용을 보면 시대를 초월한 관중의 재능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관중은 토지의 질과 생산량에 따라 세수를 책정해 생산력 향상을 추진했다. 특히 염전업을 중요시해 새로운 제염법을 창안했고 제나라는 큰 수익을 얻었다. 지금도 중국 여러 지역에서 관중을 ‘소금왕(鹽王)’이라고 부르며 사원을 지어 모시고 있다.
관중은 적극적으로 국영사업을 육성했고 상업과 무역, 화폐 수단을 활용해 국가의 전략 목표를 달성했다. 이를 ‘경중지술(輕重之術)’이라고 했다. 노(魯)나라의 직물과 초(楚)나라의 들사슴을 대량으로 매입해 노나라 사람들은 직물 제작에, 초나라 사람들은 사냥에 몰입하도록 유도했다. 이렇게 농사를 소홀하게 된 노나라와 초나라는 식량이 부족해졌고 마침내 굴복했다. 관중은 백성은 배불리 먹고 따뜻하게 입어야 문명과 예의를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해 ‘치국지도 필선부민(治國之道 必先富民, 나라를 다스리는 이치는 반드시 먼저 백성을 부유하게 하는 것임)’을 주장했다. 관중은 경제에 능했기 때문에 중국 민간에서는 오랫동안 그를 재물신의 화신이라고 여겼다.
고대 한국의 정치와 관중
최치원은 한국 한문학의 시조로 자신의 문장에서 여러 차례 관중을 언급했다. 예를 들어 <답양양극장군서(答襄陽郄將軍書)>에서 최치원은 옛사람을 본받아 관중과 포숙아와 같은 관계를 희망했다. 1134년, 고려 인종은 조서를 내려 신하들에게 근면하게 정사를 돌볼 것을 독려하면서 자신을 제 환공에 비유하고 신하들에게 관중이 되길 바란다고 했다. 문신 윤소종은 창왕에게 상소를 올릴 때 제 환공이 관중에게 배운 다음 그를 신하로 삼았던 것을 언급하며 창왕이 스승을 존경하고 도리를 중히 여기길 바랐다.
조선시대 태종은 군량과 급료 문제로 고민했다. 사간원은 관중이 바닷물을 끓여 소금을 제조해 나라를 부강하게 했던 사례를 들며 염전 관리를 둬 소금으로 국가 수익을 창출하자고 건의했다. 세종도 조선이 삼면이 바다라는 점을 고려해 관중의 경험을 본받아 어업과 염전업에서 수익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세조가 즉위한 뒤, 신숙주와 한명회를 일등 공신으로 봉하고 신숙주가 ‘관중이 제 환공을 보필했던 것과 같은 도움’을 줬다고 칭찬했다. 또 한명회와 자신은 관중이 제 환공을 보좌한 것처럼 군신 간 미담을 만들었다고 했다.
선조 때 병조에서는 ‘관자 내정지법(管子內政之法)’을 본받아 관군 외에 민병을 훈련시켜 백성들이 마을에서 서로 돕도록 하자고 주청했다. 현종 때 부호군 이유태는 관중의 군사 기술을 배워야 한다고 제안했다. 인조 때 올라온 상소에는 파벌과 계층을 따지지 말고 오로지 재능만으로 인재를 선발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다. 비록 관중은 한때 죄인이었던 적이 있었지만 그가 상경이 돼 군주를 도와 패업을 이루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는 것이다.
효종 때 사서 민유중은 상소에서 관중과 제 환공의 일화를 들었다. 술에 취해 관(冠)을 잃어버린 제 환공이 수치스러워 사흘 동안 조정에 나오지 않자, 관중은 이는 국가의 수치가 아닌데 군주가 어찌 이를 이유로 정사를 돌보지 않냐고 했다. 이에 제 환공은 태도를 바꿔 식량 창고를 열어 가난한 백성을 구제하고 가벼운 죄를 지은 이들을 사면했다. 백성들은 기뻐하며 “임금은 왜 다시 관을 잃지 않으시는가”라고 노래했다. 민유중은 이 이야기를 통해 효종이 늘 스스로를 돌아볼 것을 상기시키고 실천할 것을 당부했다.
고대 한국 선비가 생각한 관중
고려 문신 이색은 <관중>이라는 시에서 관중의 뛰어난 재능과 충심, 제국의 패업을 이룬 공적을 찬양했다. 많은 고대 한국인이 관중에 대해 가졌던 인식이기도 하다. 조선 말기 류인석은 <국병설(國病說)>에서 관중을 존경하고 신뢰한 제 환공의 태도를 높이 사면서 군신이 한마음으로 일하고 인재를 잘 활용하고 소인(小人)을 멀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 밖에도 많은 선비가 관중과 포숙아의 진실한 우정을 찬양했다. 강희맹은 좌천된 친구를 위해 쓴 시에서 관중도 죄인이 된 적이 있었으니 지금 너와 내가 곤경에 빠져 있다고 한들 삶의 희망을 잃어선 안 된다고 지적했다.
관중의 묘는 현재 산둥성 쯔보시 린쯔구 난뉴(南牛)산 북쪽 기슭에 위치해 있다. 수많은 문인·묵객이 이곳에 머물며 조문했는데, 명나라 말기에는 조선 문신 김상헌도 찾아와 관중을 추모하는 시를 남겼다. 문신 고용후는 <과관중묘(過管仲墓)>에서 관중의 공덕이 백성에게 미쳐 세상 사람들은 소위 왕도와 패도를 구분할 필요가 없다고 칭송하며, 결국 공자도 관중을 ‘인(仁)’이라 칭할만하다고 여겼다. 문신 오숙은 관중의 무덤 옆에서 눈물을 흘리며 역사의 흥망을 슬퍼했고, 과거의 패업이 이제는 존재하지 않으니 관중처럼 뛰어난 인재도 결국 처량하게 흙에 묻혔다고 탄식했다.
그러나 관중의 이야기와 그의 지혜는 여전히 중한 양국의 역사학자들을 감탄케 하며 사람들의 마음속에 살아 있다.
글|위셴룽(喻顯龍), 상하이(上海)외국어대학 글로벌문명사연구소 전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