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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채로움이 꽃피운 찬란한 공존의 문화


2025-02-20      

둔황 막고굴 419호 석굴의 수나라 벽화와 불상 사진/VCG


막고굴(莫高窟) 불교 예술과 장경동(藏經洞) 문화재로 대표되는 둔황(敦煌) 문화는 2000여 년 동안 이어져 왔다. 세계에서 현존하는 석굴로는 규모가 가장 크고 지속 시간이 가장 길며 내용이 가장 풍부하고 보존이 가장 완벽한 예술의 보고(寶庫)다. 이는 중국 문화와 인도 문화, 그리스 문화, 페르시아 문화 등 외래문화가 융합된 찬란한 결정체이며 세계 문명이라는 긴 강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진주와도 같다. 중국 고대 각 민족의 정치, 경제, 군사, 문화, 예술 연구의 귀중한 사료다.


2000년이 넘는 긴 역사의 강에서 둔황에서는 어떤 일이 발생했을까? 다양한 민족이 이곳에서 어떻게 함께 살았을까? 해외 문화는 이곳에서 어떻게 중국 문화와 교류하고 융합됐을까? 둔황 속으로 들어가 천 년 동안 이어진 다양한 문명의 대화를 들어보자.


1989년 둔황 막고굴 북쪽 구역 제121호굴에서 출토된 원나라 화훼무늬 자수. 둔황석굴 문화재보호 연구전시센터에서 촬영했다. 사진/텅옌옌(滕言妍)


가람(伽藍)의 건립, 찬란한 장관

둔황 석굴은 오늘날의 간쑤(甘肅)성 둔황(敦煌)시, 안시(安西)현, 쑤베이(肅北) 몽골족자치현, 위먼(玉門)시 역내에 위치하며 둔황 막고굴, 서천불동(西千佛洞), 안시 유림굴(榆林窟), 동천불동(東千佛洞), 수협구 하동자 석굴(水峽口下洞子石窟), 쑤베이 5개 묘 석굴(廟石窟), 1개 묘 석굴, 위먼 창마 석굴(昌馬石窟)의 통칭이다. 막고굴은 이 중 규모가 가장 크고 보존이 가장 잘 된 석굴군이다.


서기 366년, 둔황을 방문한 승려 악준(樂僔)은 밍사산(鳴沙山)에서 쏟아지는 금빛이 마치 천불이 강림하는 모습 같다고 느꼈다. 눈앞의 풍경에 감동한 악준은 이곳에 굴을 파고 참선을 하기로 결심했다. 둔황 막고굴의 서막은 이렇게 열렸다. 고승의 영향으로 밍사산에는 가람(사원)이 하나둘씩 들어섰다. 16국 시대(304~439)에서 원나라(1271~1368)까지 1000여 년 동안 11개 왕조를 거치면서, 한 세대에서 또 다음 세대로 이어가며 굴을 파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도구와 붓질 하나 하나로 정교하고 아름다운 동굴 735개와 4만 5000㎡ 규모의 벽화, 살아 숨쉬는 듯한 모습의 채색 조각상 2000여 점을 남겼다.


둔황 석굴은 세계적인 예술의 전당일 뿐 아니라 고대 문명의 박물관이다. 이곳에서 각 시대의 정치, 경제, 문화, 민족, 과학기술 등 다양하고 풍부한 사회 생활 풍경을 볼 수 있다. 생동감 넘치는 벽화와 조각상을 통해 후세 사람들은 당시 사람들이 거주했던 건축물과 입었던 복식, 사용했던 도구를 관찰할 수 있고, 당시 사람들의 생활상과 희로애락을 알 수 있다.


세계문화유산 선정 기준 6개 지침은 다음과 같다. 1)인간의 천재적 창의성으로 빚어진 걸작일 것 2)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류 가치관의 중요한 교류를 반영할 것 3)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별한 증거를 제공할 것 4)인류 역사에 있어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축물, 전체적인 건축 기술 또는 경관의 뛰어난 사례일 것 5)전통적인 인간 거주지, 토지 사용 또는 해양 개발의 뛰어난사례일 것. 특히 번복할 수 없는 변화의 영향으로 취약해졌을 때 한가지 또는 여러 문화 또는 인간과 한경의 상호 작용을 대표할 것 6)두드러진 보편적 의미를 지닌 사건이나 살아있는 전통, 사상이나 신앙, 예술 및 문학작품과 직접적이거나 가시적 연관이 있을 것 등이다.


1987년 12월, 유네스코 제11차 총회에서 막고굴이 세계문화유산의 모든 기준을 충족한다고 인정해 막고굴을 세계문화유산 목록에 등재했다. 현재까지 전 세계에서 6개 기준을 전부 충족하는 세계문화유산은 단 두 곳뿐이다. 하나는 둔황 막고굴이고 다른 하나는 이탈리아의 유명 도시 베니스다. 이는 막고굴이 문화유산으로서 세계 문명에서 독특한 의미와 보편적인 가치를 지녔다는 것을 뜻한다.


막고굴 제3굴 벽화는 원(元)나라 시대 둔황 예술의 정수로, 둔황에서 유일하게 관음보살을 주제로 한 석굴이다. 사진은 둔황 석굴 문화재보호 연구전시센터 복제굴 내부에서 촬영됐다. 사진/텅옌옌

모래와 진흙 벽면에 얇은 회반죽을 바른 프레스코 기법으로 제작된 막고굴 제3굴 벽화다. 규모는 작지만 매우 높은 예술성을 보여준다. 사진은 둔황 석굴 문화재보호 연구전시센터 복제굴 내부에서 촬영됐다. 사진/텅옌옌



‘실크로드’가 일궈 낸 동서 문명의 교류와 번영

둔황 석굴의 형성과 번영은 고대 실크로드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한(漢)나라 때 실크로드는 장안(長安)에서 서쪽으로 뻗어 하서주랑(河西走廊)을 거쳐 둔황에 이르렀고, 둔황에서 두 갈래로 나뉘었다. 하나는 북서쪽으로 옥문관(玉門關)을 통해, 다른 하나는 남서쪽으로 양관(陽關)을 통해 타클라마칸 사막의 가장자리를 따라 이동할 수 있었다. 북로는 천산(天山) 산맥 남쪽 기슭으로, 남로는 곤륜산(崑崙山) 북쪽 기슭으로 뻗어 총령(蔥嶺, 지금의 파미르고원)에 도착한다. 파미르고원에서 다시 세 갈래 길로 나뉘어 유럽, 중앙아시아, 남아시아, 북아프리카 등지로 연결됐다.


북주(北周, 557~581)시대에 건설된 막고굴 제296굴의 벽화 ‘복전경변(福田經變)’에는 번성한 실크로드 풍경이 담겨 있다. 그림에는 한 인물이 왼쪽에서 걸어와 다리를 건너고 있고, 다리 위에 있는 말 두 마리의 등에 짐이 실려 있다. 다리의 다른 한 쪽에는 낙타를 몰고 온 서역 상인이 다리에 오르려고 하고 있으며 이 낙타에도 짐이 잔뜩 실려 있다. 중국 한족과 이민족 상단이 만나는 순간이야말로 둔황이 실크로드의 요충지라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수(隋)나라(581~618) 건국 이후 변경 정책과 대외 교류에서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태도가 나타났다. 609년, 수 양제(煬帝)가 서쪽을 순회하다가 장야(張掖)에서 북방의 유목민족, 서역, 동북아 각 정권, 중앙아시아 각국 부락의 지도자와 사절단을 초청해 수나라 제품을 보여줬다. 610년, 수나라는 낙양(洛陽) 시장의 음식점에 풍성한 연회를 마련하고 관리를 파견해 주로 서역에서 온 이민족 상인들이 이곳에서 무역을 할 수 있도록 안내했다. 또, 도착하는 곳마다 상점들은 그들을 초대해 식사를 대접했다. 이를 통해 수나라는 문명과 번영을 과시함으로써 더 많은 주변 민족들과 외부 상인들이 실크로드를 거쳐 중원 깊숙이 들어와 활발한 상업 활동을 펼칠 수 있도록 했다.


수나라는 서역을 경영해 중국과 서역 간 경제 무역과 문화 교류를 촉진했고, 당(唐)나라(618~907)는 수나라의 뒤를 이어 중화 민족 내부의 교류와 융합, 중·서 문명 교류 및 상호 학습을 더욱 발전시켰다. 수·당 시기 실크로드는 한나라의 남·북 두 루트에서 나아가 남·중·북의 세 갈래 노선으로 형성됐으며 이는 서로 교차 횡단할 수 있는 교통망을 형성해 실크로드 무역은 다시 한번 절정기를 맞이했다.


중국의 비단과 도자기, 종이 등이 실크로드를 통해 서양으로 전해졌고, 서양인도 과거 중국에는 없거나 매우 드물었던 포도, 자주개자리, 튤립 등 식물과 사자, 표범, 서역의 명마와 같은 동물 그리고 금속 공예품과 유리, 모직물, 융단 및 각종 장식품 등 정교한 공예품을 가져왔다. 둔황 벽화에는 외래 물품의 이미지 자료가 많이 남아 있다. 예를 들어 수나라와 초기 당나라 시기의 둔황 채색 조각과 벽화에는 연주대조문(聯珠對鳥紋), 연주대수문(聯珠對獸紋), 능격사봉문(菱格狮鳳纹) 등 페르시아 스타일의 문양이 부처의 복식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막고굴 제217굴은 당나라 전성기 미술의 대표적 석굴이다. 동굴 천장은 거꾸로 놓은 말(斗, 도량형 용기) 모양의 화려한 장식 천장인 조정(藻井) 구조다. 서벽(西壁) 벽감의 조각상은 모두 훼손된 상태다. 불상 뒷편 광배(光背) 양측에 각각 네 명의 제자와 두 명의 보살이 그려져 있다. 벽감 바깥에는 깊은 생각에 빠져 있는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고요히 서 있는 모습이 묘사돼 있다. 화려한 복식의 정교한 표현은 감탄을 자아낸다. 사진은 둔황 석굴 문화재보호 연구전시센터 복제굴 내부에서 촬영된 모습이다. 사진/텅옌옌



종교 세계와 인간 세상

둔황 예술은 불교 사상과 불교 신앙의 매개체로써 불경 내용을 표현한 것이 많다. 둔황 예술을 알면 그 안에 있는 종교 사상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불교 교리의 신비한 장막을 걷어내면 예술 작품에 담긴 역사의 진실한 모습이 보인다.


성당(盛唐) 시기에 건설된 막고굴 제23굴에는 빗속에서 농사를 짓는 모습을 담은 벽화가 있다. 먹구름이 짙게 깔려 있고 제법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는 가운데 농부가 채찍을 들고 소를 몰며 농사를 짓고 있다. 다른 밭 한편에는 부자가 앉아서 그릇을 들고 밥을 먹고 있고, 이 모습을 농부의 아내가 따뜻한 눈길로  바라보는 한 가족의 정겨운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이 그림은 <법화경·약초유품(法華經・藥草喻品)>에서 비롯됐다. 경문에서는 크기가 다른 약초와 나무를 중생 각자의 깨달음에 비유했고, 빗방울을 이용해 부처의 평등과 자애를 나타냈다. 화가는 사람들이 익숙한 생활 모습으로 경전 구절에 담긴 뜻을 절묘하게 설명했다. 천 년 뒤 이것을 보는 사람들은 생생하게 묘사된 이 장면을 통해 불교의 심오한 교리를 깨달음과 동시에 고대 일반 농민의 생활상도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다.


23굴과 같은 시기의 33굴에는 당시 둔황 지역에서 유행한 ‘입부혼(入夫婚, 부부가 신부 집에서 혼례식을 치르고 혼인 후에도 신부 집에서 거주하는 것)’이 묘사돼 있다. 그림을 살펴보면 집 밖에 자손 번창을 상징하는 ‘백자장(百子帳)’이 설치돼 있고, 부모와 손님은 장막 안에 앉아 있으며 신부는 혼례복을 입고 서서 예를 갖추고 있고 신랑은 바닥에 엎드려 어른들에게 절을 올리고 있다. 이렇듯 남성은 절을 하고 여성은 하지 않는 모습은 전통적인 남존여비 사상과 다른 혼례식으로, 중원 문화와 유목 민족의 혼례 풍습이 현지에서 융합됐다는 것을 후세에 보여주고 있다.


둔황 지역에서 여러 민족이 섞여서 거주한 것은 막고굴의 공양인 초상화에도 나타난다. 한족 고위 관리와 귀족도 있고 타 지역에서 온 포교 승려, 사신, 상인도 있으며 심지어 평범한 장사꾼과 보부상의 모습도 발견할 수 있다. 제98굴의 <우전국왕급왕후공양상(于闐國王及王后供養像)>에서는 중원의 예절 문화가 서역에 미친 영향을 볼 수 있다. 그림 속 우전의 국왕 이성천(李聖天)이 머리에 면류관을 쓰고 몸에는 일월용수(日月龍獸, 해·달·용·짐승)가 수놓아진 곤룡포를 입는 등 한족 제왕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면 당시 서역 귀족이 중원 문화를 얼마나 높이 평가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둔황의 정교하고 아름다운 벽화를 촬영하는 관광객 사진/둥팡(董芳)



다름을 포용으로 꽃피운 중화 문명

2023년 6월 개최된 문화 전승 발전 좌담회에서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은 “중화 문명은 두드러진 포용성을 갖고 있다”라고 말했다. 둔황 문화에서 나타난 겸용병축(兼容并蓄)의 다원화 특징은 중화 문명의 포용성을 보여주는 생생한 사례다.


서위(西魏) 시대에 조성된 막고굴 제285굴의 서쪽 벽면 북측 최상단에는 월천(月天)의 이미지가 그려져 있다. 위와 아래 두 부분으로 구성돼 있는데 위쪽의 달에는 월천이 백조 네 마리가 끄는 수레에 앉아 있고, 아래쪽에는 사자 세 마리가 끄는 월차(月車)가 그려져 있다. 백조와 사자는 그리스 문화와 서아시아-중앙아시아 문화에서 여신이 타고 다니는 동물로 등장한다. 남쪽에 월천과 대응하는 위치에 화가는 태양에 일천(日天)이 그쳐져 있는데, 일륜(日輪) 안에서 마차에 앉아 있는 모습을 묘사했다. 이에 대한 일반적 의견은 마차에 탄 신령의 이미지는 힌두교의 태양신 수리야(Surya)에서 비롯됐다는 것이다. 일륜 아래는 봉조(鳳鳥) 세 마리가 끄는 일차(日車)가 있다. 봉조는 중국 전통문화에서 태양의 상징 중 하나다. 그리스, 서아시아, 중앙아시아, 인도, 중국, 실크로드 연선 각지의 다양한 문화 코드가 한 폭의 벽화에 조화롭게 어우러져 있다.


<천수천안관음보살도>는 북 시기의 비단그림 작품이다. 사진은 막고굴 장경동 전시관에 있는 복제품을 촬영한 모습이다. 사진/텅옌옌


현재 둔황 벽화나 장경동에서 발견된 문헌과 문화재로 봤을 때, 이 지역은 오랫동안 다양한 민족이 생활했고 여러 문자가 병용됐음을 알 수 있다. 장위안린(張元林) 둔황 연구원 부원장은 서한부터 둔황군이 설립됐고 당시 현지 주민들은 늘 한족을 주체로 한 다민족으로 구성돼 왔다고 말했다. 그 사이에 여러 소수민족이 정권을 잡은 적은 있지만 오랫동안 이곳에서 생존하고 번영했던 다양한 민족과 다양한 종교를 가진 사람들은 문화 차이를 이유로 서로를 해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상대의 장점을 취하고 단점을 보완하면서 조화롭게 공존했다. 전 세계에 남아 있는 여러 문화 유적 중에는 파괴된 곳이 많은데, 그 원인은 대부분 종교적 갈등과 종족 간 대립이었다. 반면 천 년 동안 조성된 막고굴은 기본적으로 심각한 인위적 파괴가 없었다. 이는 다양한 문명과 여러 신앙이 공존한 둔황이 역사의 과정에서 포용적이고 화목했고, 여러 민족의 언어와 문자, 문화 등이 마땅히 존중받았음을 나타낸다.


역사의 긴 강에서 둔황 문화는 늘 중화 문화의 근간이었고, 다른 지역과 민족의 문명 성과를 끊임없이 흡수하고 수용했다. 중국 국학의 대가 지셴린(季羨林) 선생의 말처럼 “둔황 문화의 찬란함은 바로 세계 각 민족 문화의 정수를 융합한 것이고, 중화 문명이 수천 년 동안 이어져 온 끊임없는 융화와 통섭의 모범이다.” 

글 | 황리웨이(黃麗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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