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3-25
맹자(孟子)는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의 이름난 사상가이자 교육가로 공자를 잇는 뛰어난 유학자이다. ‘공자에 버금가는 성인’이라는 뜻의 ‘아성(亞聖)’이라는 명성을 누렸고 공자와 더불어 ‘공맹(孔孟)’이라 불리기도 했다. 유학(儒學)이 쇠퇴하던 시기를 살던 맹자는 유학의 부흥이라는 중책을 짊어지고 있었고, 결국 미약해져 가던 유학의 불씨를 다시 한번 크게 일으켰다. 맹자가 훌륭한 학업적 성취를 이룰 수 있었던 데는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 ‘맹모단기지교(孟母斷機之敎)’ 등 유명한 일화를 남긴 어머니의 각별한 교육 열정과 관계가 깊다. ‘맹모삼천지교’란 맹자의 어머니가 자식에게 좋은 교육 환경을 만들어 주기 위해 세 번이나 이사를 했다는 고사에서 유래된 말로, 오늘날 자녀에게 미치는 교육 환경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부모가 자녀 교육에 대해 갖는 지대한 관심을 일컫는다.
맹모삼천지교의 출처와 유래
맹모삼천지교는 서한(西漢) 시기 유향(劉向)이 지은 <열녀전·추맹가모(列女傳·鄒孟軻母)>에 수록돼 있다. 이 이야기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맹자는 어릴 적 공동묘지 부근에 살았다. 주변 모든 사물에 호기심이 많았던 어린 맹자는 장례 행렬을 볼 때마다 친구들과 함께 목놓아 울거나 절을 하며 흡사 장례를 치르는 듯한 흉내를 냈다. 이 광경을 본 맹자의 어머니는 근심으로 가득 찼다. 한창 성격과 가치관이 형성되기 시작하는 아이가 계속 이런 환경에 있다가는 성장에 그릇된 영향을 받을 것이 분명했다. 맹자의 어머니는 자식에게 더 나은 환경을 찾아 과감히 이사를 하기로 결심했다.
그들은 번화한 장터 근처로 이사했다. 장터에는 고함과 흥정 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상업적 분위기가 짙었다. 맹자는 이런 환경에서 주변 사람들의 영향을 받아 점점 장사꾼 흉내를 내기 시작했다. 하루가 바쁘게 손님을 모으는 법, 가격을 흥정하는 법을 익혔다. 그런 맹자를 본 어머니는 또다시 눈살이 찌푸려졌다. 자식의 성장에 주변 환경이 중요하다고 굳게 믿었던 어머니는 새로운 거처를 찾아야 했다.
여러 번의 수소문 끝에 이번에는 학교 근처로 집을 옮겼다. 그곳은 아침마다 소리 높여 책을 읽는 소리가 들렸고 예의 바른 학생들이 조용히 서당을 드나들었다. 맹자도 점점 주변의 면학 분위기에 이끌려 스스로 예절과 지식을 배우기 시작했고, 행동은 절제되며 공손해지기 시작했다. 맹자의 어머니는 날로 변해가는 자식을 보고 흐뭇함을 느꼈다. 자식에게 좋은 성장 환경을 만들어 주려는 자신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맹모삼천지교의 일화는 자녀 교육에 환경이 미치는 중요성을 잘 말해준다. 이는 맹모의 교육 철학을 칭송하는 동시에 후대 사람들에게 어떤 교육 환경을 선택해야 하고 가정 교육이 자녀의 성장에 얼마나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지 일깨운다. 맹모삼천지교는 중국 문화에서 교육에 대한 관심과 주변 환경의 영향을 강조할 때마다 언급되는 고전적 일화로 자리 잡았다.
배움과 교육, 옛사람들이 추구한 인생의 경지
배움과 교육의 역사는 흔히 함께 전개돼 왔다. 인류 사회에서는 이미 4~5천 년 전부터 체계적인 교육 활동이 이뤄져 왔다. 원시 시대 때 전설 속 인물인 창힐(倉頡)의 문자 발명은 학교의 등장을 불러왔고, 이후 전국시대 사학(私學)에서 청(清)나라 말기 학당(學堂)에 이르기까지 학교 교육은 역동적인 발전의 역사 궤적을 그려왔다.
선조들은 전문 교육 기관을 설립하는 것 이상으로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전 사회적으로 스승에 대한 공경과 학문 수양을 권장하고 학문의 신성한 지위를 강조했다. 지식을 쌓는 것은 출세의 지름길이었기 때문에 하층민들은 열심히 공부하면 운명을 바꿀 수 있다는 용기를 가졌고, 여기서 수많은 감동적 일화가 탄생했다. 동한(東漢)의 손경(孫敬)은 머리털을 대들보에 묶고 허벅지를 송곳으로 찔러가며 공부했다는 ‘현랑자고(懸梁刺股)’의 고사를 남기며 훗날 동한의 이름난 정치가가 됐고, 진(晉)의 차윤(車胤)과 손강(孫康)은 빛이 부족한 환경에서도 반딧불이를 이용해 학문을 닦았다는 ‘형설지공(螢雪之功)’의 고사를 남겼다. 서한(西漢)의 광형(匡衡) 역시 벽에 구멍을 뚫고 거기서 새어 나오는 이웃집의 불빛으로 어렵사리 공부했다는 ‘착벽투광(鑿壁偷光)’의 일화를 거쳐 풍부한 학식을 갖추고 황제를 보좌하는 승상이 됐다.
이처럼 선조들에게 학문의 위상이 높았던 까닭은 옛사람들이 일찍이 배움의 중요성을 인식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사회적 경계가 분명했던 중국의 신분 체계에서 비롯된 측면도 있다. 과거에는 신분의 높고 낮음에 따라 백성들을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신분으로 구분했는데, 이 중에서 ‘사(士)’는 학자와 지식인을 의미한다. 군주는 안정된 통치를 위해 백성들의 교육에 힘썼고 조정에서 기용할 인재를 길렀다. 과거 급제하고 관직에 오른 선비는 실질적인 혜택을 받았다. 예를 들어, ‘생원(秀才, 수재)’지위를 갖고 있으면 일반 농민에게 부과되는 조세와 부역을 면제받았다. 현(縣) 관리에게 머리를 조아릴 필요도 없었고 송사에 휘말려도 고문 당하지 않았다. 향시에 급제해 거인(舉人)이 되면 각종 지방세와 부역뿐 아니라 자신 명의의 소유지에서 나는 수확물의 조세도 면제됐다.
학문을 중시하는 경향은 중화민족의 우수한 전통이다. 맹모삼천지교처럼 교육을 강조하는 각종 고사와 명언은 오늘날까지 후대에 전해 내려오고 있다. 이를테면 ‘경독전가구, 시서계세장(耕讀傳家久, 詩書繼世長)’은 농사와 독서는 가문을 잇는 기반이고 선현의 지식은 가문을 번성시키는 수단이라는 뜻으로 지금도 많은 집안에서 가정 교육의 철학이나 가훈으로 삼고 있다. ‘부귀를 전하면 삼대를 못 가지만, 선현의 지식을 전하면 오래도록 면면히 이어진다(富貴傳家, 不過三代. 詩書傳家, 繼世綿長)’라는 말에는 중국인들이 수천 년간 널리 공유하며 후손에게 전해 온 전통적인 관념이 압축돼 있다. 자신의 몸과 마음을 다스리고 높은 덕을 쌓기 위한 것이 ‘학문’이라면, ‘경독전가’는 자신의 분수를 알고 주어진 일에 성실히 임하며 종국에는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에 이르는 것을 뜻한다. 이것이야말로 중국인들이 대대로 추구해 온 원대한 이상이자 평생의 목표이다.
글|칭산(靑山)
사진 | 인공지능(AI) 생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