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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한일 3국의 구미호 전설


2024-04-10      



유라시아 북부는 여우가 서식하기에 적합해 관련 전설이 많다. 고대 중국의 <수신기(搜神記)>와 <요재지이(聊齋志異)>에서는 여우가 신선이나 요괴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서양의 <이솝우화>와 <안데르센 동화> 속 여우는 영리하고 교활한 캐릭터로, 혹은 상하이(上海) 디즈니랜드 ‘주토피아’의 여우 닉으로도 각인돼 있다. 그런데 동아시아에서는 매우 독특한 여우의 모습으로 존재하는데 바로 ‘구미호’다. ‘구미호’란 허구의 신수(神獸, 신령스러운 짐승)로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전설 속 구미호는 꼬리가 9개로 털이 새하얗고 신령스러운 힘을 가지고 있다.


중국의 구미호 전설

구미호 전설과 이미지는 중국에서 비롯됐다. <여씨춘추(呂氏春秋)>와 <오월춘추(吳越春秋)> 등 기록에 따르면, 상고시대 대우(大禹)는 치수(治水)에 신경쓰느라 혼인을 하지 못했다. 서른 살때 도산(塗山)을 지나다 우연히 하얀 구미호를 만났는데 대우는 결혼의 좋은 징조라 여기고 도산씨(塗山氏)를 부인으로 맞아 계(啟)를 낳았고 하(夏) 왕조를 열었다. 구미호는 고대 중국 원시부족의 토템으로 생식 숭배를 상징한다는 학자의 주장도 있다. <죽서기년(竹書紀年)>에는 하나라의 군주 저(杼)가 동쪽 정벌에 나섰다가 동해안에서 구미호를 얻었고 이후 전승을 거뒀다는 기록이 있다. 이 밖에 유가 경전인 <효경(孝經)>에는 구미호가 가장 덕행이 뛰어난 신수라 했다. 서한(西漢)의 학자 왕포(王褒)의 <사자강덕(四子講德)>에 따르면 주 문왕이 구미호의 권고를 듣고 동이부족을 서주에 복속시켰다고 한다.


문헌 기록 외에 허난(河南)성 뤄양(洛陽)시, 장쑤(江蘇)성 쉬저우(徐州)시 등에서 출토된 한묘(漢墓) 회화에는 2천여 년 전 구미호의 모습이 생생히 묘사돼 있다. 그중에는 신선 서왕모 옆에 앉아 있는 구미호가 있는가 하면 날개를 달고 입에 신물을 문 구미호도 있다. 이처럼 고대 중국에서 구미호는 상서로움과 아름다움을 상징해 중국인으로부터 숭배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던 교활하고 간사한 여우의 전형적 이미지와는 다르다.


고대 중국의 지리서 <산해경>에 따르면 구미호는 청구국(青丘國, 일명 청구산)에 살고 아기처럼 울며 인간을 잡아먹지만, 인간이 구미호를 먹으면 주술에 현혹되지 않는다. <산해경> 속 구미호의 이미지는 동양의 ‘미수(尾宿, 꼬리별, 혜성)’ 숭배에서 비롯됐다고 보는 학자도 있다. ‘미유구성(尾有九星)’ 즉, 꼬리에 아홉 개의 별이 있기 때문이다. 서진의 학자 곽박(郭璞)은 “태평시대에 구미호가 나타난 것은 상서로운 징조로 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당송(唐宋) 시대부터 여우신선, 여우요괴 등 선과 악을 오가는 구미호가 등장하면서 그 이미지는 다양해졌다. 당(唐)대 마을에서는 여우를 공양하며 번영과 안녕을 기원했다. 북주 무제 시대 정주(鄭州)의 지방관은 ‘구미호’를 바쳤지만 뼈대 뿐이었다. 송(宋)대에 이르면 수많은 지방에서 ‘구미호’를 진상했다는 기록을 발견할 수 있다. 이들에게 구미호는 귀하고 좋은 존재였다. 반면 당나라 시인 백거이(白居易)는 <고총호(古塚狐)>라는 시에서 상나라 주왕의 비(妃) 달기와 주나라 유왕의 비 포사를 멸문과 망국의 여우요괴에 비유했다. 북송의 문신 전황(田況)은 <유림공의(儒林公議)>에서 송 진종(眞宗) 시대 관리 진팽년(陳彭年)이 황제에게 아첨을 잘 떨어 사람들이 그를 구미호라고 불렀다고 기록했다. 명(明)대의 소설 <봉신연의(封神演義)>에서도 달기를 요염하고 사악한 요괴 구미호로 묘사해 부정적 이미지가 더욱 깊이 각인됐다.


한국의 ‘설화 속 구미호’

한국에서 구미호가 처음 문헌에 언급된 것은 고려다. 이규보는 “민간에서 무속 신앙이 성행한다”고 비판하면서, 스스로를 ‘은퇴한 구미호’라고 칭하는 무녀도 있다고 기록했다. 물론 ‘한국 여우’ 설화의 탄생은 더 거슬러 올라간다. 501년 백제 수도 웅진에서 노부인이 여우가 됐다는 전설이 있었다. 의자왕 때 흰 여우가 궁궐의 긴 책상에 앉아 있었는데, 이를 백제 멸망의 징조 가운데 하나라 여겼다. 신라의 ‘비형랑 전설’에 따르면 길달(吉达)이라는 귀신이 있었다. 어느 날 길달이 여우로 둔갑해 달아나자 비형랑이 다른 귀신을 시켜 그를 잡아 죽였다. 또 선덕여왕의 병환이 깊어지자 밀본법사가 약사경을 읊었는데, 법사의 지팡이가 침전으로 날아가 늙은 여우를 죽였고 여왕의 병이 나았다. 한국에서 여우가 부정적 이미지로만 전해 내려온 것은 아니다. 신라 원광법사가 중국으로 불경을 구하러 가던 길에 산신의 교화를 받았다. 이때 산신이 검은 여우였다고 한다. 756년 신라 대영랑이 경덕왕에게 흰 여우를 올린 것을 두고 대길(大吉)의 징조라 여겼다.


여우가 궁궐에 들어왔다는 괴이한 기록은 신라 백제때 보다 고려에 와서 많아졌다. 1287년 충렬왕이 서해도(북 황해도)에서 요괴를 만나자 신효사에서 기도를 했다고 한다. 공양왕 때는 여우가 수창궁을 드나들자 사람들은 ‘소인배들이 왕을 에워싸고 눈과 귀를 막고 있다’고 여겼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구미호가 널리 알려졌지만, 부정적 이미지가 더 많았다. 조선 전기의 관료 정이한은 백성을 함부로 대했지만 아첨에는 능했다. 영의정 황보인에게 아부해 출세하고 재물을 불리자 백성들은 그를 구미호라고 욕했다. 문신 김육은 <노호(老狐)>라는 시에서 자신이 구미호에게 홀렸으니 강력한 활을 얻어 구미호를 소탕하고 싶다고 말해 당시 시국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다. 이덕무는 구미호가 ‘천하의 악’이라면서 용감한 인재만이 구미호를 처단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흥미로운 점은 조선 중기 의서 <의림촬요(醫林撮要)>에 조상 대대로 내려온 ‘벽사단(辟邪丹, 귀신에 홀린 듯한 증세를 치료하는 처방)’에 대한 약방문이 자세하게 기록돼 있다. 이 처방으로 구미호 정령으로부터 얻은 괴질을 치료할 수 있다. <요재지이> 등 중국의 여우신선과 요괴에 관한 전설을 읽은 이규경은 <호선변증설(狐仙辨證說)>에서 “민간에서는 구미호를 교활하고 간사하다고 생각하지만, 중국의 역사 기록에 따르면 상서로운 점이 많다”고 지적했다. 1926년 덕흥서림에서는 <천변만화구미호(千變萬化九尾狐)>를 출간했다. 이로써 구미호 이미지가 한국인에게 깊숙이 파고 들었고 한국 문화에 융합됐음을 알 수 있다.


일본의 구미호 전설

일본은 예부터 여우 숭배 풍습이 있었다. 풍요와 재물의 신인 이나리노 카미는 흰 여우였다고 한다. 유명한 음양사(陰陽師, 고대 일본에서 점을 보는 관직) 아베노 세이메이의 어머니가 흰 여우였다고 한다. 그런데 일본에서 구미호는 선한 부류가 아니고 다이텐구(大天狗), 슈텐도지(酒呑童子)와 더불어 ‘3대 요괴’라고 불린다. 일본 민간에서 구미호의 전체 이름은 ‘백면금모구미호(白面金毛九尾狐)’로 중국에서 유래됐다. 구미호는 달기(妲己)로 변해 상나라에 변란을 일으키고 견당사(遣唐使, 당나라에 파견된 외교사절) 기비노 마키비의 배를 타고 일본으로 와서 여자아이가 되었다. 이후 일본 무사에게 입양돼 절세미녀로 자랐다고 한다. 일본 이름은 타마모노마에다. 타마모노마에는 천황에게 접근하려고 했지만 음양사에게 간파당해 원래의 모습으로 변해 도망가려고 했다가 음양사가 법기로 그를 추적해 죽였다. 그의 시신은 ‘살생석(殺生石)’으로 변해 지금의 도치기(栃木)현 나스(那須)고원의 분화구 근처로 떨어졌고, 이곳은 관광 명소가 됐다. 일본인은 이곳이 열악한 지리적 환경으로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것을 두고 구미호의 원한 때문으로 여겼다. 몇년 전, ‘살생석’에 균열이 생기자 일부 누리꾼은 “구미호가 다시 인간 세상에 나타날 징조”라고 말했다.


오늘날 중한일 3국의 소설과 드라마, 영화, 애니메이션, 게임 등 다양한 분야에서 구미호 캐릭터가 등장해 큰 사랑을 받고 있다. 구미호는 수천 년 동안 독특한 매력을 간직했을 뿐 아니라 현대적인 미적 정취도 보여주고 있다.


글|위셴룽(喻顯龍), 상하이(上海)외국어대학 글로벌문명사연구소 전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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