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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한국에 전해진 <도화원기> 이야기


2024-01-17      



<도화원기(桃花源記)>는 동진(東晉)시대의 저명한 문인 도연명(AD 365~427년)이 쓴 산문이다. 세속과 격리되고 소박하고 아름다운 고대 동양식 이상향을 묘사했다. 도연명의 이름은 잠(潛), 자는 원량(元亮), 별호는 오류선생(五柳先生)이다. 심양 시상(潯陽柴桑, 지금의 장시(江西)성 주장(九江)시) 사람으로 동진 시대의 걸출한 시인이자 문학가다. 팽택(彭澤) 현령으로 재임 시 상사의 괴롭힘으로 관직에서 물러나면서 “쌀 닷 말 때문에 허리를 굽히지 않겠다”는 말을 남겼다. 이후 도연명은 전원으로 돌아가 향촌 생활을 즐기며 수많은 전원시를 남겨 중국 최고의 전원시인이 됐다. <도화원기>를 포함한 <귀거래혜사(歸去來兮辭)>, <오류선생전(五柳先生傳)> 등 작품은 후세에 큰 영향을 주었고, 중국 초중고교 국어 교과서에 실렸다.


도화원기와 중국

<도화원기>는 동진시대 무릉(武陵)의 한 어부의 이야기다. 그가 강에서 물고기를 잡다가 문득 복숭아나무 숲을 발견했는데 신기하게 생각한 어부는 숲을 따라 깊이 들어갔고 작은 동굴을 발견해 배에서 내려 동굴로 들어갔다. 조금 들어가자 앞이 확 트이면서 가옥이 가지런히 늘어서있고 풍요롭고 여유 있는 농촌이 눈앞에 펼쳐졌다. 어부를 본 마을 사람들은 깜짝 놀랐지만 반갑게 그를 맞아 집으로 초대했고 마을 상황을 설명해주었다. 그들의 조상은 진(秦)나라 때 부역과 전란을 피해 가족을 데리고 이곳으로 들어와 숨었고 다시는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진나라 이후의 역사는 물론 외부 소식을 전혀 몰랐다. 어부는 마을에서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한편 그가 떠날 때 마을 사람들은 이곳에서 있었던 일을 절대 외부에 알리지 말라고 당부했다. 동굴에서 나온 어부는 배를 타고 돌아오는 길에 표식을 남겼고, 이 일을 지방 관리에게 고했다. 어부의 말을 들은 관리는 그곳을 찾아 나섰지만 이상하게도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도화원’은 아름다운 전설이 됐다.


후세 사람들은 대부분 <도화원기>는 순수한 허구라고 생각했지만 ‘무릉도원’의 존재를 믿는 사람도 있었다. 중국에서는 실재 ‘무릉도원’이라고 불리는 곳이 두 곳 있다. 후난(湖南)성 타오위안(桃源)현 타오화위안(桃花源) 관광지와 충칭(重慶)시 유양(酉陽)현 타오화위안 관광지이다. 이 두 곳 모두 중국 국가5A급 관광지로 <도화원기>에서 말한 우링산(武陵山)구에 위치한다. 우링산구는 지금의 후난, 구이저우(貴州), 충칭, 후베이(湖北) 4개 성과 직할시에 걸쳐 있다. 한국 친구들이 좋아하고 잘 아는 장자제(張家界)도 바로 이곳에 있다. 이뿐만 아니라 중국의 유명한 문학가 선충원(沈從文)의 소설 <변성(邊城)>의 공간 배경도 우링산구로, 이 역시 중국 현대문학의 ‘도화원’이었다. 이 밖에 ‘도원’은 ‘평행우주’나 ‘다른 세계’라고 하거나, 일본 애니메이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주인공이 동굴을 통과하자 요괴 세상으로 들어가는 스토리를 연상시키는 사람도 있다. 어쨌든 사람들의 마음속엔 각자의 ‘무릉도원’이 있다.


도연명과 무릉도원에 대한 고대한국인의 인식

고려시대 기록에 따르면 사대부와 문인은 모두 <도화원기>를 읽었다. 고려시대 문신 채보문은 문장에 조예가 깊었다. 진도 벽파정을 묘사한 그의 시에 ‘평택령’, ‘도원’, ‘무릉인’ 등이 나타났다. 이색은 <도원정(桃源亭)>이라는 시에서 복잡한 세상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마음을 드러냈다. 고려시대 문신 나계종은 <도원(桃源)>이라는 시에서 도연명의 기개를 찬양하면서 도연명이 ‘도원’을 통해 이상향을 표현했으나 후세가 그것을 황당하고 신기한 이야기로 전했다고 지적했다. 조선 후기의 학자 박세당도 <도원>이라는 시를 썼다. 그가 상상한 ‘도원’ 세계는 시끄러운 속세에서 벗어난, 늘 복숭아꽃과 영지버섯이 자라는 곳이다.


남송의 주희가 도연명을 매우 높이 평가했기 때문에 이학(理學)을 신봉한 조선 사람들도 도연명을 추앙했다. 조선 세종도 도연명이 관직을 버린 행동을 칭찬하면서 그의 이야기가 후세에 전해지길 바랐다. 흥미로운 점은 세종이 세조의 적장자인 이장(성종의 아버지)을 도원군이라고 봉한 것이다. 세조의 왕자 때 봉호는 수양대군으로 수양은 상(商)나라가 망하자 백이와 숙제가 은거한 곳인 수양산이고, 도원은 <도화원기>에 기록된 진나라 사람이 전란과 부역을 피해 은거한 곳이어서 수양과 도원은 은거의 의미가 있다. 이로써 세종이 봉호를 내릴 때 신경을 많이 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쩌면 세종은 세조가 야심 없이 조용하고 한가한 삶을 살기를 바랐을 수도 있다.


그러나 세조는 결국 조카 단종의 왕위를 빼앗고 단종을 유배하고 살해했다. 절개가 있던 대신은 세조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이로써 ‘사육신’과 ‘생육신’ 등 한국인에게 익숙한 역사가 탄생했다. 이지활은 관직을 버리고 산에서 은거를 선택하고 평생 다시 관직에 오르지 않아 사람들은 그를 도연명 같은 기개를 가졌다고 생각했다.


세조의 동복 형제 안평대군이 도연명의 ‘도원’ 꿈을 꾼 것은 어쩌면 무의식적으로 권력 싸움에서 벗어나 조용한 곳을 찾고자 한 것일 수도 있다. 조선의 화가 안견은 그의 꿈을 토대로 <몽유도원도>를 그렸다.


한국의 ‘도원’

고려시대 개경 근처에 도원역(桃源驛)이라는 이름의 역참이 있었다. 이 이름은 <도화원기>와 관련이 있었을 것이다. 고려 충렬왕은 도원역에서 사냥을 하고 휴식을 취했다. <고려사>에 따르면 도원역은 동서의 요충지로 지리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였다. 이후 고려는 도원도라는 행정구역을 만들어 서쪽 도원역에서 시작해 지금의 강원도 일대의 21개 역참을 관리했고, 이는 조선시대까지 이어졌다. 고려시대의 최유는 <제도원역(題桃源驛)>에서 도원역에서 사는 사람과 <도화원기>에서 진나라 때 전란을 피해 사는 사람을 연결지어, 역참에서의 송영(送迎)이 진나라 때 장성을 건설하는 것보다 쉽다고 하면서 당시 관리에게 수탈당하는 백성들의 참혹한 현실을 꼬집었다. 고려 문인 안축은 <과도원역(過桃源驛)>에서 이곳은 역사적으로 불안해 현지 주민이 절반은 줄었다며 <도화원기>에 등장하는 ‘고선촌(古仙村)’과 비교할 수 없다고 했다.


<파한집>에는 지리산에 청학동이라는 곳이 있는데 입구가 매우 좁아 들어가려면 포복을 해야 한다는 전설이 기록돼 있다. 동굴 안으로 들어가면 넓은 공간이 나오고 토지가 비옥해 농사 짓기에 적합하다. 이것은 <도화원기>와 놀랍도록 비슷하다. 그러나 그곳에는 사람은 없고 청학만 서식한다고 해서 청학동이라고 한다. 이인로는 사촌과 함께 청학동을 찾았지만 찾지 못했다.


조선 후기 유학자 김상일은 <도화원기>에서 묘사된 무릉도원은 사람들의 이상향이지만 공간이 너무 작다고 생각했다. 그는 도원을 국가로 확대해서 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국가가 도원 같은 생활을 영위할 수 있게 한다면 도원이라고 하는 복숭아숲이 필요하겠냐는 것이다. 즉 도원을 찾는 것보다 도원을 건설하는 것이 낫다는 뜻이다.

 

글|위셴룽(喻顯龍), 상하이(上海)외국어대학 글로벌문명사연구소 전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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