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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상쾌서’와 왕희지의 뛰어남


2022-11-21      


도량이 크고 재능이 출중하며 마음에 드는 사위를 뜻하는 ‘동상쾌서(東床快婿)’는 좋은 사위를 칭찬하는 말이다. 남조(南朝)의 유의경(劉義慶)이 쓴 <세설신어(世說新語)> ‘아량(雅量)’에서 나온 말이다. 동진(東晉) 시대부터 지금까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가장 유명한 서예가 중 하나인 왕희지(王羲之)의 이야기다. 이 책에는 흥미로운 인물들의 이야기뿐 아니라 당시 유행했던 사회 풍조인 고상한 생활방식과 자유로운 생활태도를 담고 있다.


사위감으로 낙점된 ‘동상(東床)의 청년’

왕희지는 동진의 승상 왕도(王導)의 조카로 우군(右軍) 장군을 지내 ‘왕우군’이라고 불렸다. 그는 어릴 때부터 서예를 열심히 연습했으며 아버지가 소중하게 숨겨둔 <필설(筆說)>을 읽고 서예 기법을 깨달았다. 동진의 태부 치감(郗鑒)은 곧은 절개와 학문으로 유명했다. 그에게는 재색을 겸비한 여식이 한 명 있었다. 치감은 딸을 애지중지해 마음에 차는 낭군을 직접 찾아주기로 마음먹었다. 진나라 명제 태녕 원년(323) 8월, 명제는 치감에게 조정으로 돌아오라고 명했고 이에 치감은 건강(建康, 현 난징(南京))으로 돌아갔다. 승상 왕도와 각별한 사이였던 치감은 왕도의 집안에 재능과 용모를 겸비한 공자가 많다는 소문을 들었다. 치감은 자신이 직접 사위를 고르고 싶다는 내용의 서신을 제자에게 들려 왕도의 집으로 보냈다. 치감의 친필 서신을 본 왕도는 “우리 집안에 사내아이가 많으니 골라보게. 마음에 차는 이가 있으면 누구라도 허락하지” 하며 흔쾌히 승낙했다.


왕도의 자제들은 치감이 사윗감을 고르려고 사람을 보냈다는 말을 듣고 한껏 단장하고 나왔다. 그들 모두 재능이 있고 속되지 않았다. 그러나 청년들을 살피다 보니 한 명이 부족했다. 왕도의 집사가 치감의 제자를 데리고 마당을 지나 서재로 안내했다. 그곳에는 한 청년이 동쪽 벽에 기대 누워있었다.  그는 치감이 사윗감을 고르려고 왔다는 말에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제자는 치감에게 “왕 승상 댁 공자 20여 명은 치감이 사윗감을 고르려고 왔다는 말에 한껏 단장을 하고 앞다퉈 나왔는데 동상에 있던 공자만 한가롭게 누워있었다”고 전했다. 이 말에 치감은 그 공자를 보러 직접 왕도의 집으로 찾아갔다. 그 공자는 도량이 넓고 행동이 우아하며 재능과 외모를 모두 갖춘 자였다. 치감은 그 자리에서 그를 사윗감으로 낙점했다. 치감의 사윗감으로 선택된 사람이 바로 후세에 이름을 떨친 서예가 왕희지다.


왕희지와 위진 시대의 고상한 멋

왕희지의 문학과 예술적 재능은 위진(魏晉) 시대의 최고 수준을 대표한다. 왕희지는 <난정집서(蘭亭集序)>에서 인생에 대한 견해를 표현했다. 인생은 짧고 좋은 시절은 오래가지 않는다는 것을 아쉬워하면서 기쁨 속에 담긴 슬픔을 노래했다. ‘인간의 수명은 자연의 섭리에 따르고 결국 죽음으로 끝난다(修短隨化, 終期於盡)’고 하면서 삶과 죽음은 인간에게 큰일이라는 뜻의 공자의 ‘사생역대의(死生亦大矣)’라는 말로 끝을 맺었다. 또한 자신의 느낌을 말하는 것으로 시작해 노자와 장자의 ‘일생사(一生死)’, ‘제팽상(齊彭殤)’ 논조는 ‘터무니없고’ ‘제멋대로’라고 비판했다. 동진 시대의 문인 사대부는 노자와 장자를 숭상하며 공리공담을 즐겼다. 대담하게 노장사상을 부정한 것은 쉽지 않아 더 귀하다.

왕희지가 서예에서 거둔 성과는 문학을 훨씬 뛰어넘는다. 왕희지는 어렸을 때부터 서예를 좋아해 아버지 왕광(王曠)과 숙부 왕이(王廙)에게 기초를 배웠다. 이후 위(衛)부인에게도 배웠다. 종요(锺繇)에게 사사한 위부인은 왕희지에게 종요의 서법과 위씨 가문에서 대대로 내려온 서법 그리고 자신의 서법을 전수했다. 왕희지는 여러 스승을 모시며 다양한 서법을 익히고 그것을 융합해 자신만의 독특한 스타일로 만들었다. 왕희지의 서예는 ‘노장 철학을 바탕으로 담백함과 심오함을 표현하면서 유가의 중용이 바탕이 된 온화함’도 표현했다. 그는 위진 시대의 심오하고 담백한 스타일을 공리공담에서 서예로 확장시켰고 다양한 사상을 융합해 과거의 인물들을 뛰어넘었다.


왕희지 이야기의 교훈

역사상 왕희지에 관한 이야기는 많다. 예를 들면 난정에 모인 이야기, 병을 핑계로 관직을 버린 이야기 등이다. 하지만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동상쾌서’ 외에 ‘입목삼분(入木三分)’이 있다. 전자는 담담하고 태연한 삶의 태도를, 후자는 적극적이고 열심히 노력하는 태도를 보여준다. 이 역시 요즘 사람들이 본받을 만한 현실적인 의의가 있다.


첫째, 열심히 노력하고 진지하게 탐구하는 정신이다. 전해지는 이야기로 왕희지는 어릴 때 붓을 씻은 연못 물이 검게 변할 정도로 혹독하게 서예를 연습했다고 한다. 또한 황제가 제사를 지내기 위해 왕희지에게 제문을 쓰라고 하고 목공에게 그 글자를 새기도록 했다. 목공이 왕희지의 글씨를 따라 새기면서 보니 필력이 어찌나 넘치는지 먹물의 흔적이 나무 속에 세 푼이나 스며들어 있었다고 한다. 목공은 왕희지의 강한 필력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왕희지의 서예는 최고봉에 달했을 뿐 아니라 필력이 나무 속에 세 푼이나 스며들 정도로 강했던 것이다. 바로 이런 지속적인 노력과 훈련이 있었기 때문에 최고 수준에 도달할 수 있었다. 이런 정신은 본받을 만하다.


둘째, 창조에 능하고 옛것에서 새로운 것을 찾아 발전시켰다. 왕희지는 이상이 높고 포부가 컸으며 창작력이 강했다. 그는 종요와 위부인에게 배웠고 동시에 전대의 비첩에서 각종 필법을 공부해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심윤묵(沈尹默)은 <이왕법서관규(二王法书管窥)>에서 “왕희지는 자신의 마음과 손으로 옛사람의 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지만 옛것에 연연하지 않고 현재에서 등을 돌리지도 않았다. 그는 평생 진한(秦漢) 시대의 전자(篆字)와 예자(隸字)의 다양한 필법을 연구했고 그것을 진서, 행서, 초서에 녹여 그 시대 최고의 서체를 만들었다. 옛것에서 새로운 점을 찾아 후세에 새로운 경지를 열어주었다”고 평가했다. 장점을 널리 받아들이고 옛것에서 새로운 것을 찾은 것이 왕희지가 추앙 받는 이유다.


셋째, 담백한 처세다. 명리에 연연하지 않는데 오히려 그것을 얻는다. ‘동상쾌서’ 속 왕희지는 좋은 기회 앞에서도 담담한 태도로 연연하지 않았고 가장 자연스러운 상태에서 인정을 받았다. 치감도 명리를 좆는 사람이 아니었고, 사람을 볼 줄 아는 혜안이 있었으며, 재능과 외모를 겸비한 공자들 가운데 침착하고 초연하며 자유롭지만 뛰어난 재능을 가진 자를 알아봤다. 이는 또한 두 사람이 서로를 잘 안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한다.


위진 문학과 서예의 걸출한 인물인 왕희지의 인생은 솔직하게 삶을 대하는 태도, 노력과 혁신의 특성을 보여준다. 그의 인격적 매력과 처세 태도는 솔직하고 자유로우며, 고상하면서 호방한 위진의 스타일을 보여준다. 동시에 그것을 뛰어넘어 후세의 모범이 됐고 오늘날의 삶에도 귀감이 된다.


글| 우한(吳晗), 상하이(上海) 사회과학원 문학연구소 전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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