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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화국 역사에 아로새길 이름 ‘공훈 인물’


2019-10-24      

 9월29일 시진핑 등 중국 공산당과 국가지도자들이 국가훈장과 국가 명예칭호 수여자들과 사진을 찍고 있다. 사진/XINHUA

중화인민공화국 국가훈장 및 국가 영예 칭호 수여식이 9월 29일 인민대회당에서 성대하게 개최됐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은 국가 훈장 및 국가 영예 칭호를 얻은 수상자들에게 각각 ‘공화국 훈장’과 ‘우의 훈장’, 국가 영예 칭호상장을 수여한 뒤 중요 연설을 했다. 

신중국 건립 70주년을 맞이해 중국은 처음으로 국가훈장을 수여했다. 이는 수상자들에 대한 최고의 경의 표시였다. 다사다난했던 70년, 중국의 발전은 각 분야, 각 업계에서 분투하며 공로를 세운 모범 인물들이 이룬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은 민족 부흥의 산증인이자 참여자였다. 굳은 애국심을 가지고 나라에 충성을 바친 그들은 개인의 꿈과 국가의 명운을 하나로 바라보며 감동의 스토리를 완성했다. 

70년간 손을 맞잡고 함께 걸어왔던 사람들. 중국의 발전은 해외 친구들의 적극적인 도움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 그들은 우정을 이어왔고 중국과 마음으로 연결되어 있다. 국제주의 입장에서 중국 인민과 함께 신중국의 성장을 지켜보았고, 심금을 울리는 아름다운 이야기를 써내려 왔다. 

중국의 현대화 건설과 중국 국내외 교류협력 촉진, 세계 평화 수호 등을 위해 걸출한 기여를 한 해외 인사들을 표창하기 위해 중국 정부는 사상 처음으로 6명의 외국인에게 ‘우의 훈장’을 수여했다. 신중국 건설에 참여했거나 신중국의 발전 과정을 지켜보았거나, 혹은 세계에 중국을 소개한 이들로, 신중국의 가장 소중한 친구인 이들의 이야기는 역사에 기록될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다.

9월29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우의 훈장’ 수여자인 라파랭 전 프랑스 국무총리와 악수를 하고 있다. 사진/XINHUA

라울 카스트로는 중국과 쿠바 관계 정상화에 기틀을 마련했다. 쿠바는 남미 국가 중 가장 먼저 신중국과 수교를 맺었다. 중-쿠바 수교에 앞장선 인물이다. 그는 오랜 시간 중국과 쿠바, 중국과 남미 간의 우호관계 심화에 큰 기여를 했다.

마하 차크리 시린톤 공주는 중국과 태국이 우호 관계를 수립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중국 방방곡곡을 직접 돌아다니며 중국과 태국의 전통적인 우호협력과 양국 관계 발전에 지대한 공을 세웠다. 

살림 아흐메드 살림은 신중국이 유엔(UN)에서 합법적인 지위를 회복하고, 중국이 탄자니아·아프리카와 우호 협력 관계를 공고히 하는데 남다른 기여를 한 인물이다. 훈장은 살림의 딸 마리암 살림이 대리 수상했다. 

갈리나 베니아미노브나 쿨리코바는 러시아와 중국의 우정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60년을 한결같이 양국 간 민간교류 촉진과 양국 인민 간 우의 증진을 위해 노력했다. 

장 피에르 라파랭은 국제 사회가 객관적이고 전면적으로 중국을 인지하는데 기여했다. 또한, 중국이 프랑스·유럽과 우호적인 교류를 하고 협력하는 데도 지대한 공을 세웠다. 

이자벨 크룩은 신중국 영어 교육의 개척자다. 중국의 많은 외국어 인재 양성과 중국 교육사업 및 대외교류, 중국과 캐나다 간 민간 우호 교류에 힘 썼다. 

“중국 인민은 세계 각국 인민과 함께 인류 운명공동체를 건설하고 우리가 사는 별을 더욱 아름답게 만들어나가길 바란다.” 시진핑 주석이 훈장 수여식에서 말한 바와 같이 신중국 70년의 눈부신 역사는 각 분야에서 매진해온 수천만 중화의 아들 딸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더불어 해외 인사들의 아낌 없는 도움 역시 없어서는 안 될 부분이었다. 그들의 위대한 업적과 그들의 두터운 우정은 신중국 역사에 영원히 기록될 것이다. 
 
‘공화국 훈장’
위민(于敏), 자지란(申紀蘭), 쑨자둥(孫家棟), 리옌녠(李延年), 장푸칭(張富清), 위안룽핑(袁隆平), 황쉬화(黃旭華), 투유유(屠呦呦) 

‘우의 훈장’
라울 카스트로(쿠바), 마하 차크리 시린톤(여, 태국), 살림 아흐메드 살림(탄자니아), 갈리나 베니아미노브나 쿨리코바(여, 러시아), 장 피에르 라파랭(프랑스), 이자벨 크룩(여, 캐나다)

‘국가 영예 칭호’
인민 과학자: 예페이젠(葉培建), 우원쥔(吳文俊), 난런둥(南仁東), 구팡저우(顧方舟), 청카이자(程開甲)
인민 교육자: 위이(于漪), 웨이싱화(衛興華), 가오밍쉬안(高銘暄)
인민 영웅: 아이러티 마무티(웨이우얼(維吾爾)족), 선량량(申亮亮), 마이셴더(麥賢得), 장차오(張超) 
인민 모범: 왕원자오(王文教), 왕유더(王有德, 후이(回)족), 왕치민(王啓民), 왕지차이(王繼才), 부루마한 마오러둬(布茹瑪汗·毛勒朵, 여, 커얼커쯔(柯爾克孜)족),  주옌푸(朱彥夫), 리바오궈(李保國), 두구이마(都貴瑪, 여, 멍구(蒙古)족),  가오더룽(두룽(獨龍)족)
민족단결 걸출 기여자: 러디(熱地, 짱족(藏族·티베트족))
‘일국양제(一國兩制)’ 걸출 기여자: 둥젠화(董建華)
외교업무 걸출 기여자: 리다오위(李道豫)
문물보호 걸출 기여자: 판진스(樊錦詩) 



핵물리학자 위민(于敏)
“사람의 이름은 언젠가 사라지지만 미미한 힘을 조국 강성에 보탤 수 있다면 충분히 위로가 된다.”
위민, 중국의 핵물리학자, 중국과학원 원사
1926년 톈진(天津)의 말단직원 가정에서 태어난 위민은 1949년 베이징(北京)대학교 물리학과를 1등으로 졸업해 신중국 성립 이후 제1진의 대학 졸업생이 됐다.

1951년 대학원을 졸업한 위민은 저명한 물리학자인 첸싼창(錢三强)에게 선발돼 중국과학원 근대 물리연구소에 들어갔다. 그와 동료들은 원자핵 상관구조 모형을 제시해 중국의 원자핵이론 분야의 공백을 메웠다. 원자핵이론 연구의 정상에 서 있었던 1961년 위민은 수소폭탄 이론 연구를 시작했다.

핵무기이론 연구와 설계를 오랫동안 이끌고 참여한 위민은 수소폭탄 분야에서 탁월한 기여를 했다. ‘양탄일성(兩彈一星, 원자폭탄과 수소폭탄, 인공위성)’ 공훈상, 국가최고과학기술상을 수상했고 ‘전국노동모범’ ‘개혁선봉’ 등 칭호를 받았다.



인민대표 선지란(申紀蘭)
“나는 농민 대표다. 그들 안에서 생활해야 그들의 고통과 요구를 이해하고 그들을 대신해 발언할 수 있다.”
선지란, 산시(山西)성 핑순(平順)현 시거우(西溝)촌 당 총지부 부서기, 제1기-제 13기 전국인민대표대회 대표
1929년 산시성 창즈(長治)시 핑순현에서 태어난 선지란은 17세 때 같은 현 시거우촌으로 시집갔다. 1951년 시거우촌에 기초 농업생산합작사가 설립됐고 근면 성실한 선지란이 부사장을 맡아 여성들과 함께 노동에 참여했다. 1953년 선지란은 제1회 전국노동모범으로 선발됐다. 1954년 25세의 선지란은 제1기 전국인민대표대회 대표로 선발됐고 이후 13기까지 연임해 인민대표대회 제도의 탄생과 성장을 지켜봤다.

선지란은 신중국 여성의 노동 권리를 적극 수호했고 ‘남녀 동일노동 동일임금’을 헌법에 넣도록 주장하고 추진했다. 개혁개방 이후 그녀는 개혁에 참여하고 대범하게 혁신해 농업과 농촌의 집체경제 발전과 혁명기지의 경제 건설, 혁명기지 인민의 빈곤 탈출에 크게 기여했다. 



우주항공 선구자 쑨자둥(孫家棟)
“우주는 내 취미다. 평생해도 힘들지 않다.”
쑨자둥, 중국과학원 원사, 달 탐사 1기 공정 총설계사 역임, 중국 인공위성 기술 및 심우주 탐사기술 선구자 중 한 명
1929년 중국 랴오닝(遼寧)성에서 태어난 쑨자둥은 중국 우주개발 역사에 수많은 최초를 남겼다. 중국 최초의 미사일, 중국 최초의 인공위성, 최초의 과학 실험위성, 최초의 귀환식 측지위성에서 그는 기술 책임자, 총설계사였다. 중국 최초의 통신위성, 정지궤도 기상위성, 자원탐사위성, 베이더우(北鬥) 1호 공정, 중국 달 탐사 1기 공정에서 그는 공정 총설계사였다.

쑨자둥은 중국의 위성 기본기술, 위성 귀환기술, 지구 정지궤도 위성 발사, 지점 선정 기술, 항법위성 네트워킹 기술, 심우주 탐사 기본기술에 큰 기여를 했다. ‘양탄일성’ 공훈 휘장, 국가최고과학기술상, 국가과학기술진보상 특별상을 수상했고 ‘전국우수공산당원’ ‘개혁선봉’ 등의 칭호를 받았다.



전쟁영웅 리옌녠(李延年)
리옌녠, 전54251부대 부 정치위원, 전쟁 영웅
1928년 11월 허베이(河北)성 창리(昌黎)현의 가난한 농민 가정에서 태어난 리옌녠은 1945년 10월 동북 지헤이(吉黑)종대에 입대해 해방전쟁, 샹시(湘西) 토벌, 항미원조(抗美援朝)전쟁, 베트남 반격전 등 전투에 20차례 참여해 신중국 성립과 수호에 중요한 기여를 한 전쟁 영웅이다.

리옌녠은 퇴역 후에도 초심과 투지를 잃지 않고 본래의 면모를 지키며 혁명의 우수한 전통을 적극 함양하면서 혁명 군인과 전쟁 영웅의 빛나는 이미지를 보여주었다. 리옌녠은 또한 차세대 성장을 위한 교육 활동에 관심을 갖고 그동안 받은 다양한 휘장을 중국 인민혁명군사박물관에 전부 기증했다. 리옌녠은 특등공을 세워 지원군 본부에서 ‘1급 영웅’ 칭호를 받았고 해방 휘장과 승리 공훈 영예상을 받았다.



전쟁영웅, 장푸칭(張富淸)
“나와 함께 전장을 누볐던 전사들은 자기의 소중한 생명을 바쳤다. 희생한 전우도 있는데 내가 무슨 자격으로 자랑하겠는가?”
장푸칭, 전쟁 영웅, 중국 건설은행 후베이(湖北)성 라이펑(來鳳)현 지점 전 부행장
1924년 산시(陝西)성 양(洋)현의 빈곤 가정에서 태어난 장푸칭은 1948년 3월 입대해 해방전쟁의 총알이 비 오듯 쏟아지는 전투에서 선봉에 서서 죽음을 무릅쓰고 싸워 여러 차례 전공을 세웠다.

1954년 장푸칭은 군위원회 항공속성중학을 졸업했다. 전쟁 영웅이자 중앙군사위원회 고급간부학교가 배출한 학생이었던 장푸칭은 전역 후 선택의 기회가 많았다.

1955년 전역한 장푸칭은 후베이에서 가장 외진 라이펑현 근무를 자청해 빈곤 산간지역에 평생을 바쳤다. 60년 동안 그는 명예와 지위를 멀리하고 열심히 일해 자녀들도 그의 혁혁한 공을 잘 알지 못했다. 특등공 한 차례, 일등공 세 차례, 이등공 한 차례 ‘전쟁 영웅’ 칭호 두 차례를 받았다.



하이브리드 쌀의 아버지, 위안룽핑(袁隆平)
“전 세계에 1억6000만 헥타르의 논이 있다. 그중 절반에 하이브리드 쌀을 심으면 1헥타르에서 2톤이 증산되고 매년 증산된 식량으로 5억 인구를 더 먹일 수 있다.”
위안룽핑, 중국 국가 하이브리드 쌀 공정기술연구센터, 후난(湖南) 하이브리드 쌀 연구센터 전 주임, 중국공정원 원사
1930년 베이징에서 태어난 위안룽핑은 어렸을 때 부모님을 따라 도처를 떠돌았다. 1953년 시난농학원(西南農學院) 유전자육종과를 졸업하고 후난 안장농교(湖南安江農校)로 부임해 일했다.

1960년 벼 재배 시험을 시작한 위안룽핑은 식량 증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반세기 넘게 분투했다. 1973년 인디카 하이브리드 쌀 삼계 교잡에 성공했다.

1996년 위안룽핑이 이끄는 과학연구팀은 형태 개량과 잡종 강세를 통해 결합한 기술을 이용해 벼의 초고생산 육종의 난제를 해결해 생산량을 높여갔다.

위안룽핑은 평생 하이브리드 쌀 기술 연구와 응용, 보급에 힘써 중국의 식량 안보, 농업과학 발전, 세계 식량 공급에 크게 기여했다. 



중국 핵잠수함의 아버지, 황쉬화(黃旭華)
“인생은 ‘치(癡)’와 ‘락(樂)’ 두 글자로 요약할 수 있다. 치는 핵잠수함에 푹 빠진 것으로 핵잠수함에 헌신한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락은 어려운 과학연구 환경에서도 그것을 즐기면서 고생 속에 즐거움이 있고 고생 속에서 즐거움을 추구한다. 락은 인생의 메인 테마다.”
황쉬화, 중국 선박중공업그룹 719소 전 소장, 중국 1세대 공격형 핵잠수함 및 전략 미사일 핵잠수함 총설계사, 중국공정원 원사
1926년 광둥(廣東)성 산웨이(汕尾)시 훙하이만(紅海灣)구 톈탸오(田調)진의 시골 의사 집안에서 태어난 황쉬화는 1949년 상하이교통대학교 선박과를 졸업했다.

1958년부터 핵잠수함 연구에 참여한 그는 핵잠수함 연구 제작을 위해 인적이 드문 작은 섬으로 이사하고 이름을 숨긴 채 30년을 살았다. 황쉬화는 갖가지 기술 난제를 극복해 외국의 ‘삼보주(三步走)’를 ‘일보주(一步走)’로 단축했다. 황쉬화는 중국 핵잠수함 사업에 평생을 바쳤고 핵잠수함 연구 제작과 비약적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노벨의학상 수상, 투유유(屠呦呦)
“한 사람에게 감사하고 싶다. 정확하게 말하면 사람들로 수백 만의 아프리카인이다. 그들이 중국의 중의학과 개똥쑥을 신뢰했기 때문에 생명을 구할 수 있었고 개똥쑥의 신기함을 증명할 수 있었다.”
투유유, 노벨상 생리의학상 수상, 중국중의과학원 개똥쑥연구센터 주임
1930년 저장(浙江)성 닝보(寧波)시에서 태어난 투유유는 1951년 베이징대학교 약학과에 입학해 생약을 전공했다. 1969년 1월부터 투유유는 연구팀을 이끌면서 역대 의서와 본초, 민간 처방 등을 체계적으로 수집 및 정리했고, 수집한 2000여 처방을 기반으로 640종의 약물을 중심으로 <항학단험방집(抗瘧單驗方集)>을 집필했다. 그중 200여 종의 중의약을 실험 연구해 380여 차례 실패를 거쳐 1972년 무색 결정체 추출에 성공해 아르테미시닌이라고 명명했다. 

투유유가 연구 개발한 아르테미시닌류의 약물을 기반으로 한 병용요법(ACT)은 세계보건기구(WHO)가 추천하는 최적의 말라리아 치료법이다. 전 세계, 특히 개도국의 수백만 생명을 구했고, 거대한 경제·사회 효과를 창출해 중의약 과학기술 혁신과 인류 건강사업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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