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첸쉐썬(錢學森), 중국 항공우주사업의 창시자


2022-05-09      글|돤페이핑(段非平)


첸쉐썬이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모습 사진/XINHUA 

 

중국 항공우주사업의 창시자인 첸쉐썬(錢學森)은 ‘중국 항공우주의 아버지’, ‘중국 미사일의 아버지’, ‘중국 자동 제어의 아버지’, ‘로켓 왕’ 등으로 불린다. 이 영광스러운 칭호들은 그가 중국 항공우주사업에 얼마나 많은 기여를 했는지 보여준다.


1935년 첸쉐썬은 미국 유학 길에 오른다. 10여 의 피나는 노력 끝에 그는 엔지니어링 사이버네틱스론(Engineering cybernetics)의 창시자이자 세계적인 로켓 전문가가 된다. 그의 스승인 ‘항공우주의 대부’라 불리는 유체역학의 대가 테오도르 폰 카르만(Theodore von Karman)은 첸쉐썬이 학술 면에서 이미 자신을 뛰어넘었다고 공개적으로 말한 바 있다.


1949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자 첸쉐썬은 당장 귀국해 조국 건설에 참여하고자 한다. 그러나 미국 당국이 그의 귀국을 막고 불법 구류해 장장 5년에 걸쳐 연금했다.

일련의 좌절은 오히려 첸쉐썬의 조국 건설에 대한 신념을 굳게 만들었다. 그는 다양한 잡지를 통해 신 중국의 발전 상황을 접하고 머릿속에 중국 항공우주사업에 대한 청사진을 그렸다.


중국 정부의 노력으로 1955년 10월, 첸쉐썬은 마침내 조국의 품으로 돌아온다. 귀국 후 첸쉐썬은 중국 항공우주사업 건설이라는 중책을 맡았다. 그가 이끄는 중국은 단거리 미사일, 단거리 및 중거리 미사일, 첫 번째 인공위성을 연구 제작해 중국 항공우주사업의 문을 열었다.


중국 항공우주사업에서 첸쉐썬은 위대한 선구자다. 20세기 70년대의 ‘둥팡훙(東方紅) 1호’ 위성, 광활한 우주를 향한 유인우주선과 행성 탐사 등에는 모두 그의 위대한 기여가 있었다.


첸쉐썬은 또한 중국 우주항공에 필요한 인재를 양성한 사람이다. 20세기 50년대말, 60년대초, 계산자는 역학과 학생들에게 꼭 필요한 도구였지만 가격이 비교적 비싸 구입하지 못하는 학생이 많았다. 첸쉐썬은 자신이 받은 1만여 위안의 상금으로 계산자를 구입해 모든 학생에게 나눠주었다.


중국 유인우주 프로젝트의 창시자 중 한 명인 왕융즈(王永志)는 당시를 회고하면서 첸쉐썬 선생이 젊은이가 주요 연구 프로젝트를 맡아야 한다고 건의해 자신은 40여 살에 총설계자가 되었다고 말했다.


1999년 11월 20일, 중국의 첫 유인우주선 ‘선저우(神舟) 1호’가 발사에 성공했다. 얼마 뒤, 왕융즈는 첸쉐썬의 집을 방문해 특별한 선물을 전했다. “그때가 첸 선생님의 88세 생신이었다. 나는 선생님이 유인우주비행 상황에 가장 관심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선저우 1호’ 모형을 선물로 드렸다.” 이 모형 우주선은 첸쉐썬이 가장 좋아하는 선물이 되었고 서가에서 가장 좋은 자리에 놓였다.


첸쉐썬의 지도로 중국의 전(前) 세대 항공우주 종사자들은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고 피와 땀으로 중국 항공우주산업의 굳건한 기반을 다져 중국 항공우주사업이 새하얀 백지에서 세계 선두반열에 오르게 하는 기적을 창조했다.

글|돤페이핑(段非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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