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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미국인이 본 중국 경제의 기적


2019-09-20      글|저우신(周昕)

2001년, 로렌스 브람(왼쪽)이 인민대회당에서 주룽지 전 총리와 경제 문제를 논의하며 자신의 저서 <중국인의 세기(中國人的世紀)>를 들어 보이고 있다. 주 전 총리는 이 책의 머리말을 썼다.  사진/국무원 신문판공실 제공

올해는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70주년이 되는 해이다. 지난 70년 간 중국에 일어난 변화는 수억 명에 달하는 사람들의 운명을 통째로 바꿔 놓았다.

중국은 지난 70년 간 사회주의 개조 사업을 시작으로 고도로 집중화된 계획 경제에서 사회주의 시장 경제체제로 거듭났다. 아울러 이 같은 성공 사례를 통해 세계 여러 나라에 실행 가능한 새로운 성장 모델이 있다는 점을 몸소 입증하고 있다.

1949년 당시 408억 위안에 불과했던 중국의 국내총생산(GDP)은 1978년 3679억 위안으로 증가했고, 2018년에는 무려 90조 위안(약 1경4940조원)을 돌파했다. 중국은 현재 세계 2대 경제 대국이자 최대의 제조업 국가, 2대 상품 소비국으로 발돋움했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은 작년 12월 18일 열린 개혁개방 40주년 기념식 연설에서 “중화민족은 스스로 일어서고 스스로 부를 창출했으며, 스스로 강해지는 위대한 도약을 이뤄냈다. (…) 중국인민들은 배불리 먹지 못하던 시절을 극복하고 여유를 누리는 샤오캉(小康)사회로의 위대한 도약을 실현했다”고 말했다.

미국인 로렌스 브람(Laurence Brahm)씨는 변호사이자 정치경제학자, 환경학자이기도 하다. 그가 중국을 처음 방문했던 1981년 중국은 이제 막 개혁개방의 시동을 걸고 있었다. 중국은 당시 모든 것이 부족했다. 그는 중국의 사회와 산업 각 분야에 개혁개방의 물결이 밀어닥치며 경제적 풍요를 이뤄가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그의 책 <대개방: 미국인이 겪은 중국의 개혁개방 40년(An Incredible Journey: Reflections on Forty Years of Reform and Opening in China)>에도 이러한 내용이 잘 기술되어 있다. 얼마 전 그는 월간 <중국>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중국의 성장을 지켜보면서 느낀 소감을 밝혔다.

월간 <중국>: 중국에 오신 계기는 무엇인지, 당시 중국의 첫인상은 어떠했는지요?

로렌스 브람: 1979년 중미 수교가 이뤄지고 나서 미국의 중국어 연수단 2기로 난카이(南開)대학교에 파견되어 한 학기 동안 수학했습니다.

당시 중국은 모든 것이 부족했습니다. 길거리의 사람들은 하나같이 파란색이나 녹색 계열의 옷을 입고 있었고, 디자인도 대동소이했습니다. 먹을 것이 부족했기 때문에 채소를 먹는 것조차도 저희 같은 외국 유학생들의 ‘특권’이나 마찬가지였죠. 대부분의 중국 학생들은 밥이나 만두로 끼니를 때웠고, 식량배급표가 없으면 먹을 것을 구매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때는 중국이 개혁개방을 막 시작하던 시기였습니다. 톈진(天津)의 국영 상점의 공급량이 제한적이라 사람들이 먹을 것을 사기 위해 줄을 길게 늘어서곤 했는데, 그때 자전거를 타고 시내까지 달려와 길 모퉁이에 천 하나를 깔아놓고 채소나 땅콩을 파는 농민들이 있었죠. 그 순간 저는 중국에서 시장경제의 싹이 트고 있다는 점을 눈치챘습니다. 그로부터 1~2년 후에 베이징(北京) 시단(西單)에 한 의류 시장이 문을 열었습니다. 주변의 중국 친구들이 그 소식을 듣고 참 좋아했던 기억이 남니다. 저녁을 먹고 친구들과 함께 시단에 가서 광저우(廣州)에서 왔다는 옷들을 둘러 보았습니다. 중국의 시장 경제가 점점 발달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죠.

월간 <중국>: 중국의 개혁개방에는 어떤 방식으로 참여하셨나요?

로렌스 브람: 1980년대에는 수없이 많은 외국계 기업들의 중국시장 진출을 도왔습니다. 엑슨모빌, 로슈제약, 코닥, 바이엘, 에릭슨 등 여러 외국계 기업의 첫 중국 계약을 모두 제가 성사시켰죠. 한번은 국제무역빌딩에서 진행되는 사업에 참여한 적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다들 너무 무모하고 모험적인 사업이라고 말렸습니다. 당시 그곳이 베이징 시내에서 좀 떨어진 2환(環) 바깥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다들 왕푸징(王府井) 정도가 최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베이징이 이렇게 빠르게 발전할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죠. 제가 탄생을 도왔던 합자기업들도 대부분 국유기업의 구조조정과 개편에 따른 결과였습니다.

1990년대 중반부터는 풍부한 국유기업 커리어를 바탕으로 아시아개발은행(ADB)과 국무원 경제체제개혁사무처가 공동으로 주최하는 사업에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중국 국유기업 개혁 청사진을 구상하는 일을 맡았는데, 전(前) 안후이(安徽)성 공산당위원회 제1서기 완리(萬裏) 선생의 추천으로 안후이성에 있는 기업이 개혁시범업체로 선정됐습니다. 우리가 진행한 비료, 철강, 시멘트 등의 산업 개혁 성과는 이후 대대적으로 진행된 국유기업 개혁안의 좋은 참고 사례로 활용됐고, 1998년에는 당시 주룽지(朱镕基) 국무원 총리가 저희의 개혁안을 채택하기도 했습니다.

월간 <중국>: <대개방: 미국인이 겪은 중국의 개혁개방 40년>을 보면 중국 관료들과도 자주 접촉하셨다는 내용이 있는데요, 가장 기억에 남는 일화가 있나요?

로렌스 브람: 제게 큰 시사점을 주었기 때문에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는 일이 하나 있습니다. 언젠가 주룽지 총리께 이렇게 질문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총리님께서는 문건에 서명하거나 경제 정책과 관련한 의사결정을 내리실 때 어떤 부분을 고려하십니까?”
총리님은 이렇게 답하셨습니다. “사회심리학이라는 측면도 대단히 중요합니다. 정책이나 이론이 아무리 좋아도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전혀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가장 먼저 사람들의 반응을 고려한 후 다른 것들을 생각하기 시작하죠. 이건 이론과는 관련이 없는 것입니다.”

이는 서양과는 완전히 다른 사고방식이었습니다. 서양의 경제학자들은 항상 이론적인 측면에서만 생각하고 이론으로 반박을 합니다. 사람들의 반응 같은 것은 생각하지 않죠. 총리님의 말씀은 제게 굉장히 인상 깊게 다가왔습니다. 개혁개방의 다른 한쪽에 서서 경제를 인간적이고 실질적인 측면에서 바라본 것이니까요.

월간 <중국>: <주룽지 전기: 주룽지와 현대 중국의 변혁(朱镕基傳:朱镕基與現代中國的轉型)>이라는 책도 쓰셨는데, 주룽지 전 총리의 전기를 쓰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로렌스 브람: 1991년부터 2002년까지가 중국 경제 개혁에서 가장 중요했던 시기였고, 주룽지 전 총리는 이 시기를 주도한 핵심 인물이라고 보았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 책은 전기라기보다는 중국 경제개혁이 일어났던 중요 시기에 대한 기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0년 남짓한 기간 동안 중국은 계획경제에서 시장경제로 전환했습니다. 물론 사회주의적 특색이 가미되긴 했지만, 거의 완벽한 시장형 경제로 탈바꿈했죠. 이 ‘첫 번째 10년’은 중국 체제 전환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였습니다. 1980년대만 해도 사람들은 개혁이 무엇인지, 무엇을 어떻게 개혁해야 할지 열띤 토론을 벌였지만 뚜렷한 답을 내놓지 못했죠. 그러다 1992년 덩샤오핑(鄧小平)께서 이에 대한 답안과 방향을 제시한 이후 주룽지 전 총리가 구체적이고 단계적인 실행안을 마련했습니다. 이 시기 중국은 완전한 계획경제 체제에서 계획경제와 시장경제가 혼합된 체제로 넘어갑니다. 주룽지 전 총리는 두 체제가 서로 배타적인 것이 아니라 공존할 수 있음을 알았던 것이죠.

중국의 개혁개방이 이룩한 쾌거가 세계에 미친 영향은 대단히 크다고 봅니다. 과거 미국이 주도하던 100% 자본주의 모델을 적용한 많은 나라들이 체제 전환 과정에서 여러 가지 부작용에 시달렸습니다. 미국 등 서방 국가와 내부 사정이 판이하게 달랐기 때문이죠. 하지만 중국은 자신의 사례를 통해 세계에는 또 다른 효과적인 성장 모델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입증했습니다.
 
 

글|저우신(周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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