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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페이젠(葉培建) -우주 속에 우리의 존재가 있다


인민화보

2019-05-06      인민화보

예페이젠은 중국의 창의적인 우주탐사체를 만든 총설계자로 중국의 위성 원격탐지, 달과 심우주 탐사 등을 통해 중국 우주과학의 빠른 발전을 이끌었다. 강도 높은 업무에 대해 그는 “국가에는 더 많은 일을 하는 사람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사진/천젠( 陈建)

별이 총총한 하늘을 올려다 볼 때마다 우주인들은 습관적으로 인공위성을 찾곤 한다. 하늘에 떠있는 인공위성이 중국의 것은 아니더라도 쉼없이 돌고있는 별들을 볼 때면 벅찬 감격을 느낀다. “우리가 직접 만든 인공위성이 뭇별의 대열에 합류했다. 천체에 우리의 존재가 있는 것이다.” 다수의 우주탐사체를 개발했던 총설계자이자 중국과학원 원사(院士)인 예페이젠은 위성 원격탐지, 달 및 심우주 탐사 등 중국 우주과학의 빠른 발전을 이끈 인물이다. 그러나 우주탐사에 끊임없이 기여해온 ‘노장’의 어린 시절 꿈은 뜻밖에도 항공전문가였다. 

2010년 9월 20일 ‘창어 2호’ 위성이 시창(西昌)위성발사센터에서 로켓과 도킹하고 있다. 사진/ 중국항천과학기술그룹공사 제공
 
“비행 관련 일을 하고 싶었다”
예페이젠은 1945년 장쑤(江蘇)성 타이저우(泰州)시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 다닐 때만 해도 딱히 공부를 잘하는 편이 아니었으나 중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상위권에 들게됐다. 2년 만에 중학교 3학년 과정을 모두 마친 그는 저장성 후저우(湖州)중학교로 보내지게 된다. 후저우중학교는 당시 중국에서 가장 우수한 학교로 꼽히던 곳이었다.

어린 시절 꿈꿨던 ‘비행의 꿈’을 이루기위해 예페이젠은 1962년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베이징항공학원(현 베이징항공항천대학)을 제1지망 학교로 선택했다. 하지만 최종 입학한 곳은 저장대학 무선통신학과였고, 졸업 후 베이징위성제조공장(항천부 529공장)으로 배치됐다. 어느 것 하나 예상했던 바가 아니었다. “항공비행 관련 일을 하고싶었는데 그러지 못하고 우주 일을 하게됐다.” 예페이젠은 웃는 얼굴로 말했다.

당시 ‘운명의 장난’이 있었지만, 이에대해 예페이젠은 조금도 안타까워하지 않는다. 중국의 우주사업에 참여했던 덕에 ‘더욱 높이 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재학 시절, 신중국의 우주사업은 아직 맹아기에 있었지만 우주사업의 기초가 되는 로켓사업은 빠른 발전을 구가하던 중이었다. 1956년 신중국이 일련의 공업부처를 신설하던 가운데, 첸쉐선(錢學森), 궈융화이(郭永懷) 등 애국과학자들이 속속 귀국했고, 신중국 또한 국내 과학인재 양성에 힘쓰기 시작했다. 그렇게 우주사업 추진에 필요한 조건이 마련된 것이다.  

인류 최초의 인공위성 발사 성공 이후 6개월 여가 지난 1958년 5월 17일, 마오쩌둥(毛澤東) 주석은 중국공산당 제8기 중앙위원회 2차회의에서 “우리 역시 인공위성 사업을 해야한다”고 호소했다. 중국이 인공위성 발사임무를 발전계획에 포함시키게 된 배경이었다.

1970년 4월 24일, 중국 최초의 인공위성 ‘둥팡훙(東方紅) 1호’가 예상궤도에 정확하게 진입함으로써 중국 우주비행체의 우주 진입을 알렸다. “둥팡훙 1호의 성공적인 발사는 중국 우주사에 있어 획기적인 의미를 갖는다. 둥팡훙 1호는 중국 우주사업의 서막을 열었으며, 중국이 심 우주 탐사를 진행하는데 있어서 첫번째 이정표였다.” 당시의 성과를 떠올리는 예페이젠은 벅차 오르는 감격을 감추지 않았다. 

1월 3일 창어 4호가 달에 착륙한 순간 74세의 중국항천과학기술그룹5원(院) 심우주탐사 및 우주과학 수석 과학자이자 창어 1호 위성 총설계자인 예페이젠 원사(왼쪽 첫번째)가 앞줄 작업대에 있는 창어 4호 탐측기 프로젝트 집행총감 장허(가운데)에게 걸어갔다. 2대의 ‘창어인’이 손을 꼭 마주잡았다. 사진/ XINHUA
 
“조국을 위해 힘 보탤 수 있기를”
예페이젠이 국가우주사업에 기여하기로 결심을 하게된 것은 중국 1세대 우주인의 ‘창업’과정에서 깊은 영향을 받은 결과였다. 1980년 국비유학의 기회를 얻게된 그는 스위스 뇌샤텔대학교의 마이크로기술연구소에서 학업에 매진했다. 

유학중이던 당시 예페이젠은 스위스의 한 매체와 인터뷰를 하게되는데, 그 매체는 예페이젠의 스위스 생활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다. “그는 지금껏 술집에 간 적도 없고 영화도 별로 보지않는다. 주말 시간을 오로지 책을 읽고 일하는데 쓴다.” 이에 대해 예페이젠은 자신의 해외유학을 위해 조국이 많은 것을 할애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나는 내 어깨에 짊어진 짐이 얼마나 무거운지 잘 알고 있었다. 더욱 노력해서 훗날 국가를 위해 무언가 해야했다.”

스위스에서 공부하던 그를 보며 많은 이들은 그가 귀국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1985년 5월 박사논문 답변을 마친 그는 8월 아내와 함께 꿈에 그리던 조국으로 돌아왔다. “우리나라(중국)는 다사다난한 나라다. 국가가 강대해지기 위해서는 일을 할 사람이 필요하다. 우리 같은 사람들은 고등교육을 받았고 해외유학까지 다녀왔다. 그러니 무엇이든 반드시 해야한다.”

귀국후 예페이젠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중국항천(우주)기술그룹 5원(院) 502소에서 철도 운송을 위한 현대화설비인 ‘적외선 저널박스 과열탐지 시스템’을 개발하는 것이었다. 당시는 마침 중국이 첨단기술 개발에 열을 올리던 때였다. 실제 중국은 1986년 세계 일류 수준의 첨단기술 육성을 위한 ‘863 계획’을 제정한 데 이어 위성통신, 유인우주 등 영역에서 높은 수준의,  깊이 있는 개념연구를 추진했다.

이후 1996년, 예페이젠은 위성 ‘중국자원 2호’의 총설계 및 총지휘를 맡게 된다. ‘자원 2호’는 그 당시 중국이 보유한 위성 중 최고의 해상도, 최대 저장량, 최고 전송속도, 최장 수명을 자랑하던 위성이었다. 자원탐사, 도시계획, 농작물 생산량 예상, 우주과학실험 등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발휘했다.

“책임감을 가지고 임해야”
2003년 10월 15일 오전 9시, 중국 최초의 우주인 양리웨이(楊利偉)가 ‘선저우(神舟) 5호’에 몸을 싣고 우주항해에 나섰다. 중화민족 1000년의 우주비행 꿈이 이루어진 것이었다. 양리웨이의 우주비행은 중국 우주사업의 새로운 이정표가 되었지만, 중국 우주인들은  여기에 안주할 수 없었다. 유인우주선의 성공에 뒤이어 더욱 위대한 목표가 부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중임을 짊어진 인물은, 역시 예페이젠이었다. 

2004년 초 중국의 달 탐사공정이 정식 입안되었다. 바로 ‘창어공정(嫦娥工程)’이다. 당시 중국은 아직 달 궤도 선회 위성 개발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고있던 상황으로, 예페이젠 생각으로는 그 같은 기회를 잡을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책임감을 가지고 참여하기로 했다.

예페이젠은 ‘창어 1호’위성시스템의 총지휘자이자 총설계사가 되었지만, ‘창어 1호’ 연구개발 과정에 있어 연구팀은 무수한 어려움과 좌절을 경험해야만 했다. “과거 지구 인근을 도는 위성에는 궤도가 1개만 필요했지만 위성을 달까지 보내는 것은 완전히 다른 개념이었다. 뿐만 아니라 데이터 수신 안테나에 있어서도 차이가 컸다. 당시 달 탐사를 추진하던 나라들의 데이터 수신 안테나의 지름은 가장 작은 것이 34m였던 반면, 중국 안테나의 직경은 12m에 불과했다.” 더구나 ‘창어 1호’ 연구개발 경비도 매우 제한적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연구팀은 종합적인 판단 끝에 직경 12m의 안테나를 기반으로 새로운 방법을 시도하기로 했다. 두 개의 시스템, 즉, 지향성 안테나와 등방성 안테나를 이용해 위성이 안정적일 때는 지향성 안테나로 지상의 관측신호를 수신하도록 하고, 불안정할 때는 등방성 안테나를 통해 최소 1개의 신호라도 수신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2007년 10월 24일 ‘창어 1호’가 발사되었고, 연구팀이 고안한 방법은 성공을 거두었다. ‘창어 1호’의 달 궤도 진입 성공은 중국이 심 우주 탐사 분야에 첫 발을 내디뎠음을 의미하는 것이자 인공위성, 유인우주비행의 뒤를 이은 중국 우주사업 발전의 세번째 이정표적인 사건이었다.

‘창어 1호’프로젝트가 끝난 뒤 예페이젠은 연구팀을 두 개 팀으로 나눈 뒤 각각에게 ‘창어 2호’와 ‘창어 3호’개발을 주문했다. 이후 2010년 1월 1일 ‘창어 2호’가 성공적으로 발사되어 2012년 지상의 통제하에 지구에서 약 700만km 떨어진 소행성 토타티스에 초밀착 접근했다. 토타티스와의 거리를 3.2km까지 좁혔던 ‘창어 2호’는 소행성의 모습을 촬영했으며, 이는 인류 역사상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찍은 소행성 사진으로 기록되었다.

‘창어 2호’개발의 총책임자는 아니었지만 예페이젠은 변함없이 신호 연구개발 과정에 참여하며 핵심 기술난제들을 책임졌다. 예페이젠에게 있어 자신보다 중요한 것이 있으니 바로 책임감이다. “이런 책임감이 없다면 일을 제대로 할 수 없다. 일을 하는데 있어서는 ‘할 수 있느냐, 없느냐’만 있을 뿐 ‘그럭저럭 괜찮은 것’은 없다.” 

‘창어 3호’개발과정에서 예페이젠 팀은 200여 개의 고장 및 문제를 가정했다. “모든 상황에 대한 리스크를 분석하고, 모든 문제에 대한 대비책을 마련했다.” 예페이젠에 따르면 어떤 상황에서는 고장이 발생했어도 그 원인을 따질만한 시간이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반드시 대비책에 따라서 지체없이 필요한 조치를 취해야한다. “창어 3호가 착륙한다고 가정해보자. 전체 하강 과정은 20분이 채 걸리지 않는다. 고장이 발생한 뒤에 해결방법을 의논한다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하지만 설사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이 생기더라도 시간만 충분하다면 응급조치를 취할 수 있다. 우주선이 비행할 때는 지상의 장치들이 1대1로 작동된다. 지면의 설비를 이용해서 우주선에 발생한 문제를 시뮬레이션 해야한다.”

2013년 출정한 ‘창어 3호’가 달 표면에 성공적으로 착륙하면서 중국은 세계에서 세 번째로 달 착륙을 실현한 나라가 되었다. 중국의 우주인들은 달 궤도 선회에서 달 표면 착륙을 불과 10년이 안되는 시간 만에 완성한 것이다. 

2013년 12월 15일 저녁, 달에서 과학 탐사작업을 하던 ‘창어 3호’ 착륙기와 월면차(月面車)가 서로 사진을 찍는 실험을 했다. ‘두 기계’가 순조롭게 서로를 찍었다. 사진은 베이징 컨트롤센터 스크린에 뜬 ‘창어 3호’ 착륙기에 달린 카메라로 찍은 ‘위투(玉兔)’호 월면차다. 사진/ 친셴안(秦憲安)

“착륙한다면 달 뒷면에 착륙해야지”
‘창어 3호’가 임무를 완수한 이후 ‘창어 3호’의 ‘대체본’격이었던 ‘창어 4호’의 용도를 둘러싸고 논쟁이 불거졌다. ‘창어 4호’를 달의 정면에 착륙시킬 것인가 아니면 뒷면에 착륙시킬 것인가가 논쟁의 핵심이었다. 많은 이들이 정면에 떨어져야 다른 문제가 생기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과 달리, 예페이젠은 ‘창어 4호’가 달의 뒷면에 떨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리는 이미 정면에 가보지 않았나? 같은 곳을 한번 더 가는 것에 얼마나 큰 의의가 있겠는가? 달 뒷면 착륙에 성공하면 전세계의 관심을 모을 것이고, 성공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인류가 한 번쯤은 이해해줄 것이다.” 결국 예페이젠의 말을 듣기로 한 지도자들은 ‘창어 4호’를 달의 뒷면에 착륙시키기로 결정했다. 

2019년 1월 3일, 중국이 쏘아올린 ‘창어 4호’는 인류 역사상 최초로 달의 뒷면에 착륙한 뒤 달 뒷면에 대한 탐사를 시작했다. 전대미문의 달 뒷면 여행을 위해 ‘창어 4호’는 3가지 기술적 난제들을 극복해야 했다. 그중 첫 번째는 복잡한 지형조건에 안전하게 착륙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로, ‘창어 4호’는 먼저 착륙지점을 달 남극의 에이트켄 분지로 선택했다. ‘창어 3호’의 착륙 지점이 비교적 평평했던 것과 달리 에이트켄 분지는 기복이 상당한 지형에 충돌구가 크고 밀집되어있어 탐사체 착륙 지점 선택 및 정밀도에 있어 높은 수준을 요구했다. 두 번째는 탐사관제통신 문제였다. 달 정면에 가려져 있던 탓에 달 뒷면에는 통신신호가 없고, 때문에 지구와 실시간통신을 할 수 없었다. 따라서 ‘창어 4호’가 지상과 통신을 주고받기 위해서는 중계위성 췌차오(鵲橋, 오작교)가 필요했다. 세 번째 문제는 달 뒷면의 자체 순시기술이었다. 달 뒷면은 오랜 시간 운석의 충격을 받아왔기 때문에 달 정면의 표면보다 환경이 열악했다. 따라서 연구팀은 탐사체에 8개의 작업모드를 설치했으며, 이를 통해 다양한 작업환경에 적응하고 대응하도록 했다. 이들 모두 분명히 인류의 향후 달 탐사 및 기타 행성 탐사에 좋은 거름이 될 기술이다. 

이밖에도 ‘창어 4호’의 임무 완수를 위해 광범위한 국제협력이 추진되었으며, 이는 우주탐사 국제협력의 본보기가 되었다. “국제협력은 인류에 대한 기여이며, 우리 중국인의 마음에 어떠한 거리낌도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달 탐사를 추진중인 많은 나라들이 중국을 배척하지만 우리(중국)는 어떤 나라도 배척하지 않는다. 우리의 우주정거장과 달 탐사는 그들의 참여를 환영한다. 이번에 미국과학자도 말했다. 중계위성 ‘췌차오’의 작업시간을 5년으로 연장하기를 바라며, 자신들 역시 이를 이용하기를 바란다고 말이다. 전혀 문제가 되지않는다.” 예페이젠의 말이다. 

“후손에게 원망듣지 말아야”
예페이젠에게 있어 탐사는 하나의 시작에 지나지 않는다. 지난 2007년 ‘창어 1호’ 발사 성공 이후 예페이젠은 일부 연구인력을 화성 탐사에 배치했다. 또한, ‘창어 1호’ 연구개발 중에는 ‘예비위성’을 만들어 당시 중국 달 탐사공정의 총설계사였던 쑨자둥(孫家棟)으로부터 “예비위성을 어디에 쓸 것인가”라는 질문을 받기도 했다. 사실 연구팀은 이미 그때부터 화성 탐사를 예상하고 있었다. 그리고 2016년 4월, 중국국가항천국은 중국의 화성 탐사임무가 공식 입안되었음을 선포했다.  

예페이젠의 휴대전화 사진첩에는 달 암석 사진이 있다. 30여년 전 미국은 세계지적재산권기구 본부에서 이 사진 속 암석을 전시함으로써 자국의 과학연구 수준을 드러냈었다. 30여년 뒤 다시 제네바를 찾았던 예페이젠은 그 암석이 여전히 그 곳에 있는 것을 보고 사진을 찍었던 것이다. “와신상담이라고, 수시로 나 자신을 깨우치기 위해서였다. 나는 이 사진을 우리의 달 탐사 우주인들에게 자주 보여준다. 그리고 말한다. 이게 바로 세계의 수준이자 한 나라의 상징이라고. 30여 년 전의 성과가 아직도 최고다. 달 탐사를 하지 않는다면 300년 뒤에도 여전히 이와 같은 격차가 존재할 것이다.”

심 우주 탐사에 있어 중국은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지만 전체적 수준에 있어서는 아직도 뒤쳐져있다. 특히 국제선진수준과 여전히 큰 격차가 벌어져 있다는 것이 예페이젠의 생각이다. 심 우주 탐사 분야에서 세계강국이 되기 위해서는 아직도 해야할 일이 많지만, 그러나 머지않은 미래에 이 일들을 해내고 완수할 것이라고 예페이젠은 강조한다. “2019년, 우리는 달 샘플을 가지고 돌아와야 하며, 동시에 유인 달 탐사 논증을 해야한다. 그리고 미래에는 달의 양극을 가야한다. 머지않아 우리는 달 탐사에 있어 리더의 자리에 오를 것이다. 계획대로라면 2020년 중국은 ‘화성 1호’를 발사할 것이다. ‘화성 1호’는 선회(繞)하고 착륙(落)하며 걸어(走)야한다. 그리고 성공한다면 화성 탐사에 있어 우리는 선두로 한 걸음 더 나아갈 것이다. 이밖에도 우리는 소행성 탐사도 계획하고 있고, 건국 100주년을 기념한 목성 착륙도 생각하고 있다. 이 몇 단계를 완수해야만 중국의 심 우주 탐사가 세계선두에 섰다고 말할 수 있다.” 예페이젠의 말이다.  



글|모첸(莫倩), 후저우멍(胡周萌), 장진원(張勁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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