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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훠궈의 역사와 문화를 말하다


2024-03-19      


약 15년 전만해도 한국 친구에게 중국의 훠궈(火鍋)를 소개하고 싶어도 마땅한 한국어가 없어 일본식 말인 ‘샤브샤브’로 대신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훠궈가 한국어의 외래어로 자리잡았다. 서울에서 인터넷 지도를 열고 ‘훠궈’를 검색하면 추천 식당이 수십 개가 뜬다. 이로써 중국의 훠궈가 한국인에게 더 이상 낯선 음식이 아니고 심지어 즐겨 찾는 미식이 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는 중한 양국의 민간 왕래와 문화 교류가 깊어진 덕이다. 그러나 중국의 훠궈가 지역별로 종류가 많고 차이도 크다는 것을 잘 모르는 한국 친구들도 있다.


다양한 훠궈의 종류와 유래

넓은 의미에서 훠궈는 일종의 조리 방식으로, 열원으로 냄비를 달구고 냄비에 물이나 육수 등 액체와 다양한 식재료를 넣어서 익히는 것이다. 따라서 훠궈 자체는 세계 각지에 보편적으로 존재한다. 중국의 훠궈는 비교적 일찍 시작됐다. 서한(西漢) 해혼후묘(海昏侯墓)에서 출토된 청동 훠궈 용기는 지금부터 약 2000여 년 전 것이다. 전문가의 고증에 따르면, 이 훠궈 용기는 부장품이 아니라 무덤 주인이 생전에 사용한 것이다. 훠궈 용기와 더불어 훠궈 전용 소스 그릇인 염로(染爐)도 발견됐다. 이로써 해혼후는 요즘 중국인처럼 훠궈를 즐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시대가 변하면서 훠궈는 중국 각지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발전해 종류도 많아졌다. 그중 비교적 유명한 것은 북방의 퉁루훠궈(銅爐火鍋), 쓰촨(四川)·충칭(重慶)의 마라훠궈(麻辣火鍋), 광둥(廣東) 차오산(潮汕)의 소고기 훠궈, 윈난(雲南)의 버섯 훠궈, 하이난(海南)의 짜오포추훠궈(糟粕醋火鍋), 구이저우(貴州)의 솬탕위훠궈(酸湯魚火鍋), 광시(廣西)의 뤄쓰펀훠궈(螺螄粉火鍋) 등이 있다.


북방의 퉁루훠궈는 중국 화베이(華北), 둥베이(東北) 지역에서 유행하고 있다. 전통적인 육수는 물에 생강과 파를 조금 넣은 간단한 형태로 양고기와 소고기, 채소가 주요 재료였다. 참깨 소스, 부추꽃 절임, 발효 두부를 소스로 곁들였다. 남방의 훠궈는 소스가 많이 다르다. 쓰촨·충칭의 마라훠궈는 마늘과 참기름이 주요 재료이고, 광둥과 하이난 일대는 간장과 굴소스가 주류다. 물론 입맛에 따라 다양한 소스를 만들 수 있다. 지리적으로 중국의 북방과 가까워 한국의 훠궈도 북방 훠궈와 비슷한 형태를 띤다. 한국의 ‘신선로’도 숯으로 청동 냄비를 달구고 맑은 육수에 끓인다. 신선로는 조선시대 정희량이 발명했다고 하지만, 신선로와 중국 북방의 훠궈는 모두 유목민족의 음식문화에서 영향을 받았다는 게 학자들의 주된 견해다. 조선시대 궁궐의 신선로는 백은으로 만들어 살균과 해독 작용을 했다고 한다.


고금에 걸친 한국인의 훠궈 탐구

조선 사신들은 청나라로 가는 과정에서 청나라 궁궐이나 일반 백성 모두 훠궈를 즐긴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것은 <연행록(燕行錄)>에 기록돼 있다. 조선 사신이 청나라 궁궐에서 개최한 연회에 참석하면, 특히 겨울에는 뜨거운 훠궈를 종종 맛볼 수 있었다. <정조실록>에 따르면, 1784년 자금성(紫禁城)에서 열린 연회에 참석한 조선 정사 홍낙성, 부사 윤사국에게 건륭황제가 특별히 훠궈를 하사하고 더불어 나이차(奶茶)와 간식도 같이 하사했다. 이어서 무대에서 펼쳐지는 희극과 곡예 공연을 관람해 매우 만족스러웠다고 한다. 조선 후기의 문신 신석우는 1860년 정사 자격으로 중국을 방문했다. 그는 중국 역사, 문화 관련 시문을 많이 남겼다. 그중 <열과자련구(熱鍋煮聯句)>는 친구들과 공동 창작한 것으로 추운 겨울 밤, 친구들과 훠궈 앞에 둘러 앉아 고기와 채소를 익혀 먹는 따뜻한 장면을 묘사했다. 시에 ‘연(燕)’과 ‘조(趙)’라는 글자가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그가 먹은 음식은 중국 북방 훠궈와 비슷했을 것이다. 그들은 훠궈 재료인 죽순과 채소가 소화가 잘 돼 위장에 매우 좋다고 생각했다.


훠궈가 일으킨 ‘마라 열풍’

그러나, 북방 훠궈보다 쓰촨·충칭의 마라 훠궈가 요즘 한국에서 더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쓰촨과 충칭의 마라 훠궈는 충칭에서 시작됐고, 기원은 명청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문가들은 마라 훠궈는 충칭의 창장(長江), 자링장(嘉陵江) 부두에서 일하던 인부들이 먹기 시작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고대 인부들은 소득이 낮아 값싼 동물의 내장을 사 먹었다. 내장은 비린내가 강해 우지(牛脂)에 고추와 산초 등을 볶아 밑재료로 삼고 내장을 육수에 담가 익히면 비린내가 제거되고, 습기를 없애고 열을 높여주는 작용을 해 강물의 한기와 습기가 몸에 침투하는 것을 막아주었다. 쓰촨·충칭의 마라 훠궈는 모두 ‘신선한 향과 맵고 얼얼한 맛’을 강조하지만 조금 다른 부분도 있다. 충칭은 우지(牛脂)의 진한 향이 강하지만, 쓰촨 청두는 주로 식물성 기름을 사용해 매운 것을 잘 못 먹는 사람에게 적합하다. 충칭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중국 내 마지막 거점으로 광복군도 충칭에서 설립됐다. 아쉽게도 당시 충칭 훠궈를 먹었다는 기록은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나 훠궈는 충칭의 대표적인 음식으로 자리잡았고, 마라 경제 발전의 버팀목이 되었다.


마라훠궈가 점점 알려지면서 ‘마라’ 맛도 한국인들에게 많이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특히 마라훠궈의 심플 버전 격인 마라탕(麻辣燙)은 폭넓은 호평을 받았다. 또한 한국의 일부 인터넷 동영상 업로더가 중국 여행을 하면서 마라 음식을 맛보고 소개해 중국의 다양한 마라 요리가 한국에 알려졌다. 소위 ‘마라’란 산초의 얼얼한 ‘마(麻)’와 고추의 매운 ‘라(辣)’를 가리킨다. 서진(西晉)의 <화양국지(華陽國志)> 기록에 따르면, 1800년 전 쓰촨 사람들은 맵고 향이 강한 식재료를 좋아해 산초를 애용했다. 삼국시대는 서진 시기와 가깝다. 제갈량은 쓰촨에 입성한 뒤 몸에 습기가 침투한다고 하여 산초를 자주 먹었다고 한다. 후추에 비해 산초는 얼얼한 맛과 향이 강해 결국 쓰촨 요리의 영혼이 됐다. 한국에는 정통의 맛을 유지하기 위해 쓰촨에서 산초를 직접 공수해오는 중식당도 많다.


‘마라’가 한국에서 열풍을 일으킨 것처럼 한국의 ‘부대찌개’도 중국 젊은 층 사이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부대찌개는 한국어로 ‘찌개’지만, 조리 형태가 종종 훠궈와 비슷해 중국의 한식당은 부대찌개를 부대훠궈라고 번역한다는 것이다. 이 역시 중국인에게 훠궈가 얼마나 익숙하고, 중국인이 훠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훠궈가 이렇게 큰 사랑을 받는 이유는 독특한 맛 뿐만 아니라 훠궈가 가진 다양성과 포용성 때문이다. 어떤 식재료라도 훠궈 냄비에 담갔다 꺼내면 맛있어지고, 같은 훠궈 냄비를 여러 구역으로 나눠 다른 육수를 사용하면 한 냄비에서 여러 맛을 먹을 수 있다. 때문에 사람들의 식성이 아무리 다양해도 훠궈는 모임의 영원한 공통 분모이고, 한 식탁에 부담 없이 둘러앉아 함께 즐길 수 있다. 따라서 중국의 훠궈에는 포용과 다름을 받아들이는 중국 문화가 담겨있다. 사람 사이에 다양한 차이가 있어도 번영과 공존, 공유와 공동 관리의 길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글|위셴룽(喻顯龍), 상하이(上海)외국어대학 글로벌문명사연구소 전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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