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6-06
중국 남북조시대 양(梁)나라의 문신 주흥사(周興嗣)가 편찬한 <천자문(千字文)>은 상용한자 천개를 4자씩 대구(對句)를 이룬 운문으로 만들어 외우기가 좋아 어린이용 도서로 널리 사용됐다. 중국 민간에서 <천자문>은 <삼자경(三字經)>, <백가성(百家姓)>과 더불어 ‘중국 전통 계몽 3대 도서’로 꼽힌다.
<천자문>과 고대 한국의 교육
<천자문>은 일찌감치 고대 한국으로 전해졌다. 고려 왕실은 이를 한문 교육의 기초 도서로 사용했다. <고려사>에 따르면 고려 충목왕은 문신들에게 <천자문>을 가르쳐달라고 했다. 고려 말, 한문 교육이 중요시되면서 <천자문>의 지위도 상승했다. 1357년 고려는 무관이 사서 같은 경전을 어려워한다는 것을 알고 무관들에게 <천자문>을 꼭 익히도록 했다. 백자를 쓰면 시험에 합격해 관직에 부임할 수 있도록 했다. 백자도 못 쓰면 영원히 관직에 부임될 수 없었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천자문>은 한자 학습에서 제일 중요한 도서가 됐다. 1425년 경상도 감사 하연진이 조정에 올린 책 중에 전서(篆書)로 된 <천자문>과 대자(大字)로 된 <천자문>이 있었다. 세종은 특별히 서적을 성균관, 교서관, 사부 학당에 하사했다. 인조시대에 문신 이서가 인조에게 무관 자제들이 무술을 연마해 무관이 됐어도 <천자문>을 아는 자가 적다고 하자 인조는 무과에 별시를 마련해 <천자문>을 평가하도록 했다.
숙종시대 신오성은 일반 백성 중에 <천자문>을 아는 자라면 귀천을 불문하고 하급 관원으로 선발하자고 건의했다. 영조시대 무관 원필규는 젊었을 때 미남자(美男子)였으나 매우 용맹했다. 그는 영조에게 자신은 <천자문>을 익혀 충효의 도리를 안다고 하자 영조는 크게 칭찬했다. 영조도 <천자문>을 매우 중시해 1338년 희귀 판본인 <천자문>을 인쇄해 대신들에게 하사했다.
순조시대 영의정 김재찬은 <천자문>은 경서나 사서는 아니지만 경전 학습의 기초라고 생각했다. 철종은 아이들을 교육할 때 <소학(小學)> 같은 책보다 먼저 <천자문>을 익히도록 했다.
퇴계 이황은 어릴 때 근처에 <천자문>을 통달한 노인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에게 공손하게 배움을 청했다. 조선 후기 문신 윤기는 <독서차제(讀書次第)>에서 조선의 남자아이는 말을 할 줄 아는 때가 되면 주흥사가 편찬한 <천자문>을 익혀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규경은 <천자문변증설(千字文辨证说)>에서 조선의 풍습에 따라 아이가 4~5세가 되면 <천자문>을 익혀야 하고, 일부 지역의 학자는 <천자문>을 <백수문(白首文)>이라고 불렀다. ‘백수’란 주흥사가 <천자문>을 편찬하느라 머리를 너무 쓴 탓에 하룻밤 사이에 머리가 하얘졌다는 데서 나온 말이다.
<천자문>과 고대 분류 표기 방법
1388년 고려 대사헌 조준은 논밭 등기에 <천자문>의 한자를 사용해 표시하고 그 순서대로 배열하자고 제안했다. 이후 이것은 조선시대까지 이어졌다. 1398년 조선 태조는 관찰사에게 각지를 시찰하도록 하고 <천자문> 한자로 민가의 논밭을 표시하고 세금을 징수하도록 했다. 세종시대에는 <천자문>으로 식량 창고를 표시하도록 했고 <천자문> 한자 순서로 창고에 보관된 식량의 기간을 기록했다. 이 밖에 <만기요람(萬機要覽)> 기록에 따르면 세종시대 지방의 조선(漕船)도 <천자문> 한자로 표기했다. 연산군은 응사(鷹師) 군인에게 군패를 착용해 신분증으로 사용하도록 했고 이 군패에 <천자문> 한자를 각인해 분류하도록 했다.
이뿐 아니라 조선시대 중국에 보내는 공물 포장에도 <천자문> 한자로 표기하고 분류했다.
조선시대 <천자문>은 표기 외에 대외 교류의 선물이 되기도 했다. 1467년 세조는 유구국(琉球國)에서 온 사신을 반갑게 맞이 하고 많은 선물을 하사했는데 선물에 서예가 조맹부가 쓴 <진초천자문(真草千字文)>도 있었다.
<천자문>과 자식 사랑
<천자문>은 어린이 학습 도서였기 때문에 아이에 대한 어른의 사랑이 가득 담겨 있었다. <중종실록(中宗實錄)>에 따르면 어린시절 인종은 듬직하게 <천자문>을 한 자도 틀리지 않게 암송했다고 한다. 중종은 이를 매우 기뻐해 인종의 유모에게 큰 상을 내렸고 아들에게 직접 글을 하사했다. 숙종도 아들 경종의 교육에 관심이 매우 많아 경종이 네 살 때 <천자문> 서문을 직접 써 경종이 공부하게 했다.
영조시대, 사도세자가 제일 먼저 익힌 것도 <천자문>이었다. 어느 날 ‘치(侈)’ 자를 본 사도세자는 자신이 입은 화려한 옷을 가리키며 이것이 ‘치’라고 말하며 옷을 벗었다. 이에 영조는 매우 기뻐했다. 또한 사도세자는 신하들이 보는 앞에서 ‘효당갈력, 충즉진명입신양명지도야(孝當竭力, 忠則盡命立身揚名之道也)’라고 썼다. 영조는 이 글의 앞 구는 <천자문>에서, 뒤 구는 <효경(孝經)>에서 나온 말을 합쳐 논리가 통하게 만들었다는 것을 알고 아들의 총명함을 자랑스러워했다. 대신들도 칭찬을 아끼지 않자 영조는 이 글을 모사해 소장하도록 했다.
1813년 어린 효명세자는 정식으로 스승을 모시고 공부했다. 아버지 순조는 아들을 위해 학습 장소를 물색하고 우선 <천자문>을 배우도록 했다. 성인이 된 효명세자는 아들 헌종을 매우 사랑했다. 어린 헌종이 <천자문>의 백여 자를 알자 아들이 자신보다 낫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근대 들어 고종은 다섯 살인 순종이 <천자문>을 다 익히자 대신들에게 아들에 대한 애정을 표현했다. 조선 후기 문신 이유원은 외손자 조중갑이 다섯 살에 <천자문>을 통독하자 그 기쁨을 ‘만경흔(晚景欣)’이라는 시를 지어 표현했다.
17세기 문신 심유는 요절한 손자를 애도하면서 머리맡에서 손자가 <천자문>을 읽는 장면을 떠올리며 ‘낭랑성운최감문(瑯瑯聲韻最堪聞)’인데 이제 사람은 없으니 눈물이 앞을 가린다고 했다. 비슷한 예가 또 있다. 18세기 학자 권렴의 손자도 어려서 세상을 떠났다. 권렴은 직접 쓴 제문에서 손자가 매우 총명해 세 살 때 <천자문>의 모든 글자를 알았다며, 할아버지와 손자의 즐거웠던 시간을 추억하면서 슬픔을 표현했다.
고대 한국에서는 많은 이가 직접 <천자문>을 썼고, 그 중에는 서예가 한호가 남긴 것이 후세가 필사하는 판본 중 하나가 됐다. 주목할 만한 점은 조선 후기 문신 신기선이 주흥사의 <천자문>을 바탕으로 한국 본토의 <천자문>인 <계몽천자문(啟蒙千字文)>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는 최초의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지금도 <천자문>은 한국인이 한문을 배우고 이해하는 기본서 중 하나다.
글|위셴룽(喻顯龍), 상하이(上海)외국어대학 글로벌문명사연구소 전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