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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족의 침입(1)


2023-05-29      

로마인은 라인강과 다뉴브강 밖의 이민족을 ‘바바리안(야만족)’이라고 불렀다. 이후 ‘게르만족’이라고 총칭했다. 한(漢)나라와 마찬가지로 로마도 두 강 옆에 ‘게르만 장성’을 건설해 게르만의 여러 부족과 아슬아슬한 평화를 유지했다. 북흉노가 동쪽으로 압박해 들어오자 초원의 각 부족들은 취약한 장성(長城)을 뚫고 내려왔다. 게르만족은 내륙까지 들어와 살육과 약탈을 일삼고 북아프리카와 스페인 등 곡창지대와 은광지대를 점령하고 나라를 세웠다.


한 지역당 하나의 왕국

서기 409년 수비족이 스페인 북서부를, 439년 반달족이 북아프리카를, 457년 부르고뉴족이 프랑스 북동부를, 449년 앵글로 색슨족이 브리튼을 점령했다. 이 민족들은 각각의 지역을 점령해 작은 왕국을 건설했다. 진정으로 ‘대왕국’을 세운 것은 고트족과 프랑크족이었다. 동서 고트왕국이 남유럽(스페인, 이탈리아, 프랑스 남부)을 점령했고, 프랑크족은 서유럽 대부분을 정복했다.


역사가에 따르면, 476년 서로마제국을 멸망시킨 바바리안은 겨우 12만명이었다고 한다. 이후 북아프리카를 점령한 반달족은 8만명, 갈리아를 점령한 것은 10만 프랑크족, 알란족, 부르고뉴족이었다. 이렇게 계산하면, 로마제국에 입성한 바바리안의 총 인구 수는 75만에서 100만 사이다.


이에 비해 동진과 서진의 양진(兩晉) 시기에 남하한 오호(五胡)의 수는 수백만에 달했다. 로마와 서진의 인구가 비슷하다는 것을 감안하면 로마에 들어온 게르만족 수는 로마인보다 훨씬 적었다. 오호에 비해 ‘로마화’되기 훨씬 쉬워 로마 문명은 한나라 문명처럼 서유럽에서 계승되어야 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게르만왕국은 개별적으로 잠시 ‘일부 로마화’를 취한 것 외에 거의 대부분은 철저한 ‘탈로마화’를 시행했다.


예를 들어, 나라를 세운 고트족은 피정복민인 로마인과 분리해 거주했고, 보통 성 밖에 성루를 건설했다. 마을에 띄엄띄엄 우뚝 솟은 성루는 마치 고독한 섬 같았고 오늘날 유럽 지방의 성루 풍경의 기원이 됐다. 고트족은 순결한 혈통을 보존하기 위해 로마인에게 동화되지 않았다. 용맹한 정신이 로마 문명에 침식되지 않도록 ‘이원정치’를 시행했다.


종족 교류에서 고트족은 ‘종족 분리 관리’ 제도를 시행해 로마인과 고트족의 혼인을 금지했다. 법률적으로 고트족은 바바리안 관습법을, 로마인은 로마법을 따랐다. 행정 제도에서 고트족은 군사를, 로마인은 민사를 담당했다. 문화 교육에서 고트족은 로마 라틴어와 고전문화 학습을 장려하지 않았다. 종교에서는 로마인은 기독교를 믿었지만 고트족은 기독교에서 ‘이단’으로 분류한 아리우스파를 믿었다. 이런 분리 관리 규칙이 다년간 계속됐다. 영국의 역사 학자 페리 앤더슨의 말처럼 바바리안 왕국은 ‘융합이 아닌 분열 방식’을 더 많이 채택했다.


통하지 않는 융합

게르만의 여러 왕국 중 유일하게 ‘부분 로마화’를 시행한 사람은 동고트의 왕 테오도리쿠스였다. 그도 ‘이원정치’를 시행했지만 로마 문명의 가치를 가장 잘 이해한 바바리안 국왕이었다.


동고트의 왕자였던 테오도리쿠스는 인질로 동로마 궁정에 머물면서 교육을 받아 로마의 귀족 사회를 잘 알았다. 서로마를 점령하고 이탈리아 국왕으로 자립한 테오도리쿠스는 서로마의 문관제도를 유지해 로마는 여전히 집정관, 재무관, 국무대신 등이 관리했다. 그는 로마인은 관리가 되고 고트인은 군인이 되도록 했다. 고트 병사가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좋은 점은 로마 시골 지주들로부터 토지의 3분의 1을 받을 수 있는 것이었다. 이는 바바리안 점령군 중 제일 적었다.


테오도리쿠스는 어질고 너그러워 그의 통치 하에서 로마인은 자신의 복장, 언어, 법률, 관습, 종교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는 또한 로마 원로들의 권력을 특별히 유지시켜 주었다. 테오도리쿠스는 국정을 로마의 귀족 및 아우구스티누스 이후 가장 위대한 교회 철학자 보이티우스에게 위임했다.


테오도리쿠스가 로마 원로를 편파적으로 편들자 고트족 사이에서 불만이 싹텄다. 2만명의 고트족 병사는 이탈리아에서 ‘분노의 마음’을 품은 채 평화와 기율을 유지했다. 테오도리쿠스가 통치한 33년 동안 이탈리아와 스페인은 웅장한 도시, 우아한 원로, 성대한 축제, 경건한 종교 등 과거 로마의 풍모를 유지했다.


영국의 역사 학자 에드워드 기번은 “로마인과 고트인은 종족 융합을 이룰 수 있었다”며 “고트인과 로마인이 단결하면 이탈리아의 행복한 생활이 대대로 이어질 수 있었다. 자유로운 관리와 백성, 지식이 있는 병사로 구성된 새로운 인민은 고상한 품격을 서로 경쟁해 발전할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고트인과 로마인의 뿌리 깊은 갈등은 먼저 종교에서 터졌다. 테오도리쿠스는 로마 교회를 인정했지만 로마 교회는 유태교를 절대 인정하지 않았다. 유태인의 교회를 불태우고 그들의 재산을 강탈했다. 테오도리쿠스는 공평하게 처리하기 위해 범죄를 저지른 기독교인을 처벌했다. 기독교인은 이에 불만을 품었고, 그를 등지고 동로마 비잔틴 교회와 자주 결탁했다.


523년 로마의 원로 알비누스가 동로마 황제에게 고트왕국을 물리쳐 로마인의 ‘자유’를 되찾아 달라고 쓴 편지가 발각됐다. 테오도리쿠스는 격노해 반역을 꾀한 원로들을 잡아들이라고 명령했다. 그때 보이티우스가 “그들에게 죄가 있다면 나도 죄가 있습니다! 나에게 죄가 없다면 그들에게도 죄가 없습니다!” 라고 반발했다. 그는 고트인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지만 중요한 순간 로마 귀족의 편에 섰다.


기번은 고트족이 아무리 관용을 베풀었어도 로마인의 인정은 영원히 받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런 말을 했다. “고마움을 모르는 신하와 백성들은 이 고트 정복자의 출신과 종교, 심지어 품성까지 영원히 마음으로 인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때 테오도리쿠스는 이미 노년에 접어들었다. 그는 ‘평생 로마인을 위해 애썼건만 돌아온 것은 증오뿐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분노했다. 결국 테오도리쿠스는 보이티우스를 사형에 처하기로 하고 일부러 ‘가장 로마답지 않은’ 방식을 택했다. 보이티우스의 ‘죽기 전 자기 변호권’을 박탈한 것이다. 보이티우스가 죽자 테오도리쿠스는 극심한 정신적 고통을 겪었고 곧 병사했다.


테오도리쿠스 사후 10년째 되는 해, 동로마 황제 유스티니아누스가 동고트에 ‘성전(聖戰)’을 선언했다. 20년 전쟁 끝에 동고트왕국을 멸망시켰다.


이 글은  판웨의  <중국 오호의  화하 진입과 유럽 바바리안 침입(中國五胡入華與歐洲蛮族入侵)>에서 발췌한 것이다.


글|판웨(潘岳) 필자는 역사학 박사이고 중국공산당중앙위원회통일전선사업부(中央統戰部) 부부장, 중국 국가민족사무위원회 주임·당조(黨組) 서기이며, 중국공산당 제20기 중앙위원회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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