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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안산시, 시선 이백이 머문 곳


2022-05-16      글|위안수(袁舒), 리이판(李一凡)

이백문화원에 들어서면 거대하고 깨끗한 이백 조각상이 보인다. 사진/마안산시 문화여유(旅遊)국


마안산(馬鞍山) 지역은 산수가 아름다워 자연을 사랑한 남조(南朝) 제(齊)나라 산수시인 사조(謝朓, 서기 464-499)는 이곳을 ‘산수도(山水都)’라고 칭하면서 자연 풍광을 찬양했다. 마안산 산수를 사랑한 문인 묵객은 셀 수 없이 많다. 그중 대표적인 인물은 시선 이백이다.


시선(詩仙) 이백과 마안산

25세에 처음 마안산 당투(當塗)를 지나 62세에 이곳에서 죽을 때까지 38년 동안 이백은 7차례 마안산 명승지를 찾았고 결국 이 땅에 영원히 머물게 됐다. 이백은 이곳의 경치를 접할 때마다 감정이 생겼고, 생긴 감정을 발산하면서 즉흥적으로 시를 썼다. 가장 유명한 시로는 <망천문산(望天門山)>, <야박우저회고(夜泊牛渚懷古)> 등이 있다.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이 시들은 영원히 시들지 않고 지금까지도 광범위하게 전하고 읊어지고 있다.


서기 725년 25세의 이백이 강동(江東, 창장(長江) 동쪽 지역) 땅을 방문해 차이스지(采石磯)에 올라 천문을 바라보며 <망천문산>이라는 절구를 썼다.


‘천문중단초강개, 벽수동류지차회. 양안청산상대출, 고범일편일변래(天門中斷楚江開, 碧水東流至此回. 兩岸青山相對出, 孤帆一片日邊來).’ 천문을 반으로 잘라 초강(楚江)을 열고, 동으로 가던 물이 여기서 꺾여 돌아가네. 양쪽의 푸른 산 사이로, 외로운 배 한 척이 해 뜨는 곳에서 온다.


이백이 표현한 마안산은 산과 물을 품고 드넓고 풍요로워 하늘이 만든 그림처럼 다채로운 신운(神韻)을 보여준다. 시선 이백은 차이스지의 산수에 반해 이곳에서 자주 술을 들고 바람을 맞으며 시를 쓰고 달을 감상해 ‘강에 뛰어들어 달을 잡고, 고래를 타고 하늘로 올랐다’는 전설을 남겼다. 차이스지도 이백 때문에 중국의 10대 달 감상지 중 하나가 됐다.


말년의 이백은 마안산으로 돌아왔다. 이때의 이백은 고난을 많이 겪어 과거 화려했던 시절은 모두 지나갔고 곤궁에 빠진 상태였다. 그는 자신의 시에서 ‘군봉영객조, 차지상애명. 각발오색모, 의중태산경(群鳳憐客鳥, 差池相哀鳴. 各拔五色毛, 意重泰山輕)’라고 읊었다. ‘봉황 무리가 객조(客鳥)를 보듯, 나를 둘러싸고 구슬프게 운다. 각자 조금씩 돈을 모으니 뜻은 무겁고 태산은 가볍다’는 뜻이다. 서기 762년 이백은 <임로가(臨路歌)>를 남기고 병사한 뒤 거주했던 룽산(龍山) 자락에 묻혔다.


이백은 임종 전 손녀에게 죽은 뒤 칭산(青山) 자락에 묻히고 싶다고 말했다. 그가 사랑했던 산수와 존경했던 시인 사조의 집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백이 세상을 떠나고 약 55년 뒤 그의 바람이 실현됐다. 당시 선흡관찰사(宣歙觀察使, 당나라 때 지방 관직) 범전정(范傳正)이 ‘칭산에 뜻이 있는’ 이백의 꿈을 이뤄주었다.


이백문화원 가장 안쪽에 있는 이백의 묘 사진/위안수


이백 묘지기, 과거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현재 이백의 묘가 있는 이백문화원은 안후이(安徽)성 마안산시 당투현 타이바이(太白)진 칭산 서쪽 기슭 편평한 땅에 위치해 있다. 문화원에 들어가면 낭랑한 새 소리와 미풍에 버드나무가 스치는 소리 외에 다른 잡음은 없는 게 시간이 멈춘 것 같다.


긴 복도 몇 개와 문화 전시실을 지나 문화원 가장 깊은 곳에 있는 곳이 이백의 묘이다. 무덤 위에는 초록 풀이 가득하고 주위에는 버드나무가 늘어져 있으며 비석 앞에 다양한 술이 놓여 있다. 이 다양한 술은 이백을 흠모하는 참배객들이 시선에게 ‘비위를 맞추기 위해’ 바친 선물이다. 묘비 앞에서 한 중년 남성이 나무 빗자루로 떨어진 낙엽과 먼지를 열심히 쓸고 있었다. 그는 이백문화원 관리인 구창신(谷常新)으로 이백의 49대 묘지기다.


이백의 묘가 룽산에서 칭산으로 이전한 뒤부터 구가(谷家)의 후손들은 대대손손 이곳을 지켰다. 그것이 벌써 1200년이 됐다. 구가의 선조인 구란신(谷蘭馨,곡란형)은 이백과 친분이 두터워 자신의 양전(良田)을 이백의 묘지터로 내놓았다. 그래서 이백의 묘가 구가가 있는 마을로 옮겨진 것이다. 그때부터 구가 사람들은 이백 묘의 묘지기가 됐다. 구창신은 숙부에게서 이 사명을 이어받아 제49대 묘지기가 됐다. 선조의 뜻을 이어받은 그는 30여 년 동안 문화원에서 일했고, 온 가족도 문화원에서 살면서 날마다 이곳의 환경을 유지하고, 가이드와 해설사를 담당하며, 민족문화의 정수를 계승하고, 현지 문화의 보물을 지키고 있다.


“이 일은 정말 쉽지 않다. 급여도 밖에서 일하는 것보다 못하다. 하지만 조상인 곡란형의 약속과 대대로 이어진 집안 어른들의 기부와 유지 보수, 이백 묘를 지키는 노력이 신성한 역사적 의미를 지녔기 때문에 이 사명을 반드시 이어갈 것이다.” 구창신은 이렇게 결연하게 말했다. 그는 이백 문화를 홍보하기 위해 전국 각지의 이백연구소 전문가들에게 자문을 구하고 고전을 공부했다. “올해 나는 55세다. 이 일을 내 아들에게 넘겨줄 준비를 하고 싶다. 60세가 되기 전에 아들이 이곳으로 돌아와 이 일을 이어받기를 바란다.”  

글|위안수(袁舒), 리이판(李一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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