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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 혼·인재 양성 100년, 새 역사 쓰는 난카이대학교


2019-11-05      

난카이대학교 메인 건물 사진/ 완취안(萬全)

보하이(渤海) 옆, 바이허(白河) 나루, 높고 높은 난카이(南開) 정신. 인재 육성, 문명 전승, 넓고 넓은 학예의 전당. 2019년 10월 17일, 난카이대학교가 건학 100주년을 맞는다. 난카이대학교는 중화민족 위기의 순간에 탄생했다. 국난으로 탄생했기 때문에 건학 목적은 시대의 폐단을 바로잡고, 인재를 양성하며, 조국을 구하는 것이다. 이 애국의 초심을 100년 난카이 분투사에 새겼고 난카이대학교의 가장 기본적인 정신적 바탕이 됐다.

1919년 9월 25일, 난카이대학교 개교기념 사진(마지막 줄 왼쪽 첫번째가 저우언라이 총리)

애국 3문(愛國三問), 나라 사랑의 혼을 만들다
100년 난카이를 돌아보면 ‘고관대작에 뜻을 두지 말고, 애국지사에 뜻을 두라’는 난카이 창립자 옌슈(嚴修)의 보국(報國) 의지를 알 수 있다. ‘국가를 위해 교육하고, 국가를 최고 목표로 하는 교육을 한다’는 문구는 난카이의 또 다른 창립자이자 교육가인 장보링(張伯苓)의 애국정신이다. ‘중화 궐기를 위해 공부한다’는 난카이 학생이자 신중국 초대 총리 저우언라이(周恩來)의 순수한 마음이다.

난카이대학교는 옌(嚴)씨 가문 가숙에서 시작됐다. 1898년 베이양 수군학당(北洋水師學堂)을 졸업한 장보링은 ‘자강의 길은 교육에 있다’ 것을 깊이 깨닫고 ‘새로운 교육으로 새로운 인재를 양성한다’는 포부를 세웠다. 그해 장보링은 열심히 가르치고 새로운 학문을 제창한다는 만청(晩淸) 한림(翰林) 옌슈를 알게 돼 옌씨 가숙에서 교편을 잡게 됐다.

1904년 옌슈와 장보링은 일본으로 건너가 견학한 다음 옌씨 가숙을 공학(公學)으로 바꾸고 이름을 중학당(中學堂)이라고 했다. 1912년부터 난카이학교라고 개명했다.

난카이학교의 건학 기반 위에 다년 간의 준비를 거쳐 1919년 가을 공식적으로 난카이대학교를 설립했다. 개교했을 때는 저우언라이, 마쥔(馬駿) 등 학생 96명과 교수 17명 뿐이었고 문(文), 이(理), 상(商) 3과목을 개설했다. 이 세 과목은 규모는 크지 않지만 ‘문으로 치국하고, 이로 강국하며, 상으로 부국한다’는 건학 이념을 따랐고 ‘인재 양성으로 국가를 구한다’는 초심이 담겨 있다.

난카이대학교 설립 초기 건물

“당신은 중국인입니까? 중국을 사랑합니까? 중국이 발전하길 바랍니까?” 1935년 가을, 난카이대학교 개학식에서 장보링 총장은 이 유명한 ‘애국 3문’을 발표했다. 그때는 9·18 사변 이후 중국 동북 3성이 적에게 함락된 때라, ‘애국 3문’은 난카이의 교사와 학생의 정신적 낙인이 됐고 구국운동에 투신하는 열정을 강하게 자극했다.

1937년, 항일전쟁이 전면 발발하고 포화의 초연 속에서 난카이는 남쪽으로 이동했다. 같은 해 11월 1일, 난카이대학교는 역시 남쪽으로 이동한 베이징(北京)대학교, 칭화(淸華)대학교와 함께 창사(長沙)에 창사임시대학교를 만들었다. 창사가 연일 일본 폭격기의 폭격을 받자 1938년 2월 중순, 창사임시대학은 세 갈래로 나눠 서쪽인 쿤밍(昆明)으로 이전했다. 1938년 4월, 국립 시난(西南)연합대학교로 개명했다.

쿤밍에서의 8년 동안 난카이대학교는 시난연합대학의 중견 역량이었고 난카이가 보여준 엄격한 교학 정신은 칭화대학교와 함께 세를 불렸고 여기에 베이징대학교의 자유 연구의 전통이 더해져 중국 고등교육 역사상 찬란한 장을 만들어냈다. 현재 난카이 바리타이(八里臺) 캠퍼스를 거닐면 쿤밍 시절의 연합대학 기념비를 완벽하게 복제한 시난연합대학 기념비를 볼 수 있다. 기념비 뒤에는 연합대학의 입학 동기 834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그들 한 명 한 명의 이름은 전란의 시대에 난카이 학생들의 보국에 대한 순수한 마음을 생동감 있게 재현하고 있다.

난카이대학교 원소유기화학 국가중점실험실은 난카이대학교 스셴루에 있다. 스셴루는 난카이대학교 전 총장 양스셴의 이름을 딴 것이다. 양스셴은 중국 농약화학·원소유기화학의 창시자이자 개척자다. 난카이대학 원소유기화학연구소를 설립해 신중국 농약사업 발전의 길을 열었다. 사진/ 완취안

공능일신(公能日新), 보국 의지를 완성하다
‘윤공윤능, 일신월이(允公允能, 日新月異·사회헌신, 지속적 자기계발)’는 100년 난카이가 계승해온 교훈이다. 애국 구국의 마음을 품은 난카이의 교수와 학생들은 애국의 마음만으로는 안 되고 교육을 통해 국가를 새롭고 강하게 만들어야 보국 의지를 실현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았다.

1920-30년대 일제의 압박이 점점 거세졌다. 난카이는 동북연구회를 설립하고 동3성을 현지조사했다. <대공보·경제주간(大公報·經濟周刊)>을 창간하고 일본의 경제위기 전가 수법을 폭로했다. 응용화학연구소와 민족기업의 긴밀한 협력을 추진해 일본의 산업·공업 독점 구도를 깼다.

1950-60년대 신중국의 시급한 과제가 줄을 이었다. 양스셴(楊石先) 난카이 전 총장은 ‘국가 과제를 용감하게 담당한다’는 구호에 호응해 수십 년 동안 해온 약물화학 연구를 포기하고 농약화학 등 국가가 시급하게 필요로 하는 분야로 전향해 중요한 성과를 거뒀다.

난카이대학 동쪽에는 연녹색 외벽에 높이가 다르고 기하학 형태의 지붕이 있는 2층 건물이 있다. ‘닝위안(寧園)’이라는 이름의 이 작은 건물은 국제적인 수학 대가, 미분 기하학의 아버지, 중국과학원 외국계 원사, 난카이수학연구소 명예소장인 천싱선(陳省身) 선생이 살던 집이다. 천싱선 선생은 1926년 난카이대학에 입학했고 1937년에 시난연합대학에서 교편을 잡았고 1985년 교육부의 위탁을 받아 난카이수학연구소를 설립해 2000년까지 난카이대학교에서 살다가 2004년 난카이에서 세상을 떠났다. 난카이인으로서 천싱선 선생은 평생 난카이와 마음으로 연결돼 있었다.

2007년, 시난연합대학교 설립 70주년을 기념해 윈난성 쿤밍시 연합대학 유적지에서 복제한 기념비가 난카이대학교 캠퍼스에서 준공해 제막했다. 사진/ 완취안

닝위안이 겸손한 건물이라면 옆에 있는 사합원식 자링학사(迦陵學舍)는 소박하고 반듯해 또 다른 멋을 자랑한다. 이것은 난카이대학교가 중화고전문화연구소 소장, 캐나다왕립학회 회원인 예자잉(葉嘉瑩) 선생을 위해 마련한 거처이자 교학, 과학연구, 장서가 하나로 융합된 중국 고전 시사(詩詞)의 보고다. 예자잉 선생은 당대 고전 시사의 거두로 동서양 학문을 꿰뚫고 품성이 고결해 ‘어디에 있든 온화하고 심오한’ 시(詩)였다. 쓰위안루(思源樓) 옆, 마티호(馬蹄湖) 앞에서 난카이 학생과 예자잉 선생이 시로 생명의 아름다움을 논하고 시로 모교에 대한 사랑을 썼다.

저우언라이 총리에서 중국 농약화학과 원소유기화학의 창시자 양스셴, 국제적인 수학자 천싱선, 유명한 물리학자 우다유(吳大猷), ‘양탄일성(兩彈一星)’에서 탁월한 공을 세운 궈융화이(郭永懷) 까지, 다시 저명한 경제학자이자 교육가·번역가인 양징녠(楊敬年), 저명한 무기화학자 선판원(申泮文) 등까지……. 난카이의 ‘애국 분투, 공능일신’의 보국 의지는 영원불변해 천하를 구하고 애국 보국하는 난카이인을 계속 배출할 수 있었다.

난카이대학교 자링학사는 중국 고전문학 전문가인 예자잉 선생의 호를 따 지은 사합원 형태의 중국식 서원이다. 사1923년 건설되고 1925년부터 사용된 쓰위안당은 난카이대학교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건물 중 하나다. 미국 록펠러재단과 기업가 위안수즈(袁述之)가 기부해 지은 것이다. 3층 높이의 서양 고전주의 건축 스타일로 지어진, 당시 학교 전체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물이었다. 사진/ 완취안

입덕수인(立德樹人), 강국의 꿈을 쓰다
9월 톈진(天津)은 하늘이 맑고 햇빛이 따스하다. 스셴루(石先樓) 앞 푸른 잔디밭에 저우언라이 총리의 동상이 있다. “중화로 모여 세계로 비상할 때가 오길 바란다.” 100년 전, 난카이의 동문 저우언라이 총리가 큰 소리로 외친 맹세가 난카이의 자녀를 격려하고 있다. “우리는 새로운 난카이가 품은 뜻을 따르고 중국을 알고, 중국에 봉사한다.” 세월은 흘러도 이 같은 난카이의 보국 의지는 변하지 않았다.

최근 난카이대학은 징진지(京津冀) 공동 발전, 자유무역지구 건설 등 중요한 국가전략에서 싱크탱크와 브레인 파워 역할을 해 맞춤형 연구보고서를 여럿 작성했다. 특히 신약 R&D, 신에너지 청정 고효율 이용, 대기오염 및 예방, 다리형 기중기 등 분야에서 중요한 성과를 거뒀다. 난카이의 학자들은 혁신의 길을 부단히 걸어 국가 경제사회 발전에 힘을 보탰다.

‘문과 진흥 계획, 이과 향상 계획, 바이오메디컬 발전 계획, 공과 등반 계획’ 등 신시대에 진입해 난카이대학교는 국가 전략의 수요와 세계 학술의 최전선에 집중하고 있다. 과학연구 혁신의 대형 플랫폼, 대형 팀, 대형 프로젝트, 대형 성과, 대형 구도, 대형 무대 건설에 힘써 학과 진흥 계획이 일련의 성과를 거뒀다.

2018년 5월 ESI 데이터에 따르면, 난카이대학교의 ESI 논문 인용 횟수는 국내 고등교육기관 중 1위였다. 2017년 네이처 인덱스(Nature Index)에서 난카이대학교가 전세계 과학연구학술기관 중 57위를, 중국 고등교육기관 중 7위를 각각 차지했다. 화학과는 전세계 과학연구기관 중 22위에 올랐다.

신시대 난카이의 교수와 학생은 난카이의 애국 전통을 이어받고 사회에 봉사한다는 난카이 설립 초심을 실천해 빈곤 탈출 공격전, 빈곤지원 교육지원 등 사회봉사 분야에서 긍정적인 역할을 해 큰 공을 세우고 있다.

“윤공윤능, 일신월이의 난카이 교훈은 난카이의 젊은 학생들이 중국을 알고 중국에 봉사하는 철학을 갖도록 했고, 교육지원 활동은 나에게 있어 생활 속에서 당의 정체성과 국가 상황을 교육해주는 과목이 됐다.” 이렇게 말하는 생명공학학원 14학번인 청취한(程曲漢) 학생은 시짱(西藏) 교육지원 활동에서 갓 돌아왔다. 그는 난카이대학교 제20회 대학원생 교육지원단 회원이다.

1999년 난카이는 ‘중국 청년봉사자 빈곤지원 계주계획(中國靑年志願者扶貧接力計劃)’ 대학원생 지원단 프로젝트를 처음으로 시행했다. 지금까지 총 200여 명의 대학원생 봉사자가 간쑤(甘肅), 신장(新疆), 시짱 등지에서 교육지원 서비스에 참여해 서부지역 교육사업 발전에 힘을 보탰다. 20년 동안 난카이교육지원단 회원들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의지를 불태우고 능력을 키워 ‘중국을 알고 중국에 봉사한다’는 우수한 전통과 애국 보국의 정신을 인민에 뿌리를 두고 국가에 봉사하는 실천을 통해 보여주었다.

“조국의 변방에서, 서부의 기층에서 내가 한 일은 평범했다. 이것도 난카이의 애국 분투, 민족에 힘을 보태는 전통을 계승한 것이다.” 아이웨이쥔(艾偉俊) 법학원 당위원회 부서기, 부원장은 간쑤성 좡랑(莊浪)현 가오팡(高房)촌 제1 서기로 부임했었다. 그는 난카이대학교 애국분투정신 선전단 회원이다.

난카이대학교는 또한 국제화 건학 목표를 적극 실천해 320여 국내외 유명 대학교 및 국제 학술기관과 협력 및 교류 관계를 맺어 국제적인 영향력을 갖게 됐다. 난카이대학교는 한국 대학들과도 깊고 넓은 협력을 진행해 중국의 한국 연구 분야에서 꽤 많은 실적을 낸 한국학 연구의 중요한 기지다.

2004년 4월 26일, 난카이대학교는 한국고등교육재단과 난카이대학교 아시아연구센터를 공동 설립했다. 이 센터는 한국고등교육재단이 중국 대륙에 설립한 10개 아시아연구센터 중 하나다. 센터는 난카이대학교 학자들의 학술 연구와 학술 교류 지원을 통해 학술 발전을 꾀하고 상호 이해를 증진하며 공동 번영을 촉진했다.

2004년부터 15차례 54명의 난카이대학교 교수들이 한국고등교육재단의 학자 지원 프로젝트를 통해 한국을 방문해 6개월에서 1년 동안 학술 교류를 했다. 2014년에서 2017년까지, 난카이대학교 아시아연구센터 한국동북기금회는 ‘평화와 번영을 위한 중한 협력’을 주제로 4차례 ‘중한 협력 대화’를 개최하고 한국의 정객, 유명 학자를 초청해 중한 관계 발전과 중한 협력의 미래에 대한 의견을 제시했다.

리춘푸(李春福) 난카이대학교 아시아연구센터 부주임은 올 11월 ‘중국 한국학 대회’가 난카이대학교에서 개최된다고 소개했다. 이는 중국의 한국학 연구 분야에서 가장 권위있는 대회다.

난카이가 가진 깊은 인문과학 기반은 중한 문화 교류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2009년 난카이대학과 한국 제주 한라대학이 공동 설립한 ‘제주 한라대학교 공자학원’이 공식 개원했다. 난카이는 해마다 우수한 교사를 선발해 한국으로 파견했다. 10년 동안 제주 한라대학교 공자학원은 한국에서 중국어를 배우고 중국 문화를 이해하는 중요한 창구가 됐고, 중한 양국의 문명 교류와 상호 참고, 학술 교류에 중요한 플랫폼을 제공했다.

100년 전, 난카이인은 애국의 염원을 계승해 인재 육성으로 나라를 구하는 건학의 길을 열었다. 100년 뒤, 신시대 난카이인은 강국의 꿈을 품고 단련하면서 전진하고 있다.

난카이 품격, 중국특색, 세계 일류 대학 건설은 난카이가 새로운 100년을 향하고 ‘쌍일류’를 실현하는 장대한 목표다. ‘애국지문(愛國之問)’은 역사의 질문이자 시대의 질문이고 미래의 질문으로, 우리는 대대로 물어야 하고 이에 답해야 한다. 새로운 100년을 맞은 난카이인은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이라는 ‘중국몽(中國夢)’을 위해 역사와 시대에 부끄럽지 않은 난카이의 ‘답안’을 내놓을 것이다.


글|장쉐(張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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