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위치 :  >> 최신뉴스 >> 본문

항저우, 기억과 희망이 담긴 아름다운 도시


인민화보

2019-06-10      인민화보

항공에서 촬영한 항저우 첸장(錢江)신도시  사진/VCG

중국을 여행한다면 항저우(杭州)는 꼭 가봐야 한다. 중국에는 ‘하늘에는 천당이 있고 땅에는 쑤항(蘇杭, 쑤저우와 항저우)이 있다’라는 말이 있다. 항저우의 시후(西湖)는 세계문화유산으로 ‘시후 10경’으로 매우 유명하다. 항저우는 중국 7대 고도(古都) 중 하나로 중국의 수천 년 발전 과정을 담고 있다. 양저문화(良渚文化)와 오월문화(吳越文化), 운하문화(運河文化)가 항저우의 면면히 이어지는 생명선을 확장해주고 있다. 또한 이곳은 ‘실크로드 경제벨트’와 ‘21세기 해상 실크로드’가 확장된 합류지점으로 신시기의 활력이 넘친다.

한국인 친구들에게 항저우는 또 다른 의미가 있다. 이곳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활동지 중 한 곳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가장 어려웠던 시기의 흔적과 기록이 있으며, 민족 해방을 쟁취하기 위한 중·한 양국 인민의 혁명 우의가 보존돼 있다. 항저우는 아름다운 도시이자 기억과 희망을 담고 있는 도시다.

항저우 시후  사진/VCG

그림 같은 여행자의 천국
항저우는 천혜의 자연 조건을 가진 풍수의 명당이다. 창장(長江)삼각주 남쪽, 항저우만 서쪽에 위치한 항저우는 산과 물이 맞닿아 있고 호수와 도시가 조화를 이루며 강(江), 하(河), 호(湖), 해(海), 계(溪) 5개 수자원이 시 같고 그림 같은 항저우를 그려낸다. 중국 7대 고도 중 하나인 항저우는 5대 오월국(AD 907-978)과 남송(AD 1138-1279)의 수도였다. 항저우의 매력에 세계도 감탄했다. 13세기 이탈리아의 여행가 마르코 폴로는 항저우를 여행하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부귀한 하늘의 도시’라고 경탄했다.

항저우 여행에서 시후를 빼놓을 수 없다. 시후는 항저우의 시후이자 중국과 세계의 시후다. 항저우 서쪽에 가면 3면이 운산(雲山)이고 호수가 도시를 감싸는 시후 풍경을 볼 수 있다. ‘시후를 서시에 비유한다면, 옅고 짙은 화장 모두 잘 어울린다.’ 운산과 아름다운 물은 시후의 바탕색이고, 산수와 인문의 융합은 시후풍경명승구의 격조다. 시후의 절묘함은 호수가 산을 감싸고, 산이 호수 밖을 병풍처럼 둘러싸 산과 호수가 서로의 아름다움을 배가시킨다는 것이다. 시후의 아름다움은 맑은 하늘에 넘실거리는 물결과 빗속에서 피어오르는 자욱한 물안개가 있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맑으나 흐리나 모두 절경을 이룬다는 것이다. 호수는 쑤디(蘇堤)와 바이디(白堤)로 유명하다. 쑤디와 바이디는 시후를 가로지르며 시후를 시리후(西里湖), 샤오난후(小南湖), 웨후(岳湖), 와이후(外湖), 리후(里湖)의 5개 부분으로 나눈다. 새벽 여명이 밝아오면 안개가 연기처럼 피어올라 호수면에 옅은 안개가 깔리면 ‘육교연류(六橋煙柳)’의 아름다운 풍경이 나타난다. 이것은 첸탕(錢塘) 10경 중 하나다. 이때 시후 옆에 앉아 시후 룽징(龍井)차를 마시면 ‘원앙도, 신선도 부럽지 않다.’

멀리서 항저우까지 왔으면 시후는 물론 실크(비단)도 빼놓을 수 없다. 항저우에 온 기념품으로 실크만한 게 없다. 당나라 시인 백거이는 ‘여인은 비단의 감꽃 문양을 자랑하고, 술집에서 ‘이화’를 사 마신다(紅袖織绫誇柿蒂, 青旗沽酒趁梨花)’는 시 구절로 항저우 실크의 높은 수준을 노래했다. 항저우 지역에서 생산되는 주(綢), 단(緞), 금(錦), 방(紡), 능(绫), 나(羅) 등 14개 품목 200여 개 품종이 전 세계 100여 개 국가와 지역으로 수출되고 있다. 가족과 친구에게 기념품을 선물하고 싶다면 실크가 최고의 선택일 것이다.

현재 항저우는 ‘스마트 도시’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곳에서 중국 최대 인터넷기업인 알리바바가 탄생했고, 2016년에는 주요20개국(G20) 정상회의가 개최되기도 했다. 항저우는 편리한 생활, 편안한 환경, 열정적인 미소로 여행자가 여행의 피로를 잊고 인간 세상의 천국에 빠져들게 할 것이다.


창성로 55호에 위치해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항저우 구지 기념관  사진/판정(潘徵)

한반도와의 오랜 인연
한국인에게 항저우, 더 나아가 저장(浙江)지역은 매우 친밀한 곳이다. 아득한 옛날부터 저장성은 조선반도(한반도)와 해상 왕래를 했다. 고고학자들은 조선반도 남부와 저장성 남부 연해지역, 저둥(浙東) 섬 등에서 거석문화의 고분 형식인 고인돌을 발견했다. 형태가 매우 비슷해 수천 년 전 저장지역과 조선반도가 해상 교류를 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송나라와 원나라 때 저장과 조선반도의 해상무역이 가장 번성했다. 저장에서 생산된 실크와 자기, 서적이 고려에 수출됐고 고려에서 생산된 인삼 제품과 공예품이 저장으로 수입됐다. 빈번한 해상무역 외에도 당시 고려 사절단이 밍저우(明州, 지금의 닝보(寧波) 항구에 자주 들어왔다. 1117년 밍저우에 고려 사절관을 설립해 고려 사절을 맞이했다. 1976년 한국 전라남도 신안 해역에서 발견된 밍저우 침몰선과 출토된 3396점의 아름다운 중국 자기가 가장 좋은 예다.

불교문화의 대외 교류사에서 중국 저장과 조선반도의 관계가 특히 긴밀했다. 역대 신라, 고려 승려가 불법을 구하러 중국에 왔을 때 저장을 방문해 불법을 공부해 톈타이(天台), 항저우, 닝보, 푸퉈(普陀) 등 불교 성지에 발자취를 남겼다. 그들은 조선반도 불교문화 발전에 크게 기여했을 뿐 아니라 일부 고승은 저장 불교와 뗄 수 없는 인연을 맺었다. 고려 왕족 의통(義通, 927-988)은 톈타이산에서 20년 동안 공부하고 저둥(浙東)에서 20여 년 동안 설법해 이름을 날려 천태종 제16조(祖)가 됐다. 고려 문종 넷째 아들 의천(義天, 1055-1101)은 혜인사(慧因寺) 장경각 수리에 기부를 하고 화엄종 고서 170여 권을 기증했다. 이 때문에 혜인사는 고려사라고 불렸으며 화엄종의 중흥지가 됐다. 저장에는 각 시기 조선반도와의 교류 흔적이 남아 있어 양국 인민의 우호를 가장 잘 보여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항저우 구지 기념관 내부  사진/판정

혁명우의를 계승해 새 시대 교류를 추진한다
항저우는 고대 중국과 조선반도의 우호적인 왕래의 유구한 역사뿐 아니라 근대 중·한 양국 인민이 민족 해방을 위해 싸웠던 혁명의 우의도 기록하고 있다.

1932년 4월 29일, 상하이(上海) 훙커우(虹口)공원 폭발사건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저장으로 옮겨 항저우, 자싱(嘉興), 하이옌(海鹽) 등지에서 고난의 시기를 보냈다. 상황 변화와 투쟁의 필요 때문에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전장(鎮江), 창사(長沙), 류저우(柳州), 치장(綦江) 등지로 이동했다가 1940년 충칭(重慶)에 도착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저장에서 활동한 기간은 5년 정도로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가장 어려운 시기였다. 이 시기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갖가지 이유로 해산 위기에 놓였다가 6명의 위원이 다시 규합해 운영됐고 침체기에서 벗어나 부흥의 시기로 접어들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항저우에서 활동했던 시기는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고 할 수 있다.

1992년 중·한 양국이 수교하자 저장성과 한국은 경제 교류를 확대했고 한국인 관광객 수도 해마다 늘어났다. 뤼단(呂旦) 대한민국 임시정부 항저우 구지(舊址) 기념관 관장은 2000년 이후 항저우를 방문하는 외국인 관광객 중 한국인 관광객 비중이 1위로 뛰어올랐다고 당시를 기억했다. 당시 한국의 전문가와 학자들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유적지를 많이 찾아왔다. 민간 교류 촉진을 위해 2002년 항저우시 정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유적지를 재건하기로 결정했다. 종합적으로 고려한 끝에 항저우시 정부는 시후 옆 창성(長生)로 55호를 구지 기념관 부지로 선정했다. 5년간의 건설 끝에 2007년 11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항저우 구지 기념관이 공식 개관했다.

김구 선생이 저장성 자싱(嘉興)으로 피난했을 때 저장성 주석과 상하이 항일구원회 회장 추푸청(褚輔成)이 큰 도움을 줬다. 역사를 기념하기 위해 1996년 한국정부는 추푸청에게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 사진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항저우 구지 기념관에 있는 독립장 사진/판정

대한민국 임시정부 항저우 구지 기념관 건설은 중·한 양국의 노력과 지혜의 결정체다. 저장대학교 한국연구소가 주도한 기념관 재건 과정에서 한국 독립기념관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다. 당시 기념관의 수많은 사료와 전시 내용은 모두 한국 측이 지원해주었다. 기념관 건설은 또한 시정부의 지원이 있어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었다. 당시 주민 이전, 주택 회복 및 개조 보수 작업은 모두 항저우시 정부가 투자해 진행됐다.

전시 면적 340㎡에 달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항저우 구지 기념관은 신시기 중·한 양국의 교류의 증인이다. 뤼단 관장은 “항저우시는 한국 전라남도 여수시와 자매도시 결연을 맺었고, 우호도시 체결 과정에서 양측은 공무원을 상호 파견했으며, 기념관은 공무원의 필수 방문지였다”고 소개했다. 한국 국회의원, 전라남도 도지사, 여수시 시장 등 많은 고위급 인사가 기념관을 방문해 친필 방문록을 남겼다.

1940년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성립식에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 고위인사들이 참석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항저우 구지 기념관에는 저우언라이(周恩來), 둥비우(董必武) 등 공산당 고위 인사의 이름이 서명부에 적혀 있다. 사진/판정

이 밖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항저우 구지 기념관은 신시기 중·한 양국 민간 교류의 무대가 됐다. 매년 3월 1일과 8월 15일, 주항저우 한인상회는 기념관에서 기념 행사를 갖는다. ‘한류’가 중국을 휩쓸었을 때 기념관은 중·한 가요제를 개최했다. 뤼단 관장은 2012년부터 기념관은 한인상회, 한국 영사관 등 기관과 협력해 한국어를 전공하는 중국 학생과 중국에서 유학 중인 한국 학생을 대상으로 대회를 열었다고 소개했다. “이제 해마다 열리는 고정 행사로 자리잡았다. 대학생들의 참가 열기가 뜨거워 대회의 구체적인 사항을 문의하는 학생도 있다.”

뤼단 관장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항저우 구지 기념관은 중·한 양국의 우의를 담고 있다고 말했다. “외국 정부가 다른 나라의 혁명 유적지를 보존한다는 것 자체가 매우 대단한 일이다. 대중에게 이 시기의 역사를 알리는 것은 물론 신시기 양국 인민의 교류를 위해 더 많은 기여를 해야 한다.” 


글| 장진원(張勁文)

240

< >
TIM图片20190514145251.png

100년 교류사를 통해 본 중·한 협력의 미래

2월 25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한국국제교류재단, 한국정치학회, 성균관대학교 성균중국연구소 등의 전문가 18명으로 구성된 대표단이 상하이(上海)를 방문해 상하이 황푸(黃浦)구 마당(馬當)로 306룽(弄) 4호에 위치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유적지를 참관했다.

읽기 원문>>

중·한, 손잡고 ‘맑은 하늘’ 협력 강화한다

2월 26일, 리간제(李干杰) 중국 생태환경부 부장이 베이징(北京)에서 조명래 한국 환경부 장관과 회담했다.

읽기 원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