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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교류사를 통해 본 중·한 협력의 미래


인민화보

2019-05-06      인민화보

2019년 2월 25일, 한국대표단이 중국 상하이에 위치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유적지를 방문했다. 사진은 한국대표단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유적지 앞에서 단체사진을 촬영하고 있는 모습

2월 25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한국국제교류재단, 한국정치학회, 성균관대학교 성균중국연구소 등의 전문가 18명으로 구성된 대표단이 상하이(上海)를 방문해 상하이 황푸(黃浦)구 마당(馬當)로 306룽(弄) 4호에 위치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유적지를 참관했다. 이후 대표단 일행은 푸단(復旦)대학교 국제문제연구원, 푸단대학교 조선한국연구센터, 상하이시 조선반도(한반도)연구회 등 여러 기구에서 온 중국 전문가들과 근현대 시기 한국이 펼친 노력의 역사를 돌아보고 새로운 시기 조선반도 평화 체제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

양국의 상부상조 역사
한국의 독립운동은 세계 민족해방운동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20세기 초, 조선반도와 중국, 구 소련의 극동지역 및 세계 각지에서 한국 지사들이 활약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그 중 중요한 역량이었다.

1919년 3월 1일, 일본 식민통치 하에 놓여있던 조선반도에서 민족 독립과 해방을 요구하는 ‘3·1운동’이 일어났다. 3월 7일 조선반도, 중국 동북지역, 일본, 미주 등지의 한국 지사들이 상하이에 모여 임시정부 수립에 관한 일을 의논했다. 4월 10-11일, 상하이 프랑스 조계지 진선푸(金神父)로에 위치한 임시사무소에서 임시의정원을 구성해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기로 결정했다.

상하이 임시정부 수립 후 극동의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던 대한민국의회, 한국 국내에 있던 ‘한성정부’와 통합회의를 열었다. 1919년 9월 새로운 ‘임시헌법 수정안’과 ‘임시정부 관제 개정안’이 통과되고 통일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마침내 수립됐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한국 사상 최초의 민주공화정 정부로 항일 독립운동의 핵심 지도기관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32년 저장(浙江)성 항저우(杭州)시로 옮기기 전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상하이를 본부로 13년 동안 활약했고 이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의 뿌리가 됐다.

상하이를 방문한 한국 전문가들에게 상하이는 매력적인 도시다. 김명섭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지난 세기의 상하이는 다른 중국 도시와는 달랐고 홍콩과 마카오와 비슷했다”며 “당시 청 제국과 서방 열강 간 타협의 산물로 각종 문화가 융합된 장소였고 아시아 근대 문명의 발상지 중 하나였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상하이에 자리잡게 된 것은 필연적인 선택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당시 상하이에 거주한 한국인은 1000명이 채 안 됐다. 반면 하와이에는 약 5000명, 블라디보스토크에는 10만여 명이 살고 있었다. 그런데 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베이징이나 블라디보스토그가 아닌 상하이 프랑스 조계지에 설립됐을까? 그것은 상하이가 통신과 금융이 발전한 데다 당시 특수한 국제환경도 작용했다”고 설명했다.

한국대표단이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유적지를 참관하고 있다.

1919년은 한국에게 특별한 해이다. ‘3·1 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돼 민족 해방의 역사적인 이정표였을 뿐 아니라 현재 한국 정부의 법통과 정신적 뿌리가 됐기 때문이다. 이 역사를 되짚어보며 전문가들은 중·한 양국 인민이 함께 싸웠던 민족간 우의를 떠올리며 감개무량해 했다. 100년 전 ‘3·1 운동’은 한민족의 독립의지와 민족의식을 충분히 보여주었고 세계에 한민족의 자유와 독립에 대한 의지와 결심을 드러내보였다.

마찬가지로 100년 전 중국에서도 ‘5·4 운동’이 일어나 독립과 자주, 민주와 진보의 강력한 목소리를 냈다. 중·한 두 민족은 근대에 비슷한 역사를 경험했고 어려움에 부딪쳤을 때 상부상조하면서 함께 고난을 헤쳐나갔으며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에 함께 저항했다. 중국은 국민당, 공산당은 물론 일반인 모두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한민족이 전개한 독립 애국운동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시형 한국국제교류재단 이사장은 “2019년은 한국인에게 잊을 수 없는 한 해다. 중국도 중화인민공화국 탄생 70주년의 해라 중국인에게도 의미가 큰 해이다. 과거 열강의 침락으로 고난을 겪었던 중국과 한국은 이제 세계 2대, 10대 경제체로 각각 성장했다. 이런 성과는 과거 대한민국 임시정부 구성원들이 민족 해방을 위해 힘쓴 노력과 기여 덕분이고, 중국인의 열정적인 지원과 큰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말했다.

새로운 시대의 협력 전망
중·한 양국은 함께 싸웠던 역사와 피로 맺은 혁명의 우의가 있었지만, 2차대전 이후 냉전으로 양국은 대립 관계가 됐다. 냉전 구도가 종식되자 중·한 양국은 국교를 수립해 양국 관계도 빠르게 회복됐다. 그러나 포스트 냉전 시기의 갖가지 이유로 현재 동북아 지역에는 안정적이고 성숙한 협력과 교류 체제가 형성되지 않고있다. 

장훈 한국정치학회 회장은 앞으로 중·한 양국의 협력이 매우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양국이 이뤄낸 역사적 성과를 높이 평가했다. “지난 100년 동안 양국 모두 현대 국가를 성공적으로 구축했다. 세계 역사를 보면 GDP가 300년 연속 전세계 30% 이상을 차지한 나라는 중국 뿐이다. 현재 전세계에서 인구 5000만명 이상인 나라 중 1인당 평균 GDP가 3만 달러 이상인 나라도 손에 꼽을 정도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은 중국이 전세계에 실력을 보여주면서 대국의 회귀를 알렸다. 20년 전인 1988년 서울올림픽도 민주주의와 산업화 혁명을 결합한 한국식 모델의 성공을 보여주었다.” 장 회장은 현재 세계는 권력의 중심이 이동하는 시기라 어려움과 도전이 많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과거 세계의 중심이 대륙에서 해양으로 이동했지만 다가올 100년 동안 세계의 중심은 해양에서 다시 대륙으로 이동할 것이다. 이 기간에는 어려움과 충돌이 더 많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한국과 중국은 미래의 평화 공존을 위해 협력과 소통, 이해를 강화해야 한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은 현재 세계는 100년 동안 없었던 대 변화에 놓여있다고 말한 바 있다. 펑위쥔(馮玉軍) 푸단대학교 국제문제연구원 부원장은 동아시아 지역도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조선반도의 남북 관계도 크게 개선됐다. 이는 중국에게 중요한 호재이다. 조선반도 정세 안정과 남북관계 발전에서 중국은 늘 건설적인 역할을 해왔다. 우리는 조선반도에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평화가 실현되고 동북아의 냉전 체제가 완화되길 바란다.” 


글|장진원(張勁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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