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5-13
과하마(果下馬)는 희귀한 말의 한 품종이다. 키는 작지만 무거운 짐을 잘 지고 산길을 잘 걷는다. <한서(漢書)>에 따르면 한나라 폐제 유하는 재위기간 행동이 단정하지 않았다. 그는 황태후를 초청해 작은 마차를 타고 행락을 즐겼다. 여기서 말하는 작은 마차가 바로 작은 말이 끄는 궁궐의 연거(輦車)로, 이 작은 말을 과하마라고 추정하는 사람도 있다.
‘공물’이 된 과하마
남조의 범엽(范曄)이 쓴 <후한서(後漢書)>, 서진의 진수(陳壽)가 쓴 <삼국지(三國志)>에 과하마가 등장한다. 두 책에서 기록한 과하마는 기본적으로 같다. 예(濊, 중국 동북지방 남부와 조선반도(한반도) 중북부)에서 생산된 과하마가 동한 환제 때 궁궐에 공물로 바쳐졌다. 과하마라고 불리게 된 이유는 이 말이 ‘키가 3척이고, 타면 과수 아래를 지날 수 있기’ 때문이다. 전하는 바로는 당시 조선반도 낙랑지역에서도 과하마를 한나라 조정에 공물로 바쳐 마차를 끌게 했다고 한다.
수당 시기에 이르러 조선반도에서 과하마를 공물로 바쳤다는 기록이 많아진다. <삼국사기·백제본기>에 따르면 서기 621년 백제 무왕이 당나라로 사절단을 보내 과하마를 바쳤다고 한다. <삼국사기·신라본기>에 따르면 서기 723년 신라 성덕왕이 당나라로 사신을 파견할 때 보낸 공물 중에 과하마 한 필이 있었다고 한다. 중국 <신당서(新唐書)>에는 신라가 당 현종 개원 연간(서기 713-741)에 ‘조정에 들어와 과하마’를 바쳤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에는 과하마가 조선반도에서 중국으로 공물로 보내졌다는 기록이 적다. 주요 이유는 두 가지로 추측할 수 있다. 첫째, 과하마가 군사적, 경제적 가치가 없다. 또한 과하마는 주로 궁정의 오락과 여흥에 사용돼 명분적으로 충분하지 않았다. <선조실록>에 따르면 조선 선조는 과하마를 ‘백 번 때려야 한 번 움직이는’ 열등한 말로 평가했다. 채찍을 많이 때려야 겨우 한 걸음 옮긴다는 뜻이다. 둘째, 송나라때부터 중국의 남서 산간지역의 왜마(矮馬, 과하마라고도 부른다)가 대량으로 궁궐로 진상됐다. 특히 광둥(廣東) 뤄딩(羅定), 윈난(雲南) 핑볜(屛邊), 광시(廣西) 더바오(德保) 세 지역의 왜마가 제일 유명했다. 그중 광시 더바오 왜마는 명나라 가정 연간에 조정 공물로 고정됐다.
중국 고대문학 속 ‘과하마’
주목할 만한 점은 과하마가 중한 양국의 시문에 고루 나타난다는 점이다. ‘시귀(詩鬼)’라고 불리는 당나라 시인 이하(李賀)는 <마시이십삼수(馬詩二十三首)>를 썼다. 그중 한 수에서 ‘적토무인용, 당수여포기. 오문과하마, 기책임만아(赤兔無人用, 當須呂布騎. 吾聞果下馬, 羈策任蠻兒)’라고 했다. ‘적토마 같은 준마를 부릴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맹장 여포만이 그것을 탈 수 있다. 작은 과하마만이 고개를 숙여 명령을 듣고 만족(蠻族) 아이도 부릴 수 있다’는 뜻이다. 이하는 이 시를 통해 ‘적토마’와 ‘과하마’를 각각 인재와 범재에 비유하고 이를 빌려 ‘재능이 있어도 펼칠 기회를 못 만난’ 불만을 표현했으며, 평범해질 수 없다는 높은 패기를 강조했다. 북송의 강서파(江西派) 시인 조충지(晁冲之)도 ‘유래과하마, 불필오화문(猶來果下馬, 不必五花紋)’이라고 했다. 뜻은 ‘과하마를 사왔다면 오화마를 살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오화마는 귀한 명마의 대명사지만 과하마는 일반 말의 대명사로 평안하고 고요한 삶을 표현하고, 공리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품격을 말한다.
‘송시(宋詩)의 시조’ 매요신(梅堯臣)은 <간화(揀花)>라는 시에서 ‘금안결속과하마, 저지불애무난차(金鞍結束果下馬, 低枝不礙無闌遮)’라고 했다. ‘황금 안장을 작은 과하마에 얹은 듯, 비록 나뭇가지가 드리워져도 가려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하와 조충지에 비해 매요신의 ‘과하마’는 귀엽다. 이 밖에 송말원초의 시인 방회(方回)도 ‘청일완행과하마, 춘산초시우전차(晴日緩行果下馬, 春山初試雨前茶)’라고 하면서 과하마가 산기슭을 잘 다니는 특징을 잘 표현했고, 더불어 한가하고 만족스러운 산속 생활을 그려냈다. 중국 문학 속 과하마는 준마는 아니지만 산야 전원 생활의 좋은 동반자로 표현됐다.
한국 고대문학 속 ‘과하마’
한국 문학에서도 비슷한 이미지가 있다. 고려 문신 이규보는 ‘석로고저평부평, 한기과하탄변행(石路高低平不平, 閑騎果下彈鞭行)’이라고 했다. ‘돌이 깔린 길은 높이가 고르지 않지만 나는 과하마를 타고 한가롭게 거니네’라는 뜻이다. 방회의 시와는 방법은 다르나 같은 묘미가 있고, 과하마의 이미지를 다시 한번 산의 풍경과 연결시켰다. 반면 조선시대의 문인 박제가는 달랐다. 그는 <길주관점병(吉州觀點兵)>에서 ‘전사개기과하마, 장군독차황금갑(戰士皆騎果下馬, 將軍獨借黃金甲)’이라고 하면서 과하마의 군사적 위엄을 드러냈다. 그러나 당시 군마가 과하마일 가능성이 적어 시 속 ‘과하마’와 ‘황금갑’은 전례와 고사를 인용한 것으로 보인다. 필자는 작가가 과하마를 통해 길주의 지방적 특색을 드러낸 것이라고 생각한다. 길주는 조선반도 북서부에 위치해 고대 ‘예’와 가깝기 때문이다.
성호 이익은 과하마를 고증하고 당나라 시인 두보의 시 ‘세마시명금요뇨, 가인루출동교요(細馬時鳴金騕褭, 佳人屢出董嬌饒)’ 속 ‘세마’가 발굽에 힘이 있고 천천히 걷고 달릴 수 있는 말이라고 봤다. 게다가 <후한서>에는 예 땅에서 과하마가 생산되고 중원의 귀족이 이를 부녀자의 탈것으로 삼았는데, 두보의 시에서 ‘가인’과 ‘세마’를 같이 사용한 것은 바로 ‘세마’가 과하마라는 것을 설명한다고 주장했다. 이뿐만 아니라 <설문해자> 중의 ‘요뇨(騕褭)’가 가리키는 것은 고대 신마(神馬)로, 하루에 천 리를 가지만 마르고 작아서 그는 이것이 ‘세마’이고 과하마가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이 밖에 이익은 <설문해자>에서 ‘피(犤)’ 자가 ‘과하우(果下牛)’를 가리키며, 이것은 몸집이 작고 왜소하고 과수 아래를 달릴 수 있는 작은 소라고 했다.
문인 이규경은 이익의 성과를 바탕으로 <과하마우변증설(果下馬牛辯證說)>을 쓰면서, 북송의 문인 범성대(范成大)의 <계해우형지(桂海虞衡志)>에서 과하마는 덕경(德慶) 농수(瀧水)(지금의 광둥성 뤄딩시)에서 품종이 가장 많기로 유명하고 건강하고 오래 뛴다는 기록을 찾아냈다. 조선 후기의 문신 남경의의 <전창위상마설(全昌尉相馬說)>에는 전창위 유정량(1591-1663)의 말의 좋고 나쁨을 가려내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유정량의 좋은 말을 알아보는 혜안을 통해 말 감별 능력을 찬양했고, 동시에 과하마를 잠재력은 있으나 재능을 펼칠 기회가 없는 인재에 비유했다. 전반적인 이야기의 중심이 한유의 <마설(馬說)>과 매우 비슷하다. 그것은 바로 ‘천리마는 흔히 있지만, 백락은 흔하지 않다(千里馬常有, 而伯樂不常有)’는 것이다.
이로써 과하마는 가축으로서 중한 양국에서 주목받은 것은 물론 그것이 가진 대표적인 문화적 의미도 양국 ‘역사의 강’에 면면히 흐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필자는 과하마가 중한 양국의 역사 문화에서 가지는 가치는 보다 많은 안목있는 학자들에 의해 더 발굴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글|위셴룽(喻顯龍), 상하이(上海)외국어대학교 글로벌문명사연구소 전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