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1-20
지난 세기, 일체(一體)와 다원의 개념을 놓고 중국의 두 학자가 논쟁을 벌였다.
한 사람은 구제강(顧頡剛)이다. 1923년, 30세의 쑤저우(蘇州) 청년 구제강은 삼황오제(三皇五帝)를 맹렬히 비판하면서 상고사는 유가(儒家)가 층층이 ‘쌓아 올린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모든 것은 실증적인 방법으로 검증해야 한다면서 ‘민족은 하나에서 출발한다’와 ‘지역은 늘 통일됐다’는 것을 부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고대에는 하나의 민족에 하나의 시조만 있을 뿐이지 여러 민족의 공통된 시조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의 ‘의고론(疑古論)’은 중국 사상계를 뒤흔들어 역사가 와해됐고 ‘중국 정체성’이 무너졌다. 그러나 구제강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이런 새로운 방법만이 2000년 동안 정체된 지식 계보를 재편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신문화운동의 선구자들처럼 참신한 중국을 창조하기 위해 분투했다.
그러나 중국 상고사에 의심을 품은 것은 구제강이 최초가 아니다. 20세기 초, 2차대전 이전 일본의 사학자들은 동양 민족의 시선으로 동아시아 문명의 흥망성쇠, 민족 간 소멸과 발전, 국가의 흥망을 서술했다. 대표적인 인물은 시라토리 구라키치(白鳥庫吉)로 실증 사학 방식으로 요·순·우(堯舜禹)는 존재하지 않았고 후대의 유가가 날조한 ‘우상’이라고 주장했다. 구제강은 시라토리 구라키치의 주장을 받아들여 ‘상고사 타도’를 외쳤다.
그러나 소위 동양사 대가는 학술 혁신을 외치면서 다른 한편으로 ‘종족으로 중국을 이간질하는’ ‘한지십팔성(漢地十八省)’론, ‘장성이북비중국(長城以北非中國)’론, ‘만몽장회비중국(滿蒙藏回非中國)’론, ‘중국무국경(中國無國境)’론, ‘청조비국가(清朝非國家)’론, ‘이민족정복내행복(異民族征服乃幸福)’론과 같은 이론을 만들어냈다. 동양사 대가들은 또한 위진남북조 이후 ‘옛 한인(漢人)’은 쇠락했고, 만주와 몽골 민족이 오만했다고 했다. 일본만이 북방민족의 용맹한 정신과 남방 한인의 정교한 문화의 장점을 결합한 동아시아 문명의 폐단을 구제할 ‘문명의 종점’이라는 것이다. 일본 문화는 중국 문화의 자극으로 성장한 서브 시스템으로 중화 문명을 계승할 자격이 있고, 중화 문명의 중심이 일본으로 옮겨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자 구제강은 정신을 차렸다. ‘9·18 사변’의 포화에 직면하자 동양사학에 기울었던 그는 마침내 학문과 정치의 관계를 깨달았다.
1939년 2월 9일, 구제강은 병환 중에도 <중화 민족은 하나다(中華民族是一個)>라는 글을 발표했다. 그는 ‘민족’이라는 말로 중국의 각 족군(族群)을 정의하는 것에 반대하면서 ‘문화 단체’라는 개념으로 바꿔야 한다고 제안했다. “예부터 중국인은 문화 관념만 있었지 종족 관념이 없었기 때문”이다. 구제강은 이 글에서 ‘국족(國族)’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즉 ‘같은 정부의 통치 하에 있는 인민’은 동일한 국족, 즉 중화 민족이라는 것이다.
<중화 민족은 하나다>가 발표된 후 유명한 토론을 불러 일으켰다. 질문자는 구제강보다 더 젊은 인류학 및 민족학 학자인 페이샤오퉁(費孝通)이었다. 당시 그는 29세로 구제강과 고향이 같았고 영국 유학에서 갓 돌아온 상태였다.
페이샤오퉁은 ‘민족’은 문화, 언어, 체질의 차이에 따라 형성된 집단으로 과학 개념이라고 생각했다. 중국에는 다양한 민족이 존재한다. 이것은 객관적인 사실이므로 정치적 통일을 꾀하기 위해 일부러 각 민족의 경계를 허물 필요는 없다. 그는 “문화, 언어, 체질이 같은 인민은 한 국가에 속할 필요는 없고”, “국가는 하나의 문화와 언어 집단일 필요는 없다”고 강조했다. 현재 민국(民國)에 정치 중심이 여럿이고 중국 역사에도 정권 분립의 시기가 여러 번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주장에 구제강은 병상에서 ‘목에 가시가 걸린 것처럼’ 다시 일어나 <중화민족은 하나다에 대한 재론(續論中華民族是一個)>을 발표하고 중화 민족의 ‘국족성(國族性)’은 충분히 강하며 ‘분열’은 ‘부자연스러운 상황’이라고 반박했다. 분열의 무력이 조금만 약해지면 인민은 자발적으로 분열 상황을 끝낼 것이다. ‘장기적인 분열’이 본질적으로 안정성이 있다면 중국은 일찌감치 사분오열되어 하나의 민족을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선배의 진노에 페이샤오퉁은 대답하지 않고 침묵했다. ‘중화 민족은 도대체 하나인가 여러 개인가’는 결론이 나지 않는 사안이 됐다.
1988년, 78세의 페이샤오퉁은 <중화 민족의 다원 일체 구조(中華民族的多元一體格局)>라는 제목의 장편 연설문을 발표했다. 그는 ‘중화 민족’이라는 자유로운 실체가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는 “중화 민족은 자각적인 민족 실체로 근 100년 동안 중국이 서방 열강에 대항하면서 생겨났다. 그러나 자유로운 민족의 실체는 수천 년 역사 과정을 통해 형성됐다. 그것의 주류는 분산되어 독립적으로 존재한 수많은 민족 단위로 접촉과 혼합, 연결과 융합을 거치고 동시에 분열과 쇠망을 통해 ‘네가 오면 내가 가고, 내가 오면 네가 가며, 내 안에 네가 있고, 네 안에 내가 있는’ 구도를 형성했고 각자 개성을 지닌 다원통일체다”라고 했다.
페이샤오퉁의 ‘다원일체’ 이론은 ‘하나’와 ‘여러 개’ 사이에서 절충·봉합하는 ‘정치적 표현’에 불과하다고 비판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페이샤오퉁은 근본적인 문제는 서양의 민족 개념으로 ‘중국의 민족’을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단순하게 서양에 현존하는 개념 그대로 중국의 사실을 설명해서는 안 된다. 민족은 역사 범주에 속하는 개념이다. 중국 민족의 실질은 중국의 유구한 역사에 의해 결정된다. 서양의 민족 관련 개념을 억지로 적용하면 주장이 일관성을 잃게 된다.”
페이샤오퉁은 또한 말년에 견해를 바꾼 것에 대해 “취푸(曲阜)의 공자 묘지를 빙빙 돌다가 불현듯 공자야말로 다원일체의 질서를 주장한 것이 아닌가? 그런데 그는 중국에서 성공했고 방대한 중화 민족을 형성했다. 중국은 왜 구(舊) 체코슬로바키아와 구 소련처럼 분열되지 않았을까? 그것은 바로 중국인들에게는 중국인의 마음가짐이 있었기 때문이다”고 설명했다.
구제강과 페이샤오퉁의 논쟁은 근대 중국 지식인의 공통된 생각을 반영한다. 즉 서양의 개념으로 중국의 지식 전통을 바꾸려고 했지만, 서양의 경험으로는 자신의 문명을 개괄할 수 없다는 것을 발견했다. 또한 정치에서 독립된 서양의 학문을 갈망했지만 서양의 학문은 정치를 벗어난 적이 없다는 것을 발견했다. 결국 그들은 모두 중화 문명의 모체로 돌아왔다.
이 글은 판웨의 <중국 오호의 화하 진입과 유럽의 바바리안 침입(中國五胡入華與歐洲蠻族入侵)>에서 발췌한 글이다.
글|판웨(潘岳), 역사학 박사이고 중국공산당중앙위원회통일전선사업부(中央統戰部) 부부장, 중국 국가민족사무위원회 주임·당조(黨組) 서기이며, 중국공산당 제20기 중앙위원회 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