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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어디에서 왔을까?


2022-12-27      글|쉬하오(徐豪)

산시성 타오쓰 유적에 있는 관상대. 이곳이 최초 중국의 위치라고 하는 전문가도 있다. 사진/XINHUA


중화 민족의 ‘기원’과 ‘뿌리’는 어디일까? ‘중국’은 어디에서 왔을까? 새로운 세기 들어 시작된 중화문명탐원공정(中華文明探源工程)은 중요한 고고학 발견들과 여러 학과의 종합적인 연구를 통해 ‘5000년 중화 문명’이 사실이었음을 증명했다. 고고학이 과거 미지의 중국을 재건했다고 할 수 있다.


‘만천성두’에서 ‘월명성희’까지

여러 고고학 탐원공정에서 중국이 100만년 인류사와 1만년 문화사, 5000여 년의 문명사를 지닌 것이 증명됐다.


중화 문명의 기원에 대해 고고학자 쑤빙치(蘇秉琦)는 ‘만천성두(滿天星斗)’라고 표현했다. 신석기시대 중화 대지에는 수준이 비슷한 여러 문명이 존재해 마치 하늘에 별무리가 반짝이는 것 같았다. 고고학자 옌원밍(嚴文明)은 ‘중판화타(重瓣花朵, 겹꽃잎)’ 이론을 제시하며 중화 문명의 기원은 ‘핵심이 있으면서 다양했다’고 말했다.


“사실, 약 8000년 전 중화 대지의 각 지역은 가로로 연결돼 있었다.” 중화문명탐원공정 1~5기 수석 전문가, 중국 고고학회 이사장인 왕웨이(王巍)는 중화 문명의 형성은 다원 일체의 역사 과정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옥기(玉器)를 예로 들었다. 네이멍구(內蒙古)자치구 츠펑(赤峰)시 싱룽와(興隆窪) 유적에서 출토된 8000년 전 옥결(玉玦), 옥도끼, 옥자귀, 옥패 등을 보면 그 당시에 이미 옥이 아름답다는 관념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금으로부터 7000년 전의 저장(浙江)성 허무두(河姆渡) 유적에서도 싱룽와 유적에서 출토된 것과 비슷한 옥결, 옥 펜던트 등이 출토됐다. 이는 두 지역이 멀리 떨어져 있어도 문화가 직간접적으로 연결돼 있었다는 보여준다.


왕웨이는 고고학 발견이 증명한대로 5800년 전 랴오허(遼河) 유역, 황허(黃河) 유역, 창장(長江) 중류 등 지역에서 문명 기원의 징조가 나타났다고 말했다. 5500년 전부터 중화 대지의 각 지역이 지역 문명 단계로 진입해 다양한 문명이 나타났고 상호 교류와 학습을 통해 4300년 전후로 중원 지역을 핵심으로 한 일체화 구도가 형성됐으며 이는 수천 년 동안 이어졌다.


이 과정을 ‘만천성두’에서 ‘월명성희(月明星稀)’까지라고 표현하는 학자도 있다.


“5500년 전 전후로 각 지역의 문명화가 가속화되면서 공통적인 것이 많이 나타났다. 예를 들어 용(龍) 관념이다. 황허 중류에서 조개껍데기 무더기로 용을 형상화 한 것이 발견됐고 같은 시기 창장 하류에서 옥룡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많은 분야에서 공통적인 요소가 늘어나면서 ‘중화 문화권’이 형성됐다.” 왕웨이의 설명이다.


5500년 전, 황허 중류의 양사오(仰韶) 문화 말기의 채도(彩陶)가 주변 지역으로 확산돼 창장 유역, 황허 유역, 랴오허 유역이 중원 문명의 영향을 받기 시작했다. 왕웨이는 약 4300년 전 창장 중하류의 문명은 상대적으로 쇠락하기 시작했고 중원 지역이 계속 궐기했다며 “산시(山西)성 샹펀(襄汾)현 타오쓰(陶寺) 유적(기원전 약 2600~2000년)의 경우 각지의 다양한 문화 요소가 모였다고 볼 수 있다. 황허 하류의 도예기와 관곽(棺椁), 창장 하류 량주(良渚) 문화의 옥종(玉琮), 옥벽(玉璧)이 있고, 뚜렷한 특징을 형성했다”고 말했다.


하(夏) 왕조 시기까지도(기원전 약 2070~1600년) 중원은 주변 지역의 선진 요소를 계속 흡수하고 있었다. 하 왕조 중후기, 허난(河南)성 뤄샹(洛陽)시 옌스(偃師)구 얼리터우(二里頭) 유적(기원전 약 1900~1600년)을 중심으로 일련의 예의(禮儀)제도가 형성됐다. 얼리터우의 옥예기 청동용기 생산 제작 기술이 주변지역으로 빠르게 전파됐다. “얼리터우의 옥장(玉璋), 아장(牙璋)이 중국 남동 연해, 서북지역, 동북지역 더 나아가 싼싱두이(三星堆)를 통해 베트남 북부까지 퍼졌다. 중원 문명은 또 한 번 주변지역에 확산됐고, 이번의 확산은 예기와 예의 제도였다. 이는 중원 왕조가 문명 과정을 이끌었다는 중요한 단서다.” 왕웨이의 말이다.


‘전설’과 ‘신사(信史)’

‘대우치수(大禹治水)’ 전설에서 대우에 관한 기록은 믿을 수 있는 정확한 사적인가 날조된 허구인가? 선진(先秦)시대 고 문헌과 주나라 청동기 명문에 모두 대우에 관한 기록이 있지만 대우의 치수가 진짜인지를 증명할 수 있는 직접적인 증거가 없어 대우가 하를 건립했음은 더더욱 증명할 수 없었다. ‘하상주단대공정(夏商周斷代工程)’의 수석과학자, 베이징(北京)대학 교수인 리보첸(李伯謙)은 선진시대 문헌과 <사기·하본기(史記·夏本紀)>에서 대우의 사적에 관한 기록을 5개 내용으로 정리했다. 첫째 치수, 둘째 제후들을 도산(塗山)에 불러 모은 것, 셋째 수도를 양성(陽城)으로 정한 것, 넷째 구주(九州)로 나눈 것, 다섯째 남방의 삼묘(三苗) 부락을 정벌한 것이다.


2006년부터 고고학자들은 안후이(安徽)성 벙부(蚌埠) 위후이(禹會)촌의 ‘우쉬(禹墟)’를 대상으로 발굴 작업을 진행해 2000여 ㎡ 규모의 대형 제대 기반을 발견했다. 이는 지금으로부터 4140년경 전에 인공으로 조성한 대규모 집회 장소로 대우가 제후들을 불러모으기에 적합했다. 제대 기반은 50m에 달하고 ‘일(一)’ 자 형태로 기둥을 세우는 구멍 35개가 줄지어 있는데, 학자들은 이것이 제후들이 각자의 깃발을 꽂는 구멍이라고 봤다. “대우치수에서 제후를 도산에 불러모은다는 ‘회제후어도산(會諸侯於塗山)’ 전설은 사실일 것이다.” 리보첸의 말이다.



저장성 량주 유적에서 출토된 옥패 장식. 투조와 음선각 기법으로 신수 도안을 표현했다. 사진/XINHUA


하나라가 정말 존재했는지 여부는 <상서(尚書)>, <고본죽서기년(古本竹書紀年)>, <사기> 등 기록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지만 고고학적 증명이 필요하다.


“얼리터우 유적 발견으로 ‘하’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다.” 왕웨이는 “얼리터우 유적을 봤을 때 중앙을 선택해 수도를 건설하고, 중앙을 선택해 궁궐을 지으며, 중축선 개념이 형성됐고, 용 숭배가 있었으며, 청동예기와 옥예기 등 예의 제도가 주변 지역까지 강력하게 영향을 미쳐 중국 역사상 첫 번째 ‘왕조의 기상’을 형성한”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고고학이 단순히 고 문헌 기록과 전설을 증명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량주 유적은 고고학이 존재를 발견한 문명이다.


중화문명탐원공정은 제일 중요한 지역적이고 중심적 성격의 유적 4개를 확정했다. 저장성 량주 유적, 산시(陜西)성 스마오(石峁) 유적, 산시(山西)성 타오쓰 유적, 허난성 얼리터우 유적이다. 이 가운데 량주 유적은 중화 문명 5000년 역사를 증명하는 데 가장 직접적인 근거를 제공했다.


약 5300~4300년 전의 량주 고성 유적은 규모가 방대하고 보존 유형이 복잡하며 내용이 풍부하다. 성터와 주위를 둘러싼 수리시설, 등급별 묘지, 량주 옥기로 대표되는 출토 유물은 인류 문명 요소를 갖췄다. 2019년 7월 6일, 량주 고성 유적이 세계문화유산 명단에 등재됐다. 세계유산위원회는 “량주 고성 유적은 5000여 년 전 중국의 위대한 벼농사 문명의 성과를 대표하는 걸출한 도시 문명”이라고 했다.


그러나 역사서에는 ‘량주 고국(良渚古國)’에 관한 기록이 없지만, 80여 년 동안의 고고학 발굴을 통해 량주 고국의 면모가 서서히 드러났다.


2019년 8월 27일, 허난성 궁이시 허뤄진의 솽화이수 유적 발굴 현장 사진/XINHUA


‘최초의 중국’은 어디인가?

역사서 기록에 따르면 하나라가 중국 첫 번째 중앙 왕조로 ‘최초의 중국’이다. 그러나 량주 유적, 타오쓰 유적, 스마오 유적, 허뤄(河洛) 고국(古國) 등 고고학 성과가 나타나면서 사람들의 인식이 계속 업그레이드됐다.


쉬훙(許宏) 중국사회과학원 고고연구소 연구원, 얼리터우 고고팀 팀장은 얼리터우 문명이 왕조 시대를 열었기 때문에 ‘최초의 중국’이라고 말했다. 그는 <최초의 중국(最早的中國)>이라는 책에서 룽산(龍山) 문화 시기 드넓은 중원이 ‘각축’의 장이 됐고 결국 얼리터우로 대표되는 왕권 국가를 탄생시켰다고 주장했다.


반면 타오쓰가 ‘최초의 중국’이라고 주장하는 허누(何駑) 중국사회과학원 고고연구소 연구원, 산시업무팀 팀장은 ‘중국’이라는 말의 최초의 함의는 ‘규표로 측정한 땅의 중심 또는 중심 토지에 세워진 도시와 국가’라고 말했다. 그는 타오쓰 중기 고분에서 출토된 해 그림자를 측량하는 규척이 바로 땅의 중심인 ‘지중’을 대표한다고 말했다. 연도 측정 데이터에 따르면 최소 4000여 년 전 사람들이 생각한 ‘지중’은 타오쓰가 있는 진남(晉南) 일대였다고 할 수 있다.


산시성 샹펀현 타오쓰 유적은 기원전 중국에서 ‘도성 요소를 가장 잘 갖춘’ 성터다. 이곳에서 현존하는 세계 최초의 관상대 유적이 발견됐고 용반(龍盤), 주서편호(朱書扁壺), 타고(鼉鼓), 석경, 옥수면(玉獸面)과 중국 최초의 ‘동기군(銅器群)’ 등 ‘국보’가 출토됐다. 타오쓰가 문헌에서 말하는 ‘요도평양(堯都平陽)’의 증거라고 믿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자오후이(趙輝) 중국 고고학회 부이사장, 베이징대학 교수는 최초의 ‘국가’는 중원이 아닌 량주에 있었다며 “수많은 고고학 발견으로 봤을 때 량주는 국가가 갖춰야 할 성숙한 조건을 가졌다”고 말했다.


흥미로운 점은 5000여 년 전 중화 문명의 ‘만천성두’ 시기에 이후 ‘왕조의 기상’을 이끈 중원 지역은 조용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이를 ‘중원 지역 문명 저지대 현상’이라고 하는 학자도 있다.


그러나 2020년 발표된 허난성 궁이(鞏義)시 솽화이수(雙槐樹) 유적 발굴 성과가 이 ‘저지대 현상’을 바꿔 놓았다. ‘허뤄 고국’이라고 명명된, 약 5300년 전 유적에서 3중 대형 환호(環壕), 폐쇄식으로 죽 늘어선 형태의 대규모 중심 주거지, 땅을 다져 만든 제대 3곳 등 유적이 발견됐고 유물도 다량 출토됐다. 리보첸은 “솽화이수 유적이 황제(黃帝) 시대의 도읍지라는 것을 배제하지 않고도 적어도 초기 중국이 형성되는 단계였다”고 말했다.


“사실 개인적으로 나는 어디가 ‘최초의 중국’이냐는 논쟁을 인정하는 편이 아니다.” 왕웨이는 중요한 것은 5500년 전 형성되기 시작한 초기 ‘중화 문화권’이고 문화 공동체로 이후 중국의 축소판이지 ‘최초의 그곳’이 도대체 어디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왕닝위안(王寧遠) 저장성 문물고고연구소 연구원은 ‘량주가 최초의 중국이다’라는 평론에서 왕웨이와 비슷한 관점을 내놓았다. “일반 사람들은 고고학에서 발견한 ‘최초’를 진짜 역사에서의 ‘최초’라고 받아들인다. 그러나 5000년 전 중국에는 량주 같은 지역 국가가 많았고 그 시기는 백화제방(百花齊放, 갖가지 학문·예술이 함께 성하다)이었다.”


‘중원 각축’과 국가의 개념

4300년 전부터 중원 문명이 ‘불쑥 나타났고’, 한때 눈부시게 반짝이던 량주 문명이 쇠퇴기에 들어선 것이 고고학으로 발견되었다.


왕웨이는 중원 문명의 궐기는 종합적인 요소가 작용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대내적으로 중원 문명은 다른 지역의 문화를 포용하고 흡수했고, 외래 문화도 장점은 받아들이고 단점은 보충하면서 발전을 거듭했다고 말했다. 서아시아의 야금술을 받아들인 것이 한 예다. 또한 기후와 지리 요건도 있다. “황허 중류에는 다양한 지형이 있어 조, 기장, 벼, 밀, 콩 같은 곡물을 심기에 적합했다. 때문에 농업이 발전할 수 있었다. 그러나 4000여 년 전 큰 홍수로 농업이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고 거대한 사회를 지탱하기 어려워졌다.”


지금으로부터 3800년 전 전후로 타오쓰 문화, 스마오 문화 등이 쇠락하고 하나라 중·말기 도성의 얼리터우 문화가 발전해 그 정권이 허뤄가 합류하는 지점에 중국의 첫 번째 왕조를 세웠다고 여겨진다. 이때부터 중원 지역은 ‘천하의 중심’으로 여겨졌고 이후 수천 년 동안 역대 왕권이 반드시 쟁취해야 할 지역이 됐다.


왜 ‘중원을 쟁취해야 하는가’에 대해 쉬훙(許宏)은 “중원 지역은 자원이 집중됐고 인구가 조밀했으며 물류와 정보 네트워크의 중심이었고 현지의 경제, 문화, 정치, 과학기술이 상대적으로 발전했고 성숙했다”고 설명했다.


서주(西周) 초기 청동기 하존(何尊) 명문에 ‘택자중국(宅茲中國)’이라는 글자가 있다. 이는 현존하는 문물 중 제일 처음으로 ‘중국’을 언급한 문자 자료다. 여기서 ‘중국’이란 이뤄(伊洛)가 합류하는 뤄양(洛陽) 분지로 주나라 사람들의 지리와 정치 관념 속 ‘천하’의 중심 지역이었다.


“‘택자중국’은 서주의 명문이지만 서주 전에 이런 개념이 이미 형성돼 있었기 때문에 이 글자를 새긴 것이다.” 왕웨이는 “요, 순 시대부터 모호하게나마 천하관이 있었을 것이다. 이후의 ‘우공구주(禹貢九州)’는 천하관의 초기 형태일 것이다. 하나라 후기에 이르러 영향력 범위가 최소 허난 전역, 산시 남부에 이르렀다. 우리는 이 시기에 초보적인 천하관이 형성됐을 것이라고 본다. 상나라를 거치고 다시 서주에 이르러 중국인의 천하관이 기본적으로 고정됐다”고 말했다.


“사람들은 중국의 전체적인 지형을 서북을 기대고 남동을 향한 큰 의자에 비유한다. ‘의자 안쪽’의 산지 고원과 평원 구릉이 만나는 곳이 바로 다른 문화가 부딪치는 합류점이다. 고도로 발달한 문명은 이런 부딪침과 합류의 결정체다. 최초의 ‘중국’도 이곳에서 탄생했다.” 쉬훙의 말이다.


글|쉬하오(徐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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