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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한국의 찬란한 원림문화


2019-07-25      

쑤저우원림 일부 모습 사진/CFB

동아시아에서 역사적으로 오랫동안 폭넓은 교류와 협력을 이어온 중국과 한국은 지리적으로 가깝고 기후대가 비슷하다. 또 문화적·정서적 유사점이 많아 예술 면에서도 서양과 뚜렷하게 구별되는 고유의 특징이 많다. 원림(園林·정원) 예술 역시 마찬가지이다.

중국 원림 예술의 역사
기나긴 역사를 지닌 중국 원림 예술의 기원은 은주(殷周)시기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원림은 식물 재배나 취미용 수렵을 위한 짐승의 방목지로서 자연 그대로의 원림 형태를 띠고 있었다. 그러다 춘추전국 시대에 이르러 점차 인공적인 요소가 가미됐고, 진한(秦漢) 시기에는 왕과 제후들이 감상용 원림을 조성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예가 한무제의 ‘상림원(上林苑)’이다. 위진(魏晉)시기에는 방대한 조방형 원림에서 점차 작고 아기자기한 원림이 등장하기 시작하는데, 대표적인 예로 서진(西晉)의 대부호 석숭(石崇)이 만든 ‘금곡원(金谷園)’이 있다. 금곡원은 자연의 지형을 그대로 살리고 인공 연못과 개울을 판 뒤 곳곳에 정자와 누각을 지은 수십 킬로미터 면적의 정원이다. 건축물을 남양(南洋·중국 남쪽의 연해지역)에서 사들인 진주와 마노, 상아 등으로 장식해 화려함을 자랑한다.

원림은 당송(唐宋) 시기로 들어서며 한층 더 발전을 거듭한다. 규격과 제도가 만들어지기 시작하고 개인 소유의 원림이 크게 늘어나면서 왕이나 귀족들뿐 아니라 수많은 문인과 묵객들도 개성 있는 각자의 원림을 소유하기 시작했다. 북송 초기 기록에 남아 있는 낙양 지역의 원림만 19개에 달했다. 이 시기에는 원림 조성 기술과 예술성 면에서도 질적인 발전을 거듭했다. 석가산의 중첩 기술 역시 사실상 송나라 때부터 본격적으로 발달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예로 시후(西湖)의 기본적인 경관은 남송 시기에 그 틀을 이루었기 때문에 시후를 두고 ‘중국인의 손에서 탄생한 대도시형 자연원림’이라 평가하는 학자들도 있다. 명청(明清)시기에는 마침내 기술이 안정화되면서 원명원(圓明園), 이화원(頤和園), 쑤저우원림(蘇州園林) 등 나라 안팎으로 이름을 떨친 원림들이 잇따라 등장했다.

서울 경복궁 야경  사진/ 한국관광공사 제공

중국의 영향을 받은 한국의 원림
한국은 중국의 원림 기술과 풍격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삼국시대의 원림은 대개 중국 황실의 ‘일지삼산(一池三山·하나의 연못 안에 산 같은 섬 3개를 만드는 형태)’을 모방하였다. 일지삼산이란 신선 세계를 향한 고대 중국인들의 상상적 요소가 반영된 형태이다. ‘일지’는 태액지(太液池)라는 연못을 가리키고 ‘삼산’은 신화 속 동해(東海)에 신선이 기거한다는 세 개의 산인 봉래(蓬萊), 방장(方丈), 영주(瀛洲)를 이른다. 제왕들은 자신이 신선처럼 불로장생하고 자연과 벗하며 살기를 바랐다. <삼국사기>에는 백제 무왕이 634년 왕실의 여가 생활을 위한 인공 연못을 조성하며 “…물 가운데 섬들을 쌓아 방장선산을 흉내내었다(水中築島嶼, 擬方丈仙山)”라는 문구가 등장한다.

더욱 대표적인 사례로는 경주에 위치한 신라 안압지를 들 수 있다. 동서로 200m, 남북으로 200m 이상 뻗어있는 동그란 형태의 안압지는 전체 면적이 5000m2가 넘는다. 고고학자들은 다양한 고증을 통해 안압지가 신라 문무왕 14년(AD 674년)때 정원 안에 인공 연못을 파고 봉래, 방장, 영주라는 세 개의 인공 섬을 조성하는 한편 연못의 동쪽과 북쪽에 중국의 ‘무산십이봉(巫山十二峰)’을 상징하는 12개의 작은 구릉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안압지는 1975년 일부 보수를 거친 뒤에도 여전히 일지삼산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일지삼산은 고려왕조와 조선왕조 때도 계속해서 활용됐다. 경복궁 경회루 가운데에는 큰 것 하나, 작은 것 두 개로 이뤄진 총 세 개의 인공섬이 있고, 창덕궁 비원의 네모난 연못에도 신선이 사는 봉래섬을 상징하는 작은 인공섬이 있다. ‘춘향전’의 배경인 광한루(전라북도 남원에 위치)의 연못에는 삼산을 상징하는 인공섬이 있다. 조선왕조 말기 유학자 정약용이 지은 다산초당(전라남도 강진군에 위치)에도 네모난 연못을 파고 역시 삼산을 상징하는 세 개의 바위를 두었다. 무엇보다 이런 네모난 돌과 둥근 섬을 조성하는 방식에는 ‘천원지방(天圓地方·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이라는 중국의 전통적인 우주관이 반영되어 있다.

중국 고대 원림의 ‘유상곡수(流觴曲水)’ 형태 역시 고대 한국 원림에서 차용한 바 있다. 유상곡수란 원래 삼짇날(음력 3월 초사흗날) 정원에서 연회를 열던 풍습에서 비롯됐다. 이는 사람들이 곡수(曲水)가 흐르는 물가에서 특수 제작한 술잔(대부분 가벼운 칠기)을 띄워놓고, 술잔이 물길을 따라 천천히 떠내려 온 뒤 멈추면 그 앞에 있는 사람이 술을 마시는 방식이었다. 사람들은 흥이 다할 때까지 계속해서 술잔을 물에 띄웠다. 원림에 있는 유상곡수는 이처럼 술맛과 흥을 돋우기 위해 만든 구불구불한 인공 수로였다.

중국 원림의 유상곡수 형태는 아무리 늦어도 춘추전국 시기에 그 틀이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동진(東晉) 시기 왕희지(王羲之)의 <난정집서(蘭亭集序)(난정은 현재 저장(浙江)성 사오싱(紹興)시에 있는 진(晉)나라 때의 원림을 뜻한다)에도 이러한 형태의 원림에서 술을 마셨다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오랜 세월을 거치며 초기 유상곡수의 흔적은 이미 남아있지 않다.

현재 동아시아 지역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유상곡수 유적지는 신라 포석정이다. 신라 헌강왕(AD 875~885)때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포석정은 유상곡수의 형태가 중국의 전통적인 방식만큼 복잡하지는 않지만, 도랑의 석재가 매우 정교하고 물이 흘러 들어가는 입구에 돌거북이를 만들어 입에서 물을 뿜어내는 듯한 형태로 이뤄져 있다. 원래는 중국의 유상곡수 위에 정자를 짓는 관례를 따라 곡수 인근에 포석정이 있었는데, 안타깝게도 고려 시기에 소실되고 말았다.

고려는 중국 송나라와 교류가 활발했다. 송나라는 중국 문인 사대부들의 문화가 꽃을 피우고 사회·경제적으로 급속한 발전이 이뤄지던 시기였다. 특히 이 시기에는 원림문화를 포함한 여러 물질적·정신적 문물이 고려로 전해졌다.

당시 고려에서 지은 원림들도 송나라 때 새로운 원림 기술과 풍격이 다수 응용되며 누(樓), 대(臺), 각(閣), 청(廳), 헌(軒) 등의 건축물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또 당시 송나라에서 유행하던 ‘첩석위산(疊石爲山)’ 기술을 받아들이면서 한국의 원림도 건축물과 석가산, 연못, 식물, 바위 등의 공간적 배치를 중요하게 고려하기 시작했다. 고려의 문인 김인존(金仁存)은 저서 <청연각연기(淸燕閣宴記)>에서 궁정에 산과 돌을 중첩시켜 쌓는 기법에 대해 자세한 기록을 남긴 바 있다.

<고려사(高麗史)>에는 고려가 송나라로부터 공작과 앵무 등 갖가지 진귀한 짐승, 꽃과 나무를 들여와 원림을 꾸미는 데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 명종 때는 중국의 ‘소상팔경(潇湘八景)’에서 영감을 얻어 도읍지에 ‘송도팔경(松都八景)’을 두고 이를 배경으로 누각과 정자를 짓기도 했다. 이 시기에는 원림 문화가 왕실과 귀족들 사이에서 이미 널리 유행하고 있었고 고위 관리나 세도가들도 개인 원림을 크게 짓기 시작했다. 그 기술이 궁정과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고 선종(禪宗)의 청정함과 도가(道家)의 무위(無為)를 강조하는 유유자적이 돋보이도록 설계되었다.

한편, 이 시기에는 고려의 수많은 불교사원에서도 선종 원림을 짓기 시작했다. 그 중 강원도 청평리에 위치한 문수선원(文殊禪院)이 비교적 잘 알려져 있다. 선원은 자연 계곡물을 배경으로 약간의 인공적 변화를 주었고 그 주변에 누각을 짓거나 바위를 이용해 석가산을 쌓았다.

조선왕조 때의 궁정 원림도 고려시대의 풍격을 그대로 이어받았지만 유교사상의 영향이 다소 가미되었다. 세조는 자연을 감상하기 위해 향원지(香遠池)와 향원정(香遠亭)을 지었다. ‘향원’이라는 말은 북송 시대 성리학의 대가 주돈이(周敦頤)의 <애련설(愛蓮說)>에 나오는 ‘향원익청(香遠益清)’에서 비롯되었다. 숙종이 창덕궁 안에 지은 ‘애련지’ 역시 <애련설>에서 따온 말이다. 경복궁 교태전 후원인 아미산원(峨眉山園)은 중국의 아미산을 주제로 지은 작은 원림으로, 기다란 돌을 겹쳐 쌓아 화단을 조성함으로써 아미산의 절경을 표현하고 기암괴석과 돌거북이 등 상서로운 짐승 조각을 통해 아미산의 신력(神力)을 빌려 마음 속 소망을 이루고자 했다.

그 후 유학이 발달하고 사대부 계층의 지위 상승과 계속되는 왕권 약화로 조선왕조의 원림 조성 문화는 점차 민간으로 퍼지게 되었고, 사대부들의 저택 안에 원림이 조성되기 시작했다. 또 건축물과 원림을 설계할 때 주자학의 세계관이 널리 반영되기 시작했다. 특히 조선시대 주자학의 대가 송시열은 주자학의 철학을 담아 여산(礪山) 죽림서원(竹林書院) 우측에 위치한 팔괘정(八卦亭)을 지었다. 조선 후기의 문신 김수증(金壽增)은 태극팔괘도(太極八卦圖)와 <주역(周易)> 괘상(卦象)에 따라 삼일정(三一亭)을 짓고 이를 성리학을 축소한 작은 세계로 삼았다. 조선 후기의 문신 박태보(朴泰輔)는 <하도·낙서(河圖·洛書)>에 따라 거주지를 설계하였는데, 이는 주자학의 고향인 중국에서도 전례를 찾기 힘든 일이다.

경주 동궁과 월지  사진/ 한국관광공사 제공

‘기교 없는 기교’ 한국의 원림예술
고대 한국의 원림 예술은 중국 전통 원림의 풍격과 특징을 상당 부분 받아들였지만 자국의 지리·문화·풍습·신앙 등에 맞춰 진화를 거듭했고 일찍이 원림 기술을 일본에 전해주기도 하였다. <일본서기(日本書紀)>에 따르면 3세기에 말에서 4세기 초 일본 오진천황(應神天皇)이 “모든 한인(韓人)들에게 못을 만들라 명하고, 이에 따라 못의 이름을 한인지(韓人池)라고 불렀다(領諸韓人等作池, 因以名池號韓人池)”라고 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와 관련해 <고사기(古事记)>에도 “신라 사람이 도래해와서......제방의 저수지로 백제지(百濟池)를 만들었다(亦新羅人參渡來……爲役之堤池而作百濟池)”라는 기록이 있다.

중국과 한국은 모두 자연에 대한 존중을 바탕으로 자연을 배경으로 한 터에 정자와 누각을 지어 인공 건축물과 자연 환경이 조화를 이루도록 했다. 양국의 원림 설계 철학과 예술적 풍격에는 유·불·도 정신이 담겨 있으며, 청정·무위·천인합일(天人合一)·자연과의 조화와 공존·융화 등을 추구한다. 이는 자연과 더욱 가까워지고 자연으로 돌아가는 삶을 영위하고자 함이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한국의 전통 원림 예술은 고려시대 이후 점점 개인적 차원에서 벗어나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한국의 전통적인 아름다움을 품은 예술로서 발전하기 시작했다.

한국의 학자들은 대부분 한국 특유의 원림 기교를 ‘기교 없는 기교’라 평가한다. 즉, 원림 경관이 자연 속 산수를 중심으로 인위적인 색채를 빼거나 극히 줄였다는 것이다. 심지어 아무런 장식을 하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재료를 건축물에 그대로 장착하며(결이 불규칙적인 기둥이나 대들보 등) 자연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살리기 위해 애쓰기도 했다. 중국 원림 예술이 상대적으로 인간의 주관에 따른 자연의 개조를 강조하는 데 반해, 한국의 고대 원림 예술은 자연 앞에 겸손해지는 인간의 모습을 부각시키는 모습인 것이다. 중국 전통 원림에 등장하는 자연은 고도로 예술화된 자연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자연에 대한 인식을 예술적 형태로 표현한 것이다. 천지자연을 축소해 놓은 듯한 원림을 통해 제한된 공간 안에서 자신이 이해한 자연을 재현해 놓았다. 그러나 한국의 전통 원림은 자연 그대로의 경관을 원림에 그대로 옮겨 놓았다. 원림 예술을 설계할 때도 기존 산수경관 사이에 약간의 변화를 주거나 조각의 흔적을 최대한 적게 남겨 꾸밈없는 순수함을 더했다.

예를 들어 한국의 원림은 중국 원림처럼 유랑(游廊·긴 복도)을 사용하는 대신 인공적인 경관을 최대한 배제했다. 한국 원림의 보행로는 중국 원림처럼 형태가 다양하지 않고 단조로운 편이다. 조선왕조의 경복궁은 대체적으로 규칙이 통일되어 있지만 중국 고대 왕궁처럼 하나의 축(軸)이 있는 대신 산세에 따른 자유로운 배치로 궁정의 각 부분마다 독립된 공간이 형성되도록 설계되어 있다. 창덕궁 비원 역시 자연 지형과 식생을 중심으로 인공적 개조가 거의 개입되지 않았고, 산과 물의 자연스러운 흐름에 따라 정자와 누각을 지었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석가산을 넓게 쌓던 형태는 점차 사라지고 대신 자연괴석이 널리 활용되기 시작했다. 조선왕조 원림의 바위를 보면 괴석을 돌화분(石盆) 위에 심은 점이 가장 눈에 띈다. 이들은 하나하나 독립된 원림 벽의 전면이나 화계(花階·꽃계단) 사이에 놓여 있고, 바위는 항상 촉촉히 젖어 있도록 수시로 물을 주기 때문에 표면에 이끼가 자라 자연의 멋을 더한다. 이런 모습은 조선 후기의 문신 서유구(徐有榘)가 지은 <원림십육지(林園十六誌)>에도 기록이 남아 있다.

한국 전통 원림의 괴석은 중국 전통 원림의 천축석(天竺石), 태호석(太湖石)과 다소 차이가 있다. 한국의 경우 화강암이 많고 태호석처럼 구멍이 나거나 투각(透刻)되어 있지 않다. 조선의 선비들은 투각되거나 구멍이 뚫린 바위는 감상적 가치가 떨어진다고 여겼다. 낙선재(樂善齋) 화계, 창경궁과 경복궁 아미산 정원에는 당시 감상용으로 쓰였던 괴석들이 남아 있다.

조선왕조 후기로 접어들며 많은 양반가들은 뜰 안에 감상을 위한 기암괴석을 들여놓기 시작했다. 조선시대 문인 양산보(梁山甫, 1503~1557년)는 조광조의 제자로서, 훗날 1519년 기묘사화로 인해 낙향하게 된다. 양산보는 자신과 비슷한 처지를 겪었던 도연명, 주돈의 등 선조들에 대한 존경심을 표현하기 위해 소쇄원(瀟灑園)(전남 담양군에 위치)을 지었다. 소쇄원은 조선시대 규모가 가장 크고 가장 이름난 별장 원림이자 자연산수의 경관을 잘 살린 대표적인 원림 중 하나다. 송시열이 직접 제명(題名)을 하여 조선왕조 말기 소쇄원의 이름이 크게 알려지기도 했다. 전체 장원(莊園)의 모습은 벽으로 둘러싸여 있으나 내부는 탁 트인 자연을 느낄 수 있다. 졸졸 흐르는 개울물을 중심으로 양쪽에는 몇몇 누각과 돌다리, 띠풀로 이은 정자 등이 있다. 건축물들은 서로 유기적인 연결고리 없이 감상에 필요한 위치에 따라 지어졌기 때문에 인공적인 요소가 덜 느껴진다.

즉, 전통적인 한국 원림은 자연 그대로의 지형과 지모, 개울과 식물을 최대한 활용하고 인공 건축물과 식물의 배치, 지형의 개조는 최소화하거나 보완하는 방식으로 이뤄져 중국 전통 원림의 정교한 인공 조각의 미와는 대조를 이룬다고 할 수 있다. 한국 전통 원림의 사상을 가장 잘 나타내는 것으로는 고려시대의 문인 이규보(李奎報)가 설계한 사륜정(四輪亭)이 있다. 그는 ‘사륜정기(四輪亭記)’라는 글에서 사륜정을 만든 의도와 과정에 대해 설명했다. ‘사륜정’이란 사륜차를 의미한다. 사륜차를 타고 가는 곳 중에서 감상할 가치가 있는 경관이 있으면 차를 멈추고 관상할 수 있는데, 그곳이 바로 원림이라는 것이다. 사륜차에는 현악기, 베개, 방석, 술병, 안주, 장기판 등도 갖추고 있어 그야말로 자유로운 삶을 만끽할 수 있는 공간이다.

양국의 고대 원림 문화의 교류와 계승은 소중한 문화 교류의 일면을 보여준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은 연설을 통해 “꽃 한송이가 피었다고 봄이 온 것이 아니다. 수많은 꽃이 함께 피어날 때에야 비로소 봄이 가득하다”는 점을 여러 차례 강조했다.

앞으로 양국 역시 전 세계 수많은 문명의 성과를 받아들이고문화적 소통과 문명 간 대화를 지속하여, 양국의 전통 원림이 더 이상 역사적 문물이나 문화적 명소에만 머무르지 않고 양국민과 세계인들의 일상 속으로 들어가 인류 문명에 찬란한 빛을 더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해본다.


글|위셴룽(喻顯龍), 베이징대학교 국제관계대학 국제관계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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