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4-25
다시 새봄이 찾아와 온 천지에 꽃이 가득 피었다. 봄을 반기듯 피어난 살구꽃의 하얀빛은 푸른 옥과 같고 붉은 빛은 아침 노을과 같아 상춘객들의 큰 사랑을 받는다.
중국의 살구꽃 문화
살구꽃 원산지는 중국 전 지역에 넓게 분포돼 있는데 특히 북방 지역에서 많이 발견된다. 중국에서 살구꽃을 재배한 역사는 매우 오래됐으며 2천여 년 전의 <관자(管子)>에 이미 관련 기록이 있다. 공자가 제자들을 가르쳤던 살구나무가 무성해 그곳을 ‘행단(杏壇)’이라고 한다. 여기에서 유래돼 오늘날 행단은 학교나 강당을 지칭하는 등 학문을 닦는 곳을 일컫는다. 당(唐)·송(宋) 시대에 이르러 살구꽃 재배는 보편화됐다. 당나라 때 장안성(長安城) 대안탑(大雁塔) 일대에는 살구꽃이 가득한 살구원(杏園)이 있었고 과거에 급제한 진사들이 살구원을 방문하고 축하 행사를 열었는데 그중 하나가 ‘탐화연(探花宴)’이다. 진사 급제자 중 젊고 잘생긴 두 명을 탐화사로 뽑아 길을 따라 꽃을 따고 시를 짓게 한 뒤, 그 꽃으로 장원을 맞이하는 것이다. 이 행사는 당나라 말기까지 계속됐다. 당나라 멸망 후 살구원 행사는 더 이상 진행되지 않았지만 ‘탐화’라는 단어는 남아 과거에서 3등으로 급제한 사람을 지칭하게 됐다. 남송 시대 봄날의 임안성(臨安城), 지금의 저장(浙江)성 항저우(杭州)시에는 주민들이 감상하고 몸에 장식할 수 있도록 살구꽃을 전문으로 판매하는 상인도 있었다. 중국 문화에서 살구꽃은 봄 하면 떠올리는 상징적 이미지로 자리 잡았다.
살구꽃은 ‘중의학의 꽃’이라고도 한다. 자양과 미용에 효능이 있고, 살구 열매와 씨의 알맹이인 행인(杏仁)은 식용이 가능하다. 예를 들어 행인로(杏仁露, 살구씨 음료)와 행인두부는 폐를 촉촉하게 하고 기침을 멎게 하는 약선이다. 동한(東漢)의 명의 동봉(董奉)은 환자를 치료하고 돈 대신 특이한 요구를 했다. 중병에서 갓 회복한 환자에게는 동봉의 집 근처에 살구나무 다섯 그루를 심고, 경증 환자에게는 한 그루만 심게 한 것이다. 세월이 흐르자 동봉의 집 주위는 살구 숲이 형성됐다. 동봉은 잘 익은 살구를 내다 팔았고 판매 수입은 전부 가난한 백성을 돕는 일에 썼다. 이는 동봉이 의술에서 살구를 매우 중요하게 여겼을 뿐 아니라 동한 시대에 이미 살구를 먹는 수요가 있었음을 설명해 준다. 이후 살구 숲이라는 뜻의 ‘행림(杏林)’은 중국에서 의학계를 지칭하는 대명사가 됐다.
잘 익은 살구 빛깔인 살구색(杏黃色)은 고대 중국의 고전적인 색으로 고상하고 존귀한 분위기를 나타내기도 한다. 청(清)나라 때 살구색은 천자와 제후, 귀족의 전유물이었다. 명(明)나라 신마소설(神魔小說) <봉신연의(封神演義)>에는 ‘행황기(杏黃旗)’라는 무적에 가까운 보물이 등장한다. 이것을 파괴할 수 있는 것은 없으며 어떠한 종류의 공격이나 방해에도 영향을 받지 않는다. 강자아(姜子牙)는 이 보물로 상(商)나라를 멸망시키고 주(周)나라를 일으켰으며 장군을 임명하고 봉신하는 데 사용했다.
고려 시대의 살구꽃 문화
<삼국유사>에 ‘산의 복숭아와 계곡의 살구가 울타리에 비쳤는데, 한 줄기 길에 봄이 깊어 양안에 꽃이 피었네(山桃溪杏映籬斜, 一徑春深兩岸花)’라는 시구가 있다. 이는 고대 한국에서도 살구꽃이 봄을 상징하는 이미지였다는 것을 말한다. 고려의 문신 장일은 신라의 고도 경주를 묘사하면서 400년 전 번영했던 귀족 가문은 사라진 지 오래고 들녘에 살구꽃과 복사꽃만 만발하다고 했다. 신라 시대 경주에 살구꽃이 널리 재배됐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1078년 북송(北宋) 황제는 고려로 사신을 파견하면서 살구색 능라주단, 면사와 면포, ‘행인자법주(杏仁煮法酒)’ 10병을 보냈다. 봄의 즐거운 느낌을 주는 살구색 옷은 색상이 특히 밝고 존귀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날염이 매우 어렵다. 행인주는 피부에 수분 공급과 윤기를 주며 기미를 제거하고 인체의 미세순환 개선에 효능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북송의 의서 <태평성혜방(太平聖惠方)>에는 행인주 제작법이 기록돼 있다. 이듬해(1079년) 북송은 고려에 사신단을 다시 파견했다. 사신단에는 한림원 의관 형조(邢慥) 등도 포함돼 고려 국왕의 진료를 위해 갔으며 그들은 약품 100종 외에 ‘행인자법주’ 10병도 가져왔다.
고려 도읍 주위에 살구꽃을 많이 심어 <송도지(松都志)>에는 ‘살구꽃이 눈처럼 하얗고 버들이 실처럼 가늘다(杏花如雪柳如絲)’라는 구절이 있다. 고려 당악(唐樂) <영춘악(迎春樂)>에도 ‘정원 깊은 곳에 동풍이 불어오니 붉은 살구 속 꾀꼬리 울음소리가 좋다’(園林深處東風過, 紅杏里鶯聲好)’라는 가사가 실려 있다. 고려 말기 문신 이색은 봄에 살구꽃을 감상하곤 했는데 그는 시에서 농민에게 살구 열매를 선물받아 행인을 꿀에 버무려 요구르트(당시 타락)와 함께 먹었다고 언급했다.
조선 시대의 살구꽃 문화
연산군은 살구꽃을 매우 좋아했다. 1502년 봄, 도성 문밖에서 활쏘기 연습을 하던 연산군은 ‘비 온 뒤 둑길은 푸르름이 더욱 짙어지고, 살구꽃 끝 위로 나비가 날아다닌다’(雨後長堤綠正肥, 杏花梢上蝶紛飛)’라고 시를 지어 한양 성 밖의 봄기운이 넘치는 풍경을 묘사했다. 1504년 봄, 연산군은 홍문관 관원에게 벽에 기댄 붉은 살구꽃이라는 뜻의 ‘의장홍행(依牆紅杏)’을 시제로 시를 짓도록 했다. 1506년 봄에는 ‘화려한 봄엔 살구꽃이 짙게 피어나고, 향기로운 밤달이 아담한 배꽃을 비춘다(華春濃杏樹, 芳月淡梨花)’라는 시를 대신들에게 하사했다.
1510년 봄, 살구꽃이 제때 피지 않자 조정에서는 이를 중대한 문제로 여겼고 중종은 이것이 하늘의 경고라고 생각했다. 1518년 가을, 사간원 뜰 앞에 살구꽃이 만개하자 중종은 이것도 하늘의 경고라며 심신을 수양하고 태만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1527년 한 궁녀가 불에 그을려 죽은 쥐를 세자궁 북서쪽 벽 밖에 있는 살구나무에 걸어 그 유명한 ‘작서의 변’을 일으켰다. 이 사건을 다른 측면에서 보면 당시 조선 궁궐에 살구나무가 많이 심어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명종실록>에 따르면, 1545년 한양성에 살구꽃이 만발했다는 것으로 보아 일반 백성의 민가에도 보편화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살구꽃을 묘사한 한시가 많다. 문신 김춘택은 “북헌(北軒)에는 봄에 보답할 것이 없지만 작은 살구꽃 한 그루만이 집 주인을 향해 피어 있네”라고 했다. 또 문신 남고는 “매화가 지면 바로 살구꽃이 피는 때, 꽃이 피고 지는 것은 사람과 상관없지만 일 년의 세월이 흘렀음을 보여주네”라며 노래했다.
살구꽃 외에 살구 열매와 행인도 조선시대에 널리 활용됐다. 1411년 신하 박소가 태종에게 살구 열매를 올리고 상으로 쌀과 콩 10석을 하사받았다. 태종이 살구 맛에 매우 만족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살구는 조선 종묘의 5월 제례에 올리는 고정 품목이었다. 반면 효종 시대에 지방관은 맛이 시고 떫은 살구를 진상했다가 벌을 받기도 했다.
오늘날, 현대 중국어와 한국어 한자음 ‘행(杏)’ 자는 모두 행복의 ‘행(幸)’ 자와 발음이 같다. 봄날의 ‘행(杏)’운이 늘 여러분과 함께하길 바란다.
글|위셴룽(喻顯龍), 상하이(上海)외국어대학 글로벌문명사연구소 전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