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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탑, 하나의 중국(南北双塔,感受中国的传统与现代)


2023-04-03      

처음 중국 땅을 밟은 것이 어언 십여 년 전 일이다. 한국의 대학에서 중국 문학을 공부했지만, 정작 중국은 내게 먼 나라였다. 그 시절 나는 시와 그림 속의 중국이 아니라, 중국의 진경(眞景)이 보고 싶어 유학을 결심했다. 모든 처음이 그러하듯, 나의 ‘첫 중국’ 또한 풋풋하고 강렬하다. 마치 누군가의 입술이 처음 닿을 때 번지는 홧홧함이라고나 할까. 저 남방의 도시, 광저우(廣州)와 처음 조우할 때의 느낌이다.


내가 수학한 중산대학(中山大學)은 광저우 도심 한 가운데에 자리하고 있어 광저우의 면면을 살피기에 좋았다. 예로 남문 밖에는 원단 시장이 자리하고 있어 분주한 상인들의 일상을 엿볼 수 있었고, 북문 가까이로는 주강(珠江)이 흐르고 있어 강을 끼고 산책하는 시민들의 한가함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광저우 하면 떠오르는 랜드마크는 단연 광저우타워이다. 높이 600m, 총 112층에 달하는 이 거대한 철제 구조의 탑은 2010년 완공된 이래로 줄곧 광저우의 상징적 건축물로 자리매김했다. 특히 광저우타워는 내가 머물던 학교 기숙사의 맞은편에 위치한 까닭에, 문을 열면 수시로 그 웅장한 탑신을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나 매우(梅雨)가 내리는 4월에서 6월 사이의 광저우는 맑은 날보다 궂은 날이 많았다. 이 계절을 나는 것은 고역이었지만, 빗속의 광저우타워를 바라보는 일은 그런대로 도시인의 밋밋한 심사를 달래주곤 했다. 매우 속 광저우타워는 흡사 도롱이 띠고 잠방이 입은 거인이 선 채로 비를 맞는 게 아닌가 하는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때로 도시인을 향해 하던 일을 멈추고 주변을 돌아보라고 종용했다. 


해넘이께 이 거인은 삿갓도 도롱이도 훌훌 벗어던진 채 오색 채의로 갈아입곤 했다. 방금 전까지 듬쑥하던 거인은 청사초롱을 든 아가씨(靚妹)가 되어 도심 곳곳을 불 밝혔다. 중국의 현대 기술과 최첨단 문명이 탑등 아래 환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경제 성장의 가파른 곡선이 탑신의 기울기마냥 하늘 높이 솟구쳤다. 밤의 광저우타워는 그야말로 중국의 오늘을 보여주는 바로미터인 셈이다.


수년 뒤 나는 베이징(北京)으로 상경하여 학업을 이었다. 베이징은 여러모로 광저우와 달랐다. 광저우가 자본과 노동의 집약적 성과를 보여주는 대표 도시라면, 베이징은 고도(古都)의 명성에 어울리듯 차분하고 믿음직스러웠다. 나의 이러한 느낌은 내가 수학하고 있는 베이징대학(北京大學)의 보야탑(博雅塔)에도 얼마간 묻어난다. 웨이밍후(未名湖)라는 호수를 끼고 서 있는 탑은 당초에 학교의 급수를 위한 수탑(水塔)이었다고 한다. 포터(L. C. Porter, 중국명 博晨光) 라는 미국인 교육자의 기부 덕분에 보야(博雅)라는 이름을 얻은 이 탑은 그 외관이 퉁저우(通州)의 연등불사리탑을 본떴다. 벽돌을 구워 쌓은 탑신 위에 층마다 기와를 얹은 모습은 교정의 건물들과 어우러져 고색창연한 빛을 발했다.


나는 종종 호수를 돌며 물 위에 비친 탑 그림자를 바라보는 일이 즐거웠다. 물끄러미 탑 그림자를 보자면, 나는 그 모습이 누군가의 등과 닮아 있다고 느꼈다. 그건 거인의 모습은 아니다. 그렇다고 세련된 아가씨의 모습은 더더욱 아니다. 그건 차라리 지난한 세월을 견뎌온 어느 지식인의 뒷모습을 닮았다고 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삶의 무게를 인민과 함께 나눠진 어느 지식인, 그는 쉽게 들레지도 동요하지도 않는다. 그는 자신의 자리에 앉아 사람들의 애환을 듣고 기록한다. 그는 과거를 기름 삼아 다가올 시간의 불을 밝힌다.


광저우와 베이징, 중국의 남방과 북방을 대표할 만한 두 도시를 거쳐 왔지만, 중국이란 나라를 한마디로 표현하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나는 중국의 깊이와 너비를 재보고자 하는 이에게 호기롭게 두 개의 탑을 말해주고 싶다. 광저우타워가 중국의 미래라면, 보야탑은 중국의 과거이다. 한 탑이 인정승천(人定勝天)의 꿈을 이뤄낸 표지라면, 다른 한 탑은 전통의 계승자이다. 하나가 문명 건설의 첨탑이라면, 다른 하나는 문화와 지혜의 상아탑이다. 남과 북이 같지 않듯이, 두 탑이 비추는 중국의 모습 또한 다르다. 하지만 이 두 탑은 모두 하나의 중국을 말하고 있다. 중국의 어제가 솟아 있는 자리에, 중국의 내일이 새로이 굴기하고 있다. 

 

不知不觉,距离我第一次踏入中国这片土地已过去十年有余。我在韩国所学专业为中国文学,但中国对我而言却是一个陌生国度。我觉得与其通过诗画了解中国,不如直接来看看中国的真实样貌,所以我选择了来中国留学。与大多数人的初体验别无二致,我的中国初体验也是质朴却强烈的。这就是我刚到中国南方城市——广州时的真切感受。那种感觉如同初吻一般麻酥酥的,像触电一样。

 

我所就读的中山大学位于广州市的市中心,在校园里可以全方位观察广州这座城市的全景。在学校的正南门外有一个布料市场,我可以看到那里的商贩们忙碌奔走的模样;在学校北门附近的珠江缓缓地流淌着,远远望去亦可瞧见沿着珠江漫步着的市民悠哉游哉的模样。不过人们一提起广州,首先在脑海中浮现的地标性建筑便是广州塔了。广州塔高达600米,是一座112层的巨型钢结构框架塔楼,自2010年建成后,便成为了广州的地标性建筑。值得一提的是,广州塔位于我当时住的宿舍对面,只要一打开门我就可以眺望到它雄伟无比的塔身。特别是在4月到6月,广州正值梅雨季。想要熬过梅雨季节十分不易,对因阴天而闷闷不乐的市民们来说,能够眺望一次被雨水淋湿的广州塔,或许也是一种慰藉。处在梅雨季的广州塔往往会给人一种错觉,它仿佛像是一位身着蓑衣、着纨绔傲然屹立在雨中的巨人。它会时不时地鼓动着奔波劳碌的市民们“卸甲休兵”,安然地环顾四周。

 

日落西山时,这位巨人便会脱去身着之物,换上五彩斑斓的服装。前一秒看起来还是沉稳的巨人,摇身一变便成了手持青纱灯笼的靓妹,点亮着城市各个角落。在广州塔的照射之下,中国的科技焕发着夺目光彩。中国经济的增长曲线犹如如广州塔一般直冲云霄。夜空中的广州塔仿佛就是展示当今中国面貌的最佳代表。

 

多年过后,我来到北京求学。北京与广州在很多方面都不同。如果说广州是一座集资本与劳动于一身的代表性都市,那北京则如其以古都闻名一般,散发着与其相符的古韵气质。在我所在的北京大学,有一座名叫博雅塔的建筑,也同样使我对古韵深有感触。据说,依未名湖而建的博雅塔当初是为学校提供水源的水塔。由一位名叫博晨光的美国教育家捐助得以修建得,故命名为“博雅塔”,而博雅塔在外观设计则参考了通州的燃灯佛舍利塔。这座塔由烧制而成的砖头砌成,并且在其塔身上层层加瓦,这样的博雅塔与校园中的建筑物浑然一体,散发着古色古香的熠熠光辉。

 

我时常在未名湖畔漫步,哪怕只是看着湖面中倒映出的博雅塔的影子也足以令我沉醉和享受。看着湖面上的倒影,这让我觉得它像是谁的脊背。那不像是巨人,更不像干练的美女,反倒是像一位饱经沧桑的知识分子。他是一个与人民共同经历过艰难困苦,承受过生活的重量的知识分子,他的意志不会轻易动摇,他屹立在原地,聆听着人们的悲欢离合。他将过去化作煤油,点燃着接踵而至的时间之火。

 

虽然体验了广州与北京这两座可以代表中国南北的城市,但我依然觉得难以用一句话来形容和概括中国。若有人想要用标尺和数值来衡量中国的深度与宽度的话,那么我想这两座塔便能给出答案。如果说广州塔代表的是中国的未来,那么博雅塔便代表的便是中国的过去;如果说其中一座塔实现了人定胜天的梦,那么另一座塔便代表传统文化的传承;如果说一座是孕育着文明的尖塔,那么另一座便是集聚文化与智慧的象牙塔。中国南与北的差异,也使得中国南北城市在两座塔的映射下呈现出不同的风姿。但无论怎样,这两座塔都在描绘着同一个中国。中国的明日正屹立于昨日之上,雄赳赳气昂昂地走向新的振兴之路。

 

| 이두은(李头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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