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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품은 도시, 시안(西安)


2019-12-05      

시안 다옌타의 항공사진 사진/VCG


웨이허(渭河) 황허(黃河) 강물이 적시고 지나가는 중국 대륙 중심부 비옥한 자리에 웨이허 평원이 펼쳐져 있다. 광활한 평원에는 과거 동방에서 가장 찬란하게 빛나던 도시인 시안이 있다. 옛날 장안(長安)이라 불렸던 시안은 오랫동안 중국 고대 왕조의 흥망성쇠와 함께 했다. 동시에 중국과 한국의 깊은 우정과 공동의 적에 함께 맞서 싸웠던 혁명의 기억을 간직한 곳이기도 하다. 번성했던 역사의 고도(古都) 시안은 오늘날 새로운 모습으로 신시대 중한 우호의 역사를 다시 내려가고 있다.


중화문명 역사의 고도

시안은 3100 넘는 도시의 역사를 지녔고, 1100 넘는 시간 동안 여러 왕조의 수도이기도 했다. 서한(西漢) 때부터는 세계 각국과 경제·문화 교류, 친선 왕래가 이뤄지던 주요 도시였다. 중국의 고대 실크로드는 시안에서 출발해 고대 로마까지 동서양을 가로지르는 길이었다. 시안은 로마, 아테네, 카이로와 어깨를 나란히 정도로 세계에 이름을 떨쳤고 중국의 6 고도 가운데 역사가 가장 도시다. 시안처럼 역사 자체를 도시의 정체성으로 삼은 곳도 매우 드물다. 시안은 지금까지도 역사의 숨결을 고이 간직한 년이 넘는 세월을 묵묵히 걸어오고 있다.


시안 곳곳을 살펴보면 그야말로 과거와 현재가 뒤얽힌 흔적을 있다. 린퉁(臨潼) 남쪽의 리산(驪山)에는 유명한 진시황릉의 병마용이 있다. 조성에서 순장과 출토에 이르기까지 2000 동안 세월의 흐름과 격변 속에 조용히 묻혀 있던 제왕의 무덤에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위풍당당한 기운이 서려 있다. 흙으로 만든 병마용은 당장이라도 살아서 우리 앞에 걸어 나올 듯하다. 과거 제후국을 휩쓸고 천하를 통일했던 진나라의 위엄은 오랜 세월의 풍파에도 전혀 녹슬지 않았다.


시안에서는 제국의 위엄과 함께 번성했던 제국의 흔적도 찾아볼 있다. 리산 북쪽으로는 당나라 현종과 양귀비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가 쓰인 화청궁(華淸宮) 유적이 있다. 화청궁 주변에는 652년에 짓기 시작한 다옌타(大雁塔) 있는데, 자은사(慈恩寺) 최초의 주지스님인 현장법사가 천축국에서 가지고 돌아온 산스크리트어 경전과 불상 사리 등을 모시기 위해 손수 설계하고 지은 탑으로 알려져 있다. 시안의 대표적인 건축물인 다옌타는 주변 지역을 개방과 포용으로 두루 감쌌던 성당(盛唐) 시기의 시대 정신이 반영되어 있다.


시내로 들어서면 다른 도시와 달리 구획이 반듯하고 거리와 골목이 일직선으로 뻗어 있다. 당나라 도읍이었던 장안 시절 방형(方形)으로 정비된 논밭 구획처럼 모습이 아직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다. 심지어 상업 중심지까지 당나라 때와 별반 차이가 없다. 거리나 골목에도 수백 전부터 유래된 명칭이 많다.


시안의 시내 중심에 다다르면 명나라 지어진 고대 성벽을 있다. 성벽은 수수하면서도 고풍스러운 멋을 지닌 시안의 명물로 자리잡았다. 성벽 북문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보면 도시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남쪽으로 멀리 시선을 돌리면 증축선(中軸線, 구역을 남북으로 가르는 중심선) 따라 우뚝 솟은 종루(鍾樓) 보인다. 새벽이 되면 시내 중심의 종루에서 낮고 우렁찬 종소리가 성벽에 둘러싸인 도시 전체로 은은히 울려 퍼진다. 예스러우면서도 현대적인 얼굴의 시안 아침을 알리는 종소리이다.


종루는 시안의 중심지 역할을 한다. 종루 주변으로는 번화한 거리가 이어져 있고 사람들이 없이 모여든다. 종루는 시안 주민들의 자랑이자 외지인들이 시샘하는 도시 최고의 상징물이다. 색색의 단청과 화려한 기둥으로 유려한 자태를 뽐내는 누각은 현대적인 조명 장식과 어우러져 밤이 되면 더욱 우아한 모습이 된다. 밤거리를 환히 밝히는 조명 종루는 마치 정성스레 조각한 장식품처럼 보는 이들의 마음을 포근하게 한다.


시안은 황제가 거한 도시의 위용과 고도(古都)로서의 매력을 지닌 도시라는 외에도 지역 특유의 넉넉함과 만인이 동경하는 도시로서의 여유가 배어 있다. “굽이치는 세상 제왕의 도읍, 유유한 세월 백성의 터전(滾滾紅塵帝王都, 悠悠歲月百姓城)”이라는 시구는 같은 시안의 복합적인 매력을 드러내고 있다.


시안 시내의 건축물에서는 깊은 연륜이 느껴진다. 하얀 벽에 회백색 기와, 목재 서까래에 꽃무늬가 조각된 건축물은 콘크리트 빌딩 사이에서 한층 복고적인 운치가 돋보인다. 골목 사이사이를 걷다 보면 시공간을 거슬러 오른 동서양의 예술적 감각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동양의 신비로움과 서양의 조형적 매력을 두루 갖춘 도시의 면모를 느낄 있다. 지금처럼 화려한 대규모 극장이나 영화관에서 언제든지 현대극을 찾아볼 있는 시대에도 여전히 일부 사람들은 이끼가 가득한 성벽 아래에서 산시(陝西) 중심의 지방전통극인진강(秦腔)’이나 그림자극인피영(皮影)’, 목각인형극인목우(木偶)’ 감상을 즐기곤 한다.


시안의 여행객이 되어 고풍스러운 디자인의 건물에서 커피를 마시고 책을 읽으며 고즈넉한 도시의 분위기를 만끽할 수도 있다. 아니면 서양식 인테리어로 꾸민 찻집에서 따뜻한 차를 홀짝이고 밖으로 보이는 사람과 풍경을 구경하며 도시의 인간적인 매력을 느낄 수도 있다. 조금 시끌벅적한 것을 선호한다면 시안의 거리인 시양시(西羊市)에서 진한 국물의 양고기탕양러우파오모(羊肉泡饃)’ 시큼한 탕에 양고기 만두를 넣은쏸탕수이자오(酸湯水餃)’ 먹으며 소박하면서도 너그러운 시안의 멋을 음미할 수도 있다.



2014 5 29시안의 한국 광복군 2지대 주둔지  터에  기념비 제막식이 열렸다사진/IC


시안과 한국 광복군의 인연

시안은 중국의 현대사에도 굵직한 족적을 남겼다. 1936 12 12, 일본 제국주의 침략이 점점 격화되는 상황에서 중국의 애국지사로 추앙받는 사령관 장쉐량(張學良) 양후청(楊虎城) 시안에서시안사변(西安事變)’ 일으켰다. 이로 인해 장제스(蔣介石)양외필선안내(攘外必先安內, 외세를 막으려면 먼저 내부를 안정시켜야 한다)’ 정책을 포기함으로써 중국의 항일 통일전선 형성에도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다. 시안사변 이후 국민당과 공산당의 2 국공합작이 성립됐고, 일본 침략자를 몰아내기 위한 중국의 항일 활동이 활성화되면서 중국 현대사의 흐름도 크게 달라지게 됐다.


이처럼 시안은 중국의 혁명 성지인 동시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재중국 항일 활동의 주요 근거지이기도 했다. 1937 7 일제의 중국 침략이 본격화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이끄는 항일 광복투쟁군이 중국 인민들의 항일 전쟁이라는 거센 물결에 합류하면서 항일 세력은 급속도로 커지기 시작했다.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로서는 적의 점령지 내에 한인 청년들을 파견해 무장투쟁을 벌이는 일이 급선무였다. 1939 11, 임시정부는 시안에 군사특파단을 파견하고 통제방(通濟坊) 일대에 광복군 총사령부를 설치해 선전 동원 활동에 나섰다. 많은 노력 끝에 모집된 한인 청년 50 명은 시안의한인 청년 특별훈련반에서 특수훈련을 받았다.


1940 9 17, 충칭(重慶) 자링(嘉陵)호텔에서 한국 광복군 총사령부 창립총회가 열림으로써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자체 무장부대인한국 광복군 갖추게 되었다. 한국 광복군은 총사령부 설치 이후 병력 충원을 위해 다퉁(大同), 바오터우(包頭), 상라오(上饒), 푸양(阜陽), 시안 등지에 모병처를 설치했다. 1940 11월부터 광복군에 합류한 청년들은 기수별로 한인 청년 특별훈련반에 파견되어 훈련을 받기 시작했다.


1942년에는 중국 정부의 협조로 김원봉이 이끄는 다른 한반도 독립 무장세력인조선의용대 한국 광복군에 편입됐다. 같은 한국 광복군 총사령부는 충칭으로 근거지를 옮기고, 시안에 남아 있던 광복군 2지대는 계속해서 모병을 이어갔다. 이때 수많은 청년들이 적군의 봉쇄를 뚫고 시안의 한국 광복군에 합류하며 시안에서 화북지방의 항일 전선에 뛰어들었다.


시기 중국의 언론매체도 시안의 한국 광복군 활동에 주목하며 이들의 기념 행사를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특히 1943 3 1 광복군 2지대가 시안에서 거행한 ‘3·1 혁명기념대회 비롯해 1944 광복군 2지대 선전대가 시안 량푸제(梁府街) 청년당(靑年堂)에서 진행한아리랑 공연 등은 중국 언론과 국민들의 관심을 모았다.


1945 세계적으로 ()파시스트 전쟁이 잇따라 승리를 거두면서 마침내 연합군의 한반도 참전이 현실화됐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국내 작전을 강화하기 위해각종 세력을 결집해 연합군의 작전에 협조한다 내용의 <군사계획서> 작성하고 중국에 주둔하던 미군과의 연계를 강화했다.


주중 미군전략정보국(OSS) 중국에서 항일 활동을 펼치는 한국 광복군의 포로 심문, 적군의 암호 해제, 선전물 제작, 대적방송(對敵放送) 특수 활동에 주목했다. 이에 따라 1945 3 15,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주중 미군과 <한미 합작합의서> 체결하고 미군 OSS 지원과 협조 속에 시안과 푸양에 있는 광복군 2지대와 3지대에서 한미OSS합동 훈련을 전개하는 한편 국내 침투작전을 위한 특수 정예부대인돌격대 선발했다.


이범석 대장이 이끄는 한국 광복군 2지대의 사병 180 명은 중난산(終南山) 고찰 미퉈구쓰(彌陀古寺) 일대에독수리 훈련기지 설치하고 미군 OSS 야전 훈련, 사격술, 폭파술, 도강술(渡江術), 비밀 무전술 첩보 훈련을 진행했다. 이들은 전략적인 대반격 작전을 통해 미군을 도와 한국에 상륙하고 빼앗긴 한반도 땅을 수복할 계획이었다. 8 10 전후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이었던 김구는 충칭에서 시안으로 이동해 광복군 훈련기지에서 훈련 상황을 지켜보기도 했다. 그러나 같은 8 15,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한미 OSS 훈련도 끝을 맺었다.


시안 진시황릉의 병마용 사진/탄밍(譚明)


신시기 시안과 한국의 교류

시안은 1992 중한 수교 이후 급물살을 타기 시작한 양국 도시 교류에 빠르게 합류했다. 1994 11 18 경주시와 자매도시를 맺은 이후 도시는 25 대표단 파견, 문화예술제,무역상담회, 스포츠 교류회 다양한 행사를 공동으로 개최하고 도시 주민들 친밀도를 높였다.


최근에는 시안과 한국의 관계가 더욱 가까워지고 있다. 2016 5 15 시안은 경상남도 진주시와 자매도시 결연을 맺었고, 2018 12 9일에서 12일까지 권영세 안동시 시장이 시안을 방문해 도시 자매도시 결연 협약을 체결했다. 게다가 최근 시안은 한국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주요 관광지로 떠오르고 있다.


시안의 명물거리 후이민가(回民街) 시양시 골목 사진/CFB


시안은 양국의 인문 교류뿐 아니라 무역과 과학기술 교류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로는 시안과 삼성전자의 합작이 있다. 2012 4 10 삼성전자는 산시(陝西) 시안시와 투자의향서를 체결하고 시안 하이테크산업개발구에 메모리 반도체 공장 설립을 선언했다. 70 달러가 투자된 1 사업에서는 주로 세계 최고 수준의 메모리 반도체 연구·개발과 생산 기능을 수행했다. 2015 8, 시안 하이테크산업개발구가 국가자주혁신시범구 조성 허가를 받으면서 시안에 공급측 구조 개혁, 경제구조 개혁, 혁신력 강화, 경제발전의 질적 제고 등을 위한 발판이 마련됐다.


이에 따라 반도체, 바이오의약, 스마트 모바일 단말기, 소프트웨어·서비스 아웃소싱 4 산업 분야에서 현재 1000 위안( 165340억원) 규모의 산업 클러스터를 구성해 시안 하이테크산업개발구에서 본격적인 사업 전개를 위한 태세를 갖추고 있다.


삼성전자는 시안에서 지속적인 투자를 통해 사업 범위를 넓히고 좋은 성과를 거뒀다. 지난 10 14일에는 리커창(克强) 중국 국무원 총리가 시안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을 시찰하기도 했다. 총리는중국은 드넓은 시장을 보유하고 있고 저부가가치 산업에서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있어 사업 기회가 무궁무진하다. 삼성과 중국의 오랜 협력을 통해 하이테크 분야의 협력은 반드시 고부가가치를 지닌 성과로 되돌아온다는 사실이 입증됐다 말했다.


오늘날 시안을 방문하는 한국인들은 중국의 깊고 오랜 역사와 함께 흘리며 싸웠던 양국 혁명 투쟁의 우정을 느낄 있다.나아가 현지의 다양한 일자리를 통해 시안에 거주하면서 양국의 소중한 인연을 이어갈 수도 있을 것이다.



글|장진원(張勁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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