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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둔황의 딸’ 판진스(樊錦詩), 일생을 바친 ‘탐독’

2019-12-05 글|장진원(張勁文)

둔황연구원 명예원장 판진스 사진/왕레이(王蕾)

고대 실크로드는 무역을 위한 길이자 문명 교류의 통로였다. 둔황(敦煌)은 여러 고대문명 간의 상호 충돌이 일어난 곳이었고, 그 과정에서 비교 불가능한 문명의 보고가 만들어졌다. 바로 둔황 막고굴이다. 
 
오늘날 둔황은 전세계적인 명소로 꼽힌다. 둔황이 다시금 모습을 드러내고 이름을 알리게 된 것은 황막한 고비사막에서 둔황을 지켜 온 사람들 덕분이다. 둔황연구원 명예원장인 판진스는 그 중 한 사람이다. 둔황 막고굴에 가면 ‘청춘(靑春)’이라는 이름의 석조(石雕)를 볼 수 있다. 가지런한 단발머리에 청춘의 기운을 뿜어내고 있는 소녀는 손에는 밀집모자를 들고 있고 어깨에는 배낭을 맨 채로 어디론가 떠나기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다. 이 석상의 모델이 된 인물, 맨 처음 둔황에 왔던 판진스다. 
 
1938년 태어난 판진스는 벌써 여든을 넘긴 나이가 되었다. 성성한 백발에 은테 안경, 마르고 작은 몸집…. 마르고 거친 둔황에서의 60여 년 세월과 함께 젊음은 사라졌지만, 그 동안의 시간은 연약하고 부드러운 겉모습과 다른 단순함과 솔직함을 남겨 주었다. 그녀의 기백과 그녀가 남긴 업적은 둔황과 함께 역사로 기록되어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2004년 8월 26일, 막고굴에서 판진스가 <둔황 석굴 고고 전집(敦煌石窟考古全集)> 책 편집자들에게 설명하고 있다. 사진/CFB
 
둔황과의 질긴 인연 
둔황은 1600여 년의 역사를 가진 곳으로, 절등한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이곳 석굴예술에는 중화문화의 화려함과 찬란함이 서려 있다. 
 
둔황이 본격적으로 세간의 관심을 받기 시작한 것은 1900년 왕도사(王道士)가 막고굴 제17호실에서 장경동(藏經洞)을 발견하면서 부터다. 1907-1024년 영국의 아우렐 스타인, 프랑스의 폴 펠리오, 일본의 요시가와 고이치로 등이 잇따라 막고굴에 와 왕도사로부터 장경동에서 발견된 역사적 가치가 뛰어난 경전을 빼앗아 갔다. 이후 20년 간 ‘둔황 유서’가 해외에서 출간되었고, 수 많은 학자들의 이목이 이 문화 보고에 집중되면서 세계적 학문인 ‘둔황학’이 발전하기 시작했다. 둔황은 중국에 있지만 ‘둔황학’은 해외에서 성행한 것이다. ‘둔황 유서’의 비극적 사건이 있은 뒤 남다른 문화적 사명의식을 가지고 있던 학자들이 메마른 땅 위의 문화 성지를 지키기 위해 나섰다. 1935년, 중국 유학생 창수훙(常書鴻)이 파리 센 강변의 헌책 노점에서 폴 펠리오가 쓴 <둔황석굴도록>을 발견했다. 당시 유화에 심취해 있던 창수훙은 절묘한 중국 전통예술에서 큰 영감을 받았고, 귀국한 뒤 곧장 둔황 막고굴로 향해 석실 벽화를 모사하고 복제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둔황의 제1대 보호자가 된 창수훙과 다수의 학자들. 1944년 국립 둔황예술연구소가 설립되면서 창수훙은 초대 소장이 되었다. 둔황 막고굴 역사의 새 페이지가 열리는 때였다.  
 
1950년 8월, 둔황예술연구소는 ‘둔황문물연구소’로 명칭을 바꿨다. 1960년대부터는 고고학 팀을 증설하고, 기존의 미술과 보호연구 인재 외에 역사·고고학·문학·건축·공예미술 등 여러 분야의 인재들을 확충했다. 이때는 문물보호연구소 역사상 인재가 가장 많았던 시기이기도 하며, 판진스가 연구소에 합류한 것 역시 이 시기의 일이다.
 
판진스는 1958년 베이징(北京)대학교 역사학과에 입학하여 고고학을 전공했다. 전공과 관련이 있기도 하고 예술을 사랑했던 이유로 판진스는 대학 재학시절부터 둔황을 테마로 한 작품들을 좋아했고, 둔황과 관련된 자료들을 수집하기도 했다. 둔황 벽화와 그 모사품을 볼 때면 그녀는 벅찬 감동을 느꼈고 손에서 내려 놓는 것조차 아쉬워할 정도였다. 언젠가는 보고문학작품인 <치롄산 아래에서(祁連山下)>를 단숨에 완독했다. 둔황 막고굴을 지키기 위해 용감하고 정정당당하게 맞서는 창수훙의 강인한 정신력과 행동에 매료된 것이었다. 
 
둔황에 대한 갈망이었을까 아니면 창수훙 등 선배에 대한 존경심 때문이었을까. 판진스 마음에 둔황에 직접 가보고 싶다는 싹이 트기 시작했다. 1962년, 베이징대학교에서 학생들의 졸업 전 실습을 기획하자 판진스는 이 기회를 빌어 둔황으로 향하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베이징에서 란저우(蘭州)까지 간 뒤 란저우에서 빠져 나와 망망하게 펼쳐진 고비사막을 따라 다시 서쪽으로, 우웨이(武威)·장예(張掖)·주취안(酒泉)을 지난 뒤에야 둔황에 도착하고, 둔황성에서 25km를 더 달려야 그 이름도 유명한 막고굴을 볼 수 있다. 
 
“질주하는 기차에서 나는 광활한 하늘과 땅을 보며 둔황 막고굴의 화려한 모습을 상상했다. 그리고 둔황문물연구소 정원을 상상했고, 이름은 많이 들었지만 한번도 본 적은 없는 선생님들의 모습을 상상했다.” 기대감에 부풀어있던 판진스는, 그러나 둔황 막고굴에 도착한 뒤 상상을 벗어난 현장 모습에 당황했다. 막고굴은 곳곳이 훼손되어 있었고 황량한 주변에는 사람은 커녕 풀 한 포기 보이지 않았다. 둔황문물연구소 또한 마찬가지였다. 연구소 사무실은 뜻밖에도 옛날 절로 쓰이던 곳이었고, 선배들이 머물던 곳은 마구간을 개조한 흙집이었다. 밤에는 남포등의 어두컴컴한 불빛에 의지해야 했고, 도랑에서 떠온 알칼리수가 평소의 식수였다. 판진스는 의아함이 들었다. 그들은 왜 이런 곳에서 지내는 것인지, 이런 곳에서 어떻게 10년, 20년 일할 수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사실 그들은 둔황 벽화에 대해 단순히 감탄하고 감상하며 자료를 얻기 위해 온 방관자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청교도만큼이나 고된 삶을 스스로 자처하여 열악한 환경 속에서 묵묵히 하루 하루의 일을 해내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선배들에게 있어 둔황예술은 없어서는 안 될 삶의 일부분이었다. 
 
당시의 ‘둔황 행(行)’이 자신의 운명을 결정지을 것이라곤 판진스 조차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1963년 대학 졸업을 앞두고 있던 때, 판진스가 존경해 마지 않던 창수훙이 직접 그녀의 이름을 호명하며 둔황문물연구소에서 일할 것을 제안했다. 이 같은 소식을 들은 판진스의 아버지는 학교 측에 ‘딸을 천리 밖 외지의 열악한 조건의 고비사막에서 일하지 않도록 배정해달라’는 바람을 담은 장문의 편지를 쓰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판진스의 결정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판진스는 그렇게 둔황과 질긴 인연을 맺게 된 것이다. 
 
판진스의 결정은 그녀 자신의 운명뿐 아니라 남자친구에서 남편이 된 펑진장(彭金章)의 인생 궤도까지 바꾸어 놓았다. 
 
판진스와 펑진장은 동창생이었다. 대학 졸업 후 한 명은 둔황에 배치되었고 한 명은 우한(武漢)대학교로 가게 됐다. 평일에는 거의 만날 수 없던 두 사람은 편지를 주고받을 수 밖에 없었다. 판진스는 그 당시 펑진장에게 약속했었다. 3년 동안 막고굴의 조각상과 벽화를 모두 보고 우한으로 가겠다고 했다. 
 
3년이 지났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판진스는 약속을 지킬 수 없었다. 그러던 중 누군가는 펑진장에게 이제 더 이상 기다리지 말라고, 떨어져 사는 고생을 할 바엔 새로운 사람을 찾는 게 더 낫다고 말하기도 했다. 펑진장은 그러나 이 ‘마음이 딴 데 가 있는’ 여인을 누구보다 잘 알았고, “기다리겠노라” 대답했다. 
 
1967년, 판진스는 가족방문 휴가를 내고 우한으로 향했다. 그리고 우한대학교 기숙사에서 간략하게 결혼식을 올린 두 사람은 19년의 ‘별거생활’을 시작했다. 판진스는 앞서 우한으로의 파견을 신청하기도 했었다. 1986년 마침내 상부의 동의가 떨어졌지만 판진스는 또 다시 머뭇거리고 말았다. “이 석굴을 위해서 내가 무언가 해야 할 것만 같았다.” 판진스의 말이다. 
 
판진스는 자신의 생각을 펑진장에게 털어놨고 펑진장의 대답은 간단했다. “보아하니 내가 가서 당신과 함께 둔황에 질릴 때까지 있어야겠어.” 우한대학교에 고고학과를 편성한 인물이었던 펑진장은 그 당시 우한대학 역사학과 부주임이자 고고학연구실 주임을 맡고 있었다. 그러나 아내의 바람을 위해 우한대학에서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둔황을 선택했다. 
 
펑진장은 원래 하(夏)·상(商)·주(周) 시기를 연구하는 고고학자였지만 50세가 가까워진 나이에 둔황 연구에 뛰어들었다. “사람들이 판진스를 가리켜 둔황의 딸이라고 한다. 그러면 나는 둔황의 사위인 셈이다.” 펑진장은 웃으며 말했다. 훗날 판진스와의 사랑에 대해 묻자 펑진장은 이같이 대답했다. “웨밍후(未名湖, 베이징대학교의 한 호수)에서 연애하고 뤄자산(珞珈山, 우한대학교가 있는 곳)에서 사랑했으며 막고굴에서 서로를 지키고 있다.” 
 
판진스가 막고굴 제61호에서 벽화의 디지털화 프로젝트 추진상황을 살펴보고 있다. 사진/CFB
 
신 시기의 둔황 보호 
개혁개방과 함께 둔황문물연구소 업무 또한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었다. 이 즈음 판진스는 관련 분야 전문가들과 협력한 둔황 막고굴 왕조별 조성 상황 연구에 관한 성과를 발표할 수 있게 되었다. <둔황 막고굴 북조(北朝) 석굴의 분기(分期)> <막고굴 수(隋)대 석굴 분기> <막고굴 당(唐)대 전기(前期) 동굴 분기)> 등은 판진스를 주축으로 한 연구팀의 대표적 성과이자 중국 석굴 고증의 중대한 성과로 손꼽힌다. 이 같은 연구 성과가 있었기에 ‘둔황은 중국에 있지만 둔황학은 해외에서 발달하던’ 상황이 달라질 수 있었다. 
 
1984년 둔황문물연구소는 ‘둔황연구원’으로 개편되었고 1987년에는 막고굴이 세계문화유산목록에 등재되었다. 세계문화유산목록에 등재된 전세계 611개 문화재 중 세계문화유산 6가지 기준을 모두 만족시킨 것은 3개에 불과한데, 이중 하나가 바로 둔황 막고굴이다.
 
영예와 함께 찾아온 것은 다름 아닌 문화재 보호 부담이었다. 당시 모래바람으로 인한 피해는 막고굴 암체와 벽화 침식을 막는 데 있어 최대의 난제였다. 판진스는 당시의 일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1988년 유네스코 주중 대표였던 테일러의 소개로 인연을 맺은 둔황연구원과 미국 게티보존연구소는 막고굴 암정(崖頂) 풍사 종합 처리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처음에는 모래방지 장벽을 건설하다가 점차 화학적 고사(固沙, 모래 고정), 사구식물을 통한 모래유실 방지, 네모짚 고사 체계를 갖추었다. 이를 통해 막고굴의 모래 유실량을 70% 가량 줄인 것은 물론 장기간 막고굴에 피해를 준 풍사 문제도 효과적으로 해결했다. 막고굴 암체와 벽화를 보호하고 여행객들의 관람 환경까지 개선할 수 있게 된 것이다. 
 
1998년, 판진스는 창수훙·돤원제(段文傑)의 뒤를 이어 둔황연구원의 제3대 원장이 되었다. 보다 강렬한 책임감과 사명감이 판진스의 몸과 정신을 가득 채웠다. “막고굴은 결코 사라져서는 안 되고, 연구원은 발걸음을 멈춰서는 안 된다.” 
 
그러나 원장 취임과 동시에 판진스는 곤란한 문제에 맞닥뜨렸다. 지역경제 발전을 위한다며 유관부처에서 둔황과 모 여행사를 함께 묶어 시장에 내놓을 계획을 세운 것이다. 전면 상업화 조치와 보호 사이에서 판진스는 밤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로 걱정이 컸다. “2000년 간쑤(甘肅)성 의 한 여행사 간부가 나를 찾아 왔다. 우리에게 간쑤성 여행회사에 들어오라는 것이었다. 나는 안 될 일이라고 했다. 여행사가 문화재 보호에 대해 알겠는가? 둔황의 벽화는 아름답지만 그만큼 취약하기도 하다. 대부분 진흙과 풀, 나무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막고굴은 매우 복잡한 관리시스템을 필요로 했고 많은 부분의 모니터링이 필요했다.” 판진스는 연구원에서 진행했던 실험에 대해 소개했다. 젊은 사람 40명을 한 동굴 안에 30분 가량 있게 한 뒤 동굴 안 이산화탄소 농도 및 습도 변화를 확인하는 실험이었다. 이산화탄소 농도는 30분 전 보다 5배 가량 진해졌고 상대 습도는 10%, 온도는 4도 높아진 것으로 나타났다. 연구원은 또 다른 실험도 진행했다. 한 공간을 만든 뒤 암체와 비슷한 돌덩이를 넣고 내부의 상대 습도를 계속해서 올리는 실험이었다. 수백 일 뒤 돌 덩이는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판진스는 결국 둔황의 상업화를 반대할 수 밖에 없었다. 
 
둔화의 디지털화 
판진스의 노력에 힘입어 둔황의 상업화 풍파는 잠잠해졌지만 판진스는 또 다른 고민에 사로잡혔다. 2003년, 판진스는 제13기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에 ‘둔황의 디지털화’라는 과감한 발상에 대한 제안을 했다. 
 
둔황의 디지털화의 핵심 내용은 동굴·벽화·소조와 동굴 관련 문화재를 고정밀 디지털 이미지로 가공하고,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는 둔황 관련 문물·문헌·연구성과·자료의 디지털화를 통해 하나의 전자파일에 모아두면 자료의 영구적 보존이 가능하고 동굴 외부의 관광객에게도 시연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개념은 이제껏 전례가 없던 것이었다. 둔황의 문화유산을 훼손하지 않고 영구적으로 보존할 수 있는 최적의 방법이기도 했다. 
 
사실 판진스의 이 같은 구상은 결코 허황된 것이 아니었다. 일찍이 1980년대 미국 앤드류 멜론재단의 지원 하에 둔황연구원은 미국 노스웨스턴대학교·저장(浙江)대학교와 공동으로 둔황석굴 디지털화의 서막을 연 바 있었다. 
 
‘불상의 사진을 찍는다’는 것이 석굴 디지털화에 대한 가장 간단한 설명일 것이다. 먼저 전문 인력이 캄캄한 동굴 안에 궤도와 조명 등을 만들고, 층에 따라 단계별로 벽화의 사진을 찍는다. 그런 뒤 컴퓨터 기술을 통해 방대한 수량의 사진을 하나씩 대조하고 연결하며 수정한다. 300㎡ 면적의 동굴 하나를 디지털화 하는 데만 4만 여 장의 사진이 필요한데, 해상도가 점차 높아짐에 따라 촬영된 이미지를 스크린에 띄워놓으면 동굴 안에서 보다 더욱 뚜렷하게 볼 수 있다. 
2014년 8월 1일 둔황 막고굴 디지털 전시센터가 정식 운영에 들어갔다. 이날부터 모든 관광객들은 둔황 막고굴 관람에 앞서 고해상도의 와이드스크린 영상관에서 <천년 막고굴>을 감상하고 20분 뒤에는 3D 영상물 <몽환불궁(夢幻佛宮)>을 관람하게 됐다. <몽환불궁>은 생생한 입체감으로 마치 동굴 안에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심지어는 동굴 안에서보다 더 선명하게 문화재를 감상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2016년에는 디지털화의 또 다른 성과인 ‘디지털 둔황’ 데이터베이스가 정식 서비스되었다. 30개 동굴의 고해상도 이미지와 전경을 인터넷을 통해 무료로 감상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마우스 클릭 몇 번이면 막고굴 동굴 안에 있는 것과 같은 느낌을 느낄 수 있다.
 
2018년 12월 18일 베이징에서 개혁개방 40주년 기념 행사의 성대한 막이 오른 가운데, 판진스는 ‘문물의 효과적 보호 탐색자’로서 ‘개혁 선봉’의 칭호를 얻었다. 또한 2019년 9월 17일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70주년을 기념한 행사에서는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으로부터 ‘문물 보호 걸출 공헌자’라는 국가 영예 칭호를 받았다. 
 
81세의 판진스는 여전히 둔황에 대한 생각뿐이다. 6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둔황이라는 책을 읽으면서 그 시절의 앳된 소녀는 어느덧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되었다. “둔황은 영원히 완독할 수 없는 책이다. 아무리 많은 책을 읽고 아무리 학식이 풍부한 사람이라도 둔황 앞에서는 언제나 배움이 얕은 초등학생에 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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