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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조 시기 충절의 화신 ‘악비(岳飛)’에 대한 인식


2023-03-28      


악비(서기1103~1142년), 자는 붕거(鵬舉), 중국 남송시대의 저명한 군사가이다. 악비는 금(金)나라에 저항하는 일에 평생을 바쳤다. 지휘한 전투만 수백 번이고 적은 병력으로 많은 승리를 거둔 때가 많았으며 북벌에 나서 잃어버린 중원을 되찾아 송나라 고종은 ‘정충악비(精忠岳飛)’라고 쓴 친서를 포상으로 내렸다. 그러나 얼마 뒤 고종과 재상 진회(秦檜)는 금나라와의 평화 회담을 주장하며 악비를 불러들였고 모함해 감옥에 가뒀다가 끝내 그를 살해했다. 효종 때에야 명예를 회복하게 되어 중국인은 악비하면 비통한 감정을 많이 느낀다. 악비는 시문과 서예에도 능해 수많은 명작을 남겼다. 또한 악비의 어머니가 악비의 등에 ‘진충보국(盡忠報國)’ 네 글자를 새겼다는 일화는 모르는 중국인이 없을 정도다.


악비 이야기 유입과 조선조 시기 악비에 대한 추앙

중국 남송 이후 악비 이야기가 사서와 문집에 수록되기 시작했고 특히 명나라가 악비를 추종하고 선전하자 악비 이야기가 화본(話本), 소설에 많이 등장했고 전통 희곡으로도 만들어졌다. 지금도 중국인은 악비 이야기를 잘 알고 좋아해 드라마와 영화 등 현대 작품으로도 각색됐다.


사료에 따르면 남송과 동시대였던 고려인은 악비에게 큰 관심이 없었다. 조선조 시대에 명나라의 서적과 문헌이 대량 유입되면서 사람들이 악비를 알게 됐다. 그중 <정충록(精忠錄)>은 대표적인 서적이다. <정충록>은 명나라인이 악비의 사적과 저술, 사후에 이뤄진 좋은 평가를 담은 책, 추모 시문을 담은 기념집으로 글과 그림이 많고 내용이 풍부하다.


조선에 유입된 <정충록>은 큰 관심을 받았다. 조선 조정은 여러 차례 인쇄해 여러 동활자 판본이 만들어졌다. 선조 때에는 <정충록> 악비묘에 기재된 것을 참고해 이여송 생사당의 제물을 마련했다. 눈에 띄는 점은 당시 조선에서 간행된 <정충록>에 문신 류성룡이 직접 서문을 썼다는 것이다.


영조는 <정충록>을 다 읽고 악비의 ‘충의와 절개’를 칭찬하면서 악비의 문장을 찾아오도록 명령하고 관리를 파견해 제사를 지내게 했다. 말년의 영조는 병든 몸을 겨우 일으켜 소관(素冠)하고 앉아 악비를 위한 제문을 써 존경을 표시했고 <정충록>을 간행하라고 명령했다. 순조가 악비에게 호기심을 보이자 대신 홍면섭(洪冕燮)이 악비에 대해 설명하면서 예전에 책에서 악비 사당 그림을 봤는데 사당 밖에 진회 등 간신이 꿇고 있는 조각상이 있었다고 말했다. 필자에 따르면 홍면섭이 봤던 책은 <정충록>일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정충록> 외에 <송사(宋史)> 등 각종 역사서도 악비를 이해하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숙종은 <송사·악비전(宋史·岳飛傳)>을 읽고 ‘천추의 열사’라며 감탄하면서 악비를 평안도 영유현 무후사에서 합향하라고 명령했다. 영조는 남송의 명신 문천상을 영유 무후사에 합사하도록 했다. 1763년 영조는 <송원통감(宋元通鑒)>을 읽고 악비의 불행을 더욱 동정하게 되어 직접 제문을 써서 영유 무후사에서 제사를 지내고 ‘삼충사(三忠祠)’라는 이름을 직접 써서 하사했다.


정조는 <송사전(宋史荃)> 집필과 교정을 직접 주재했다. 정조는 악비가 문무를 겸비한 인재라고 생각했다. 조선 중기 유학자 김우급은 <독송사(讀宋史)>라는 시에서 “지사천년공강개. 청편종일루무궁(志士千年空慷慨. 靑篇終日淚無窮)”이라고 하면서 악비의 행적에 대한 감동을 표현했다.


조선조 시기 악비의 ‘충효’ 이미지에 대한 흠모

조선조 시기는 유교를 국교로 세워진 나라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충신 효자’의 특징을 지닌 악비를 매우 중요시 여겼다. 1451년 의정부는 심온의 명예 회복과 시호 추서를 건의하면서 악비가 송나라 효종 때 명예를 회복한 사실을 근거로 들었다. 이로써 악비의 역사적 의미가 오래전부터 조선 조정에 들어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학자 김시습은 악비의 ‘충신’ 이미지를 숭상하고 <악비전(岳飛傳)>, <악비찬(岳飛贊)>, <악왕묘(岳王廟)> 등 시문을 남겼다.


성종은 사서를 읽고 송나라가 중흥하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했다. 문신 이승소는 성종에게 송나라가 쇠락한 이유는 악비 같은 충신을 중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고 성종은 이 말에 동의했다. 중종은 아버지보다 악비에게 더 흥미를 보여 대신들과 자주 송사(宋史)를 토론했다. 김전은 남송이 악비를 중용하지 않아서 국력이 되살아나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한형윤은 악비가 자신을 해치려는 진회의 모함을 분명히 알면서도 황제의 명령이기때문에 도망치지 않고 당당하게 죽음을 맞이했으니 충심이라고 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대사헌 이항은 중원을 회복하겠다는 악비의 뜻이 성공하지 못한 이유는 진회가 송 고종을 미혹했기 때문이라며 중종은 반드시 소인을 경계하고 충신을 중용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조선 효종과 송나라 효종은 묘호도 같고 ‘북벌’을 주장했기 때문에 악비 이야기가 특히 와닿았다. 효종은 송 고종이 너무 심했다면서 악비가 마음에 안 들면 관직만 박탈하면 되지 죽일 필요는 없었다고 생각했다. 당시 송시열은 송 고종이 악비를 살해한 것이고 지금까지도 백성들이 악비의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으니 효종은 충신과 간신을 잘 구별해 후세의 비난을 받지 말라고 일깨웠다.


조선조 시기 악비 ‘명장’ 이미지에 대한 추앙

‘충효’ 외에 악비는 탁월한 군사 재능으로도 유명하다. 조선의 역대 통치계층은 그가 남긴 군사 경험과 전쟁법에 주목했다. 무신 김종서는 세종에게 군사훈련을 강화해야 한다고 건의하면서 악비의 부대가 대단했던 이유는 평소 훈련이 잘 돼 있고 악비의 아들이 잘못을 저질렀을 때도 군법의 심판을 받을 정도로 군법이 엄격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선조는 악비 문집을 읽고 “악비가 용감하게 나서면 신들린 것 같다”고 평가했다. 1594년 선조는 사병을 엄선해 훈련시키라고 명령하면서 이는 악비가 적은 병력으로 많은 승리를 거둔 경험을 참고한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 한 신하가 악비가 한 것처럼 도적들을 훈련해 정규군에 편입시키면 군대를 충원하면서 사회 안정 작용도 할 것이라고 건의했다. 17세기에 이르러 문신 이귀는 인조에게 병사가 많은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며 악비가 수천의 군사로 적을 물리친 것을 예로 들어 군대의 수보다 질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숙종 시기 무신 이기하는 군사 훈련에 악비의 진법을 채택해 전차를 만들고 한쪽은 긴 창을, 다른 쪽엔 단검을 이용했다. 1710년 안정기도 악비의 방법을 참고해 배외갑(背嵬甲), 마찰도(麻劄刀), 병거(兵車) 등 기계를 제작했다. 이후 문신 서영보는 정조에게 악비의 ‘연수(練手), 연담(練膽), 연족(練足)’의 ‘삼련지법(三練之法)’을 훈련해 군대의 자질을 높여야 한다고 건의했다.


이것뿐만이 아니라 조선의 많은 무신이 악비를 모델로 삼거나 어떤 사람을 조선의 ‘악비’에 비유했다. 무신 남이는 역모를 꾸민다는 모함을 받자 예종 앞에서 땅에 머리를 박으며 결백을 주장하면서 “신은 충의지사로 평생 스스로를 악비라고 자신했는데 어떻게 그런 일을 하겠습니까?”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는 결국 사형에 처해져 악비와 비슷한 운명을 맞이했다. 300여 년 뒤 순조 때가 돼서야 명예를 회복할 수 있었다.


효종은 이순신의 순절에 감동하고 이순신을 ‘악비와 같다’고 했다. 이 밖에 임진왜란 시기 의병장 김덕령이 모함으로 억울하게 죽자 광주 백성들은 그를 악비에 비유하며 사당을 짓고 제사를 지냈다. 선조 시기의 무신 유형과 그의 손자 유병연은 악비가 등에 글을 새긴 것을 모방해 임금에게 충성하고 나라에 보답하겠다는 결심을 되새겼다. ‘악비’의 문화적 의미가 시간과 민족, 국경을 뛰어넘어 조선조 사람들의 마음에 영웅으로 자리잡았다고 할 수 있다.


글|위셴룽(喻顯龍), 상하이(上海)외국어대학 글로벌문명사연구소 전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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