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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칭, 중한 100년 인연을 잇는 아름다운 산성(山城)


2019-09-19      

공중에서 내려다 본 충칭의 모습  사진/ VCG

중국인에게 있어 충칭(重慶)은 줄곧 동경의 대상이었다. 기름진 들판 위에 자리잡은 ‘천부지국(天府之國)’ 충칭. 파산유수(巴山渝水)는 이곳에 생명을 심어주었고, 파촉문화는 이곳에 천 년의 숨결을 불어넣었다. 한국인들에게도 충칭은 이야기 거리가 많은 곳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장렬했던 역사가 남아있는 곳으로, 중한 양국 국민의 혁명우정을 간직하고 있다. 세계적으로도 충칭은 매력적인 도시다. ‘일대일로(一帶一路)’의 중요한 중추이자 내륙개방의 고지(高地)다. 또한 동서융합·남북형통(南北亨通)의 거점으로 개방의 길을 걷는 중국의 새로운 이야기들을 써내려가고 있다.

고대 충칭의 성문(城門) 중 하나로 창장과 자링강이 만나는 지점에 위치한 훙야둥은 쓰촨과 충칭의 전통색 짙은 건축물과 토속적인 분위기로 밤이 되면 언제나 사람들로 북적인다. 사진/VCG

관광의 도시 
처음 충칭을 방문했을 때 가장 먼저 느끼게 되는 것, 바로 ‘산성’의 특징이다. 충칭의 아름다움은 인접한 산과 물의 지리적 구조에서 시작된다. 끝없이 뻗어있는 파산(巴山)과 대지를 가로지르는 유수(渝水), 그리고 도시를 감싸 안은 우뚝 솟은 고산(高山)….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 물 위에 떠있는 듯한 느낌을 갖게 한다.

충칭은 흔한 길마저 아름답다. 산세를 따라 자리잡은 구조라 충칭의 도로는 부드럽게 굽이져있다. 언덕을 오르는가 싶다가도 어느새 내리막길이 나오고, 굽이진 길을 걷다 보면 입체교차교 위를 지나고 있으니 동서남북을 분간하기가 쉽지 않다. 어떤 이는 우스갯소리로  “충칭의 도로는 복잡하면서도 신기하다. 길을 잃기 참 쉬운데, 길을 잘못 들으면 어느새 충칭 ‘일일 관광’을 하게 된다”고 말한다. 충칭 여행에서 가장 재미있는 교통수단은 경전철이다. 높은 빌딩숲과 용솟음치듯 흐르는 강물 사이를 가로지르는 경전철을 타면 충칭의 화려함과 아름다움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지나는 곳곳마다 아름다운 경관이 펼쳐지는 것이 마치 화랑을 걷고 있는 듯한 기분을 들게 하는데, 한 시도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다. 

충칭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간은 바로 저녁이다. 땅거미가 내려앉고 꺼져있던 조명이 하나씩 켜지기 시작하면, 충칭의 아름다움이 천천히 수면 위로 떠오른다. 훙야둥(洪崖洞)은 충칭에서 야경이 가장 아름다운 곳이다. 누리꾼들에 의해 현실판 ‘센과 치히로’라 일컬어지기도 하는 이곳은 충칭만의 이색적 ‘등화(燈火)’를 가장 잘 볼 수 있다. 눈부신 불빛과 신비로운 댜오자오러우(吊腳樓) 등 독특한 구조물들이 충칭만의 매력을 더욱 배가시킨다. 번화가의 화려한 야경을 중심으로, 일반 주택들의 불빛을 배경으로, 여기에 간선도로와 교량의 조명까지 뻗어나가면서 충칭은 예측할 수 없는 밤의 경관을 연출한다. 곳곳을 수 놓은 화려한 조명은 우주를 메운 수 많은 별처럼 혼연일체가 되어 오색의 빛깔로 서로를 비추며 환상과도 같은 장면을 만들어낸다. 

어느 지역에나 저마다의 전통 먹거리와 기념품을 파는 옛 거리가 있기 마련이다. 충칭에서는 츠치커우(磁器口)가 바로 그러한 곳. 누군가는 “석판로(石板路), 천 년의 츠치커우”라고 말하기도 했다. 츠치커우는 송(宋) 대에 조성되기 시작하여 지금까지 1200년의 역사를 이어오고 있다. ‘파유(巴渝) 제일의 옛 마을’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이곳은 옛 충칭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다. 이곳의 옛 건축물들은 옛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있다. 소박하면서도 호방한 분위기, 푸른색의 넓적한 돌이 깔린 10여 갈래의 골목들이 주요 도로를 이루고 있고, 상점들이 빼곡한 주요 거리는 언제나 시끌벅적하다. 이곳에서는 또 정통식 충칭 훠궈(火鍋)와 쏸라펀(酸辣粉)을 맛볼 수 있어 혀끝으로 얼얼함(麻)과 매운 맛(辣)이 교차하는 충칭의 운치를 느낄 수 있다. 

충칭은 중국 ‘3대 화로’ 중 하나로 꼽힐 정도로 뜨거운 곳이지만, 여름철에는 오히려 피서지로 유명하다. 충칭 동부의 우룽(武隆) 선녀 국가삼림공원풍경구에서는 고산초원의 시원함과 푸르름을 만끽할 수 있고, 충칭 난촨(南川)구의 진포산(金佛山)에서는 ‘카르스트 지형’의 매력을 체험할 수 있다. 겨울에 이 두 곳을 찾는다면 충칭의 ‘빙설제(冰雪季)’를 즐길 수 있다. 눈과 얼음의 세계와 고산의 온천이 이곳을 찾는 이들에게 잊을 수 없는 추억을 선사할 것이다. 

충칭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 전시관  사진/ VCG

혁명의 도시 
충칭은 중한 양국의 혁명투쟁 추억을 간직한 도시다. 이곳은 항일전쟁 시기 중국의 제2의 수도였고,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6년간 머물렀던 곳이기도 하다. 그 당시는 중국 항일전쟁 역사에서 가장 힘든 시기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게는 독립운동 전개에 있어 가장 중요하고 가장 활약했던 6년이었다. 그래서 충칭은 중한 양국에 있어 중요한 의미를 갖는 곳이다. 

1940년 9월, 치장(綦江)에서 충칭 시가지로 이전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양류제(楊柳街)와 스반제(石板街)·우스예샹(吳師爺巷)·롄화항관(蓮花行館) (현재는 위중(渝中)구 롄화츠(蓮花池) 38호, 충칭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 유적지)에서 잇따라 업무를 보았다. 충칭에서 임시정부는 비밀리에 전개했던 지하활동을 공개활동으로 전환했고, 그 중 가장 큰 업적이 바로 광복군 창설과 좌우연합의 임시정부 수립이었다. 

1940년 3월 1일 ‘3·1운동’ 기념일을 맞아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중국 측에 한국 광복군 창설 지원을 호소했다. 임시정부 측의 이 같은 계획은 5월 중국 측의 동의를 얻었고, 같은 해 9월 17일 한국 광복군 창설식이 충칭 자링(嘉陵)호텔에서 열렸다. 뿐만 아니라 중국정부는 한국 광복군이 또 다른 한국 독립운동세력이었던 조선의용군을 개편하는 데 협조했고, 새롭게 편성된 신 한국광복군을 대상으로 훈련을 진행했다. 

충칭에서의 6년은 한국의 많은 독립운동세력들이 하나로 통합되는 중요한 시기이기도 했다. 1942년 10월 25일 열렸던 대한민국 임시정부 34기 의회에서 한국독립당·조선민족혁명당·조선민족해방동맹·조선혁명자동맹이 공동 참여한 임시정부가 구성됐다. 이로써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군사적·정치적으로 통일되었다. 좌우세력 또한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통일전선을 구축했으며, 임시정부는 한민족의 반일 독립운동을 대표하는 최고 권력기구가 되었다. 

이 시기, 중국 국민정부는 식품과 자금 부분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적극 지원했다. 국제적으로도 중국 국민정부는 국제사회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인정할 수 있도록 적극적인 조치를 취했으며, 동시에 한민족이 국제적인 독립운동을 펼칠 수 있도록 원조했다. 그 중 가장 중요한 성과가 바로 중·미·영 3국 정상이 1943년 발표한 <카이로 선언>에 ‘한국을 자유독립국가로 만든다’라는 내용이 포함된 것이다. 이는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중요한 요구사항을 만족시킨 것이었다. 

이 밖에도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중국에서 중국공산당의 많은 지지를 얻었다. 먼저 임시정부가 충칭에 머무르는 동안, 저우언라이(周恩來)·둥비우(董必武)·덩잉차오(鄧穎超) 등 중국공산당 대표는 임시정부가 개최한 집회활동에 여러 차례 참석했다. 중국공산당 기관지인 <신화일보(新華日報)>는 임시정부 및 조선반도(한반도) 관련 중대사건, 항일 독립운동투쟁 관련 소식을 다수 보도, 조선인의 민족독립 쟁취를 위한 구국운동을 객관적이고 사실적으로 반영했다. 이와 관련해 백범 김구의 아들 김신은 이같이 회상했다. “충칭에서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 모두 우리와 접촉했다. 우리와 저우언라이는 서로 식사에 초대했다. 1945년 마오쩌둥(毛澤東)이 충칭에 왔고, 구이위안(桂園)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원들과 만났다. 매년 3월 1일 우리가 ‘3·1운동’ 혁명 기념일을 경축할 때마다 공산당에서도 사람을 파견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본국으로 돌아간 뒤 청사였던 롄화항관은 여관·학교·주택 등으로 사용되었다. 1980년대에 이르러 한국 학자들이 당시 임시정부에서 일했던 독립운동가들의 기억을 토대로 철거 직전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유적지를 찾아냈다. 중한 양국 학자들의 공동 노력을 통해 충칭시 치씽강(七星崗) 롄화츠 38호에 위치한 건축물들이 그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중국 내 최후의 청사였음을 최종 확인했다. 

1992년 3월 19일 중한 양국의 수교 전날 밤,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는 충칭시정부에 의해 시급(市級) 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었다. 1992년 중한 수교 이후 중한 양국의 우호 협상을 통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는 중한 양국 인민이 함께 일본에 맞섰던 역사적 증거로서 양국의 공동 출자로 복원되었다. 1995년 8월 11일 충칭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 전시관이 정식 완공되어 대외에 개방되었다. 

충칭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 전시관은 중국과 조선반도 국민의 문화교류 및 우의증진에 있어 결코 없어서는 안될 매개역할을 해오고 있다. 한국의 수 많은 ‘거물급’ 인사들의 발길이 이어졌던 가운데, 2017년 12월 16일 문재인 한국 대통령 일행이 충칭을 방문했다. 당시 문 대통령은 임시정부 요원 및 각 정부기관의 집무실을 둘러본 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우리의 뿌리입니다, 우리의 정신입니다”라는 글귀를 남겼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앞둔 2019년 3월 29일에는 이낙연 한국 총리가 충칭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를 방문함으로써 충칭과 한국의 인연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주었다. 

 1945년 11월 3일, 한국 환국을 앞두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원들이 충칭 청사에서 기념 촬영을 하고있다. 사진/ 한국 독립기념관 제공

미래의 도시 
중한 수교 이래 충칭은 줄곧 중한 양국 도시 간 외교의 선두에서 활약해왔다. 2007년 6월 안상수 당시 한국 인천광역시 시장 일행이 충칭을 찾아 충칭시와 우호도시협정을 체결했다. 이후 충칭과 한국 인천시 공무원들은 상호 파견되어 학습하고 교류했다. 충칭의 고등교육기관들은 인천의 많은 학자 및 유학생들을 맞이했으며 양측의 교육 교류프로젝트 또한 증가했다.

충칭과 한국 간 무역협력은 특히 주목을 받는 대목이다. 중국의 중요 중심도시·창장(長江) 상류지역 경제허브·국가 중요 현대제조업 기지·서남지역 종합교통허브 및 내륙개방고지 등의 건설 과정에 있어 충칭은 경제구조 업그레이드에 박차를 가하고 있고, 국제 사회와의 협력을 적극 모색하고 있다. 

2010년 6월, 중국 국무원이 승인한 량장(兩江)신구가 정식으로 현판식을 가졌다. 량장신구는 상하이(上海) 푸둥(浦東)신구와 톈진(天津) 빈하이(濱海)신구의 뒤를 이은 중국의 3번째 국가급 개발신구다. 중국 상무부의 적극적 추진 하에 2011년 9월 중한산업지구가 이곳 충칭 량장신구에 들어섰다. 중한산업지구는 자동차 및 전자산업을 중점 육성하고, 한국의 우수 제조업 및 문화 혁신사업을 도입하기 위해 조성된 지역이다. 충칭의 내륙개방 지위가 날로 가시화함에 따라 한국과 충칭 간 무역교류가 더욱 빈번해지고 있으며, 충칭과 량장신구에 투자하는 한국기업들 역시 늘어나고 있다. 량장신구는 한국의 가장 중요한 중국 내륙 투자 대상지역이 되었다.  

최근 ‘일대일로’ 구상의 등장과 함께 충칭은 새로운 발전의 전기를 맞이했다. 창장 황금수로·중국-유럽열차(충칭) 등을 기반으로 한 개방 통로가 전면 마련되고, ‘일대일로’와 연계한 국제 육·해 무역의 새 통로 건설이 국가전략으로 승격된 가운데, 내륙 개방의 고지로서 빠르게 부상하고 있는 충칭이다. 충칭은 또한 한국과의 협력에 있어서도 새로운 기회를 포착했다. 일례로, 유럽의 상품이 한국으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위신어우(渝新歐)’ 열차를 통해 12일을 달려 충칭에 도착한 뒤 다시 4시간의 항공운송을 통해야 한다. 이러한 ‘철도 12일+항공 4일’의 철도·항공 연계운송 모델이 구축됨으로써 운송비용을 절반 이상 절감할 수 있게 되었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은 충칭에 대해 ‘양점(兩點) 위치 설정’ ‘양지(兩地) 양고(兩高) 목표’ ‘3개 역할 발휘’ 등과 같은 중요한 주문을 했다. ‘양점’ 설정은 서부대개발의 중요한 전략적 거점과 일대일로 및 창장경제벨트과의 연계점을 뜻한다. ‘양지’ 목표는 내륙 개발 고지 및 자연경관이 수려한 아름다운 도시 건설 가속화를, ‘양고’는 고품질 발전 적극 추진과 고품질 생활 창조를 의미한다. ‘3개 역할’ 발휘는 신시대 서부대개발에서의 지지역할, 일대일로 공동 건설에서 선도역할, 창장경제벨트 녹색발전에서의 시범역할 발휘를 의미한다.

한국 측에서도 충칭의 발전 가능성을 낙관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7년 말 충칭을 방문했을 당시 “오늘의 충칭은 놀라운 성장률을 기록하고 있다. 충칭의 새 역사를 많은 한국기업들이 함께 만들고 있다는 것이 매우 뜻 깊고 자랑스럽다. 한국정부는 한·중 기업 간 장점을 결합한 제3국 공동진출을 적극 지원하겠다. 충칭을 비롯한 중국 주요 지방정부와의 실질 협력을 강화해 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많은 이들의 바람이 깃들어 있는 곳인 충칭은 이제 개방의 길 위에서 미래의 청사진을 그리고 있다. 


글| 장진원(張勁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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