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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대를 멘 산골선생님


2021-08-16      글|양윈첸(楊雲倩), 란산촨(冉珊川)

       

장위군 사진/ 궈사사(郭莎莎)

내가 가르친 학생이 산골에서 나가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가치가 있습니다


현 정부 소재지에서 70여 km 떨어진 허난(河南)성 난양(南陽)시 전핑(鎮平)현 헤이후먀오(黑虎廟)촌은 주위가 온통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마을 사람들이 산을 한번 나가려면 해발 1600여 m의 바리포(八里坡)를 넘어야 하고 험하고 구불많은 산길을 걸어야 한다. 41세의 장위군(張玉滾)은 산으로 겹겹이 둘러싸인 헤이후먀오 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다. 20년 동안 그는 학생 600여 명을 가르쳤고 31명을 대학교에 보냈으며 형편이 어려운 학생 300여 명을 도와주었다.

 

“내가 산골 출신이라 이곳의 어려움을 잘 안다. 내가 가르친 학생이 하나둘 산골에서 나가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가치가 있다.” 도로가 없는 산골에서 장위군은 학생들의 교재와 학습 용품을 멜대로 지고 산을 넘어 운반했고 또한 이것으로 아이들의 희망을 가져왔다.

 

깊은 산에 남다

20년 전, 헤이후먀오 초등학교의 재산이라고는 10여 칸으로 된 흙집과 수십 년 동안 교체되지 않은 낡고 오래된 책상과 의자뿐이었다. 게다가 교사 6명 중 4명이 퇴직을 앞두고 있었다. 새로운 교사를 찾지 못하면 아이들은 학업을 그만두어야 할 상황이었다. 그해 이 초등학교 출신인 장위군은 사범학교 중등 전문학교를 갓 졸업한 상태였다. 교장 선생님은 이 학교 출신인 장위군을 떠올리고 그를 여러 차례 찾아와 그가 학교로 돌아와서 학교 교사팀에 합류하기를 바랐다.

 

21살이던 장위군은 연해지역에서 구직활동을 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교장 선생님의 끈질긴 권유에 못 이겨 학교를 ‘한번 둘러보기’로 했다. 이 ‘둘러보는’ 것이 장위군의 인생을 바꿨다. 장위군은 아직도 그때 교실에 들어갔던 장면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아이들의 앳된 얼굴, 기대와 호기심으로 가득한 눈빛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어렸을 때의 내 모습이었다.” 장위군은 그 자리에서 학교에 남겠다고 승낙했다. 매달 겨우 30위안의 보조금과 연말에 양식 50kg를 받기로 했다.

 

20년 동안 학교로 젊은 선생님들이 한 차례, 또 한 차례 왔었다. 그러나 산골의 열악한 환경과 도로 사정, 박봉에 한두 학기가 지나면 모두 떠났다. 장위군만이 계속 자리를 지켰다. 헤이후먀오 초등학교에 오고 몇 년은 그도 떠날 생각을 했다. “산골 선생님은 의리상 떠날 수 없는 자리다. 다른 지역의 상황도 비슷할 것이다.” 장위군은 이곳에 하루만 있어도 자신의 책임을 다해야 한다고 말했다.

 

멜대를 이어받다

헤이후먀오 초등학교에는 대대로 내려오는 가보가 있다. 오래 써서 반질반질 윤이 나는 2m 길이의 멜대다. 이 학교 선생님에게 이 멜대는 평범한 것이 아니다. 전(前) 교장 선생님이 수십년 동안 사용한 것이기 때문이다. 2006년 이전까지 헤이후먀오 초등학교 학생의 교재와 생활용품을 진(鎮)에서 멜대로 지고 올라왔다. 헤이후먀오에서 가오추(高丘)진까지는 십여 시간을 걸어가야 했고, 이 길을 교장 선생님은 멜대를 지고 오갔다. 이 학교에서 교사를 시작한 초반 5년 동안 장위군은 선배 선생님의 ‘멜대로 책을 실어 나르는’ 일을 이어받아 교장 선생님이 걸었던 길을 걸었다.

 

2006년, 헤이후먀오로 향하는 도로가 개통돼 산골 사람들의 외출 방식에 마침내 변화가 생겼다. 장위군은 아껴서 모은 돈으로 자전거 한 대를 구입했다. 그 자전거를 타고 진으로 나가 학교에 필요한 쌀과 채소, 교재를 사와 더 이상 멜대를 메지 않아도 됐다. 이후 그는 다시 돈을 모아 오토바이를 구입했다. 몇 년 동안 자전거 4대가 고장이 났고 오토바이 바퀴를 수도 없이 수리했다. 최근 몇 년 들어 사정이 조금 나아져 장위군은 학교와 아이들을 위해 몇 천 위안의 돈을 들여 봉고차 한 대를 구입했다.

 

만능 선생님

학교 환경이 열악하고 교사가 부족해 장위군도 자연스럽게 만능 선생님이 돼야 했다. 어문, 수학, 영어, 도덕, 과학 등에 모두 정통해야 했고 음악, 체육, 미술 등 과목도 가르칠 수 있다. 매 학기 적어도 4과목 이상을 맡았다. “한 과목도 차질을 빚어서는 안 된다. 맡은 과목을 잘 가르치기 위해 온갖 방법을 다 써야 한다.” 이것은 장위군이 스스로에게 정한 ‘철칙’이다. 2014년 장위군은 헤이후먀오 초등학교의 신임 교장이 돼 학교의 교육연구와 개선 작업 전체를 책임지게 됐다.

 

장위군은 수학 시간에는 직관적 교학법을 이용해 아이들과 함께 시계 문자판, 입방체, 직육면체 등 교구를 만들었다. 과학 시간에는 아이들을 데리고 야외로 나가 관찰하고 스스로 실험을 하도록 하여 대자연에 대한 흥미를 유발했다. 미술 시간에는 밖으로 나가 산과 나무, 동물을 그리게 했다. 체육시설이 부족해 아이들과 직접 놀이를 하고 등산을 했다.

 

헤이후먀오 초등학교는 기숙사형 학교로 평소 많은 학생이 학교에 머물기 때문에 선생님은 아이들의 지식 교육은 물론 생활도 책임져야 한다. 20년 동안 장위군은 비와 눈이 오면 직접 아이들을 통학시켜 안전사고가 일어난 적이 한번도 없다. 산골에서는 중간에 학업을 그만두는 학생이 많았다. 그런 학생을 위해 장위군은 자기 월급으로 학비를 내주었다. 적은 월급으로 300여 명의 학생을 도와 가난 때문에 학업을 포기하지 않도록 했다.

 

희망을 지킨다

깊은 산골에 위치한 헤이후먀오 초등학교는 매 학기 마다 선생을 구하느라 골머리를 앓는다. 그래서 장위군도 예전 교장 선생님처럼 많은 공을 들였다. 2009년 여름방학, 선생님 몇 분이 퇴직을 앞두자 장위군은 예전 교장 선생님과 같은 처지에 놓이게 됐다. 그는 심사숙고한 끝에 자신의 조카 장레이(張磊)를 학교로 돌아오게 하기로 결심했다.

 

몇 차례 통화 후 돌아올 생각이 없었던 장레이는 고민하기 시작했다. 헤이후먀오 초등학교에 다닐 때 삼촌이 자신을 업고 등하교를 했던 장면을 잊을 수가 없었다. 이제 아이들이 그를 필요로 하는데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 장레이는 아내 위차오펑(余超鳳)과 함께 산촌의 교사가 됐다.

 

최근 몇 년간 산촌의 교육 현황이 사회의 큰 관심을 받았다. 그 뒤로 선생님 8명이 (선후로) 헤이후먀오  초등학교에 와서 교편을 잡게 되면서 교사 부족 문제가 해결됐다. 현재 헤이후먀오 초등학교에는 교사가 11명이고 그중 청년 교사가 4명이다. 전국 각지 10여 개의 학교에서 헤이후먀오 초등학교로 교사를 파견에 교육을 지원했고, 헤이후먀오 초등학교 선생들을 허난(河南)성 정저우(鄭州)와 난양(南陽) 등지의 학교로 초청해 교육 연구 활동에 참여하도록 해주었다.

 

요즘 장위군을 아주 기쁘게 하는 일은 교육에 대한 정부의 투자가 확대되면서 헤이후먀오 초등학교의 교육 환경도 개선되고 있다는 것이다. 2017년 새 기숙사가 완공됐다. 2018년 9월 멀티미디어 설비가 마련돼 교사가 부족한 미술, 음악 등 과목을 인터넷을 통해 전국의 양질의 공개수업을 학습할 수 있게 됐다. “새로 지은 소년궁(少年宮)입니다. 여기는 피아노실이고, 여기는 도서 열람실이고, 여기는 실내 체육관입니다…….” 장위군이 소개를 해주었다.

 

근래 장위군은 교육의 질 향상에 신경을 가장 쓰고 있다. “학교 서포트를 적극 이용해 명문학교의 선진 교육 경험을 도입하여 우리 학교에 적용하도록 해야 한다.” 산골 아이들도 대도시 아이들과 동등한 교육을 받기를 바라는 그의 바람이 조금씩 이루어지고 있다. 

 

 

글|양윈첸(楊雲倩), 란산촨(冉珊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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