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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조와 ‘태을(太乙)’ 신앙


2021-01-14      

<세종실록지리지>

중국의 도교 문화는 조선반도(한반도)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 중에는 ‘태을’ 신앙도 있다. ‘태을’은 철학적 의미인 ‘도(道)’에서 출발했다. 즉 천지에 존재하는 법칙이다. 이후 도교의 가장 높은 신 중 하나로 구체화돼 ‘태을구고천존(太乙救苦天尊)’이라고 불렸다. 도교에서는 ‘태을’ 신앙이 가진 술법과 도법을 세상을 인식하고 해석하는 비법으로 삼고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중국 당나라 때의 법전 <당률소의(唐律疏議)>에서는 백성이 사사로이 ‘태을’ 술법을 배우는 것을 금지해 민간에서 ‘태을’로 점을 치고 정치 선동을 하는것을 예방하려 했다. 그러나 이것도 ‘태을’에 대한 민간의 숭배와 추종을 막을 수 없었다.
 
‘태을’ 신앙은 당송 시기에 조선반도에 전파됐다. 고려 시기 군대에 직업 군관을 설치해 ‘태을’ 술법 점술을 전담하도록 하고 전쟁 결정에 참고하도록 했다. 조선왕조의 국왕과 대신은 유교를 국교로 삼았지만 ‘태을’ 신앙에 대한 열정은 여전했다. 1415년 조선에 가뭄이 발생하자 예조판서 이원은 승려를 모셔 기우제를 지내자고 건의했다. 그러나 태종은 승려는 기우제를 모른다고 여기고 대신 황자후를 파견해 도교 의식인 ‘태을초(太乙醮)’를 진행했고 결국 비가 내렸다. 태종은 이를 매우 기뻐해 ‘태을’ 관련 경전을 적극 학습하고 예조에 ‘태을’을 ‘천존’으로 높이도록 명했다.
 
조선 세종은 즉위 후 ‘태을초’를 자주 진행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당시 민간에서 ‘태을구고천존’이 지리산에 산다고 전해졌다. 지리산은 신선들이 모이고 용들이 사는 신성한 산이다. 세조는 중국의 전통 도교 역학 경전인 <오행정기(五行精紀)>, <삼진통재(三辰通載)>, <태을육임둔갑(太乙六壬遁甲)>, <태을금경식(太乙金鏡式)> 등 저작을 최호원과 안효례 등에게 하사하고 꼼꼼하게 연구하도록 명했다.
 
1593년 조선 선조는 명나라로 가는 사신 김수에게 류 씨 성을 가진 인사를 조선으로 모셔오도록 했다. 선조는 그가 천문 지리에 능하고 ‘태을’ 술법을 알아 임진왜란을 갓 겪은 조선에 방향을 제시해주길 바랐다.
 
이 밖에 중국 송나라 인종이 태을로 기우제를 지낸 것이 고사로 조선 통치자들에게 자주 회자됐다. 예를 들어 세조 4년, 대신들은 이를 이유로 진정한 군주만이 하늘을 대리해 세상 만물을 관리할 수 있고 그래야 ‘천자’라고 불릴 수 있다고 지적했다. 중종 32년 조선에 가뭄이 심각하자 중종은 대신들에게 “과거 송 인종이 태을궁에서 기우제를 지냈으니 나도 친히 기우제를 지내겠다”고 말했다.
 
물론 ‘태을’ 술법이 미래를 예측한다는 것을 믿고 조선 후기 ‘태을’ 신앙을 이용해 정치 여론을 만들고 조정의 기강을 흔들려는 세력도 나타났다. 숙종 때 대신 신범화, 정원로 등은 민간 술사와 결탁해 ‘태을’ 술법으로 국왕이 죽을 것이라고 판단해 역모를 꾀했다. 그러나 이것은 조선 통치자의 ‘태을’ 신앙에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근대에 이르러 ‘태을’을 신봉하는 종교 단체가 민간에서 활약하기 시작했고 식민시기에는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해 일제에 맞서 투쟁하여 조선반도의 ‘태을’ 신앙에 강렬한 한 획을 그었다.
 
  
글|위셴룽(喻顯龍), 상하이(上海)외국어대학교 글로벌문명사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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