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위치 :  >> 특집 >> 중한 수교 30주년 특별보도 >> 본문

“중한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운명공동체” 재중 한국인이 전하는 신장 이야기


2022-08-16      


임준태 회장(왼쪽 네 번째)이 신장위구르족 친구 집을 방문한 사진이다. 사진/임준태 회장 제공


“신장위구르(新疆維吾爾)자치구는 제가 생각했던 것과는 너무나도 다른 곳이다. 이곳에서 저는 신장위구르족, 카자흐족 사람들과 같이 어울리면서 그들의 전통을 배웠고, 알면 알수록 생활의 순수하고 즐거움, 행복을 느끼게 되었다. ”


2011년, 임준태 회장은 31세에 신장에 처음 온 그때부터 신장과 인연을 맺었다. 제10대 중국한국인회 부회장을 지낸 그는 현재 한국 대통령 직속기관인 민주평화통일자문협의회 베이징(北京)협의회 공공외교위원회 위원장, 신장 커라마이(克拉瑪依) 한인회 회장을 맡고 있다. 동시에 한 성형미용병원와 의료회사의 이사도 맡고 있다. 임준태 회장은 “신장은 제 아내의 고향이자 무궁무진한 잠재력을 가진 곳”이라고 말했다.


커라마이의 첫 한국인

임준태 회장과 중국의 인연은 한 세대를 거슬러 올라간다. 그의 아버지가 중국 자동차 부품 관련 무역업을 했기 때문에 중국에 대해 잘 알고 있었으며, 중국 발전에도 관심이 많았다. 임준태 회장의 아버지는 그에게 “중국이 앞으로 더 발전할 것”이라고 말했다. 2009년, 아버지의 격려로 임준태 회장은 의사를 꿈꾸며 베이징 중의약대학교에서 중서의결합과를 전공했다. 그는 “처음 중국에 왔을 때는 중국어를 전혀 할 줄 몰랐어요. 언어를 공부하고 중국인들과 교류를 하면서 점차 중국을 이해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중국에서 공부를 하던 임준태 회장은 아내를 만나게 됐다. 신장에서 태어나고 자란 한(漢)족 아가씨는 임준태 회장의 중국 생활에 큰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우연한 기회에 그는 아내의 고향인 신장 커라마이로 함께 돌아갔다.


“저는 신장 커라마이에 정착한 첫 한국인이다. 당시 커라마이에는 한국인회가 없어 매번 한인회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우루무치(烏魯木齊)까지 4시간씩 차를 운전해야 했죠.” 커라마이에서 일하고 생활하는 한국인들이 많아지면서 커라마이에 한국인회가 생겼고 임준태 회장이 회장직을 맡게 됐다.  임준태 회장은 “현재 신장에는 한국인이 적지 않으며 대부분 무역, 음식점, 미용 등의 업종에 종사하고 있다”고 전했다.


“다른 지역보다 안전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신장을 위험한 지역이라고 걱정해요.” 신장에 오고 나서 임준태 회장은 이곳이 자신의 생각과 너무나도 다르다는 것을 느끼게 됐다. 임준태 회장은 신장이 매우 안전하며, 무궁무진한 잠재력을 가진 곳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신장의 면적은 중국 국토 총면적의 6분의 1이나 되며, 지하자원이 매우 풍부하고, 아직까지 발전되지 않는 곳이 너무나도 많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공인하는 ‘기회의 땅’”이라고 설명했다.


비즈니스 기회를 겨냥해 임준태 회장은 신장에 성형미용병원을 열었다. 임준태 회장은 “한국의 의료 미용이 발달했기 때문에 많은 중국인들이 한국에 미용성형을 하러 갑니다. 미용성형은 애프터 서비스가 중요한데 신장은 한국과 지리적으로 멀고 오가는 길이 불편하기 때문에 애프터 서비스를 충분히 받을 수가 없다”고 말했다. 2년간의 세심한 준비와 현지 정부의 지원 아래 2017년 임준태 회장의 병원이 정식으로 개업했다. 최근 몇 년간, 신장은 풍부한 자원 우위, 발전 잠재력, 빠른 발전의 강세를 바탕으로 임준태 회장과 같은 더 많은 외국인들이 창업에 투자하도록 유치하고 있다.


신장에 정착한지 10여 년, 임준태 회장은 신장의 변화와 발전을 눈으로 확인했다. 경제와 과학기술 등의 발전 외에도, 그에게 깊은 감명을 준 것은 사회 안정이다. 이는 도시가 앞으로도 오래도록 발전할 수 있는지의 여부와 거주하기 적합한지의 관건이다. 임준태 회장은 미래의 신장 관광업 발전을 낙관한다. 그는 “신장은 아름다운 경치 외에 휴양시설도 완비되어 있다. 또한 최근 신장의 여행 관광지와 휴양지가 갈수록 많아지고 있다”고 전했다.


행복한 중한 가정

임준태 회장이 막 중국에 왔을 때는 중국어도 잘 못했고 아는 사람도 없었다. 당시 아버지 친구 딸의 소개로 아내를 만나게 되었다. 그는 “천생연분이라는 말을 떠올리게 할 만큼 아내를 보자마자 다른 여성들과는 뭔가 다른 느낌을 강렬히 받았다”고 회상했다. 임준태 회장과 아내는 슬하에 두 딸을 두고 있으며, 단순하면서도 행복하게 살고 있다. 그가 창업을 할 때 아내와 가족들은 큰 응원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임준태 회장은 기자에게 최근 우리와 같은 중한 가정이 많아지고 있다고 알려 주었다. “전에는 한국 남성과 중국 여성의 결혼이 많았지만 지금은 한국 여성과 중국 남성의 결혼 늘어나는 추세이다.” 임준태 회장 부부는 평소에도 다른 중한 가정과 자주 교류하면서 서로의 경험을 공유한다. 임준태 회장은 “가정에서 자녀의 언어는 대부분 어머니와 생활 환경의 영향을 받는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한국 남성과 중국 여성이 결혼한 가정은 대부분의 자녀들이 언어적으로 어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아 중국어를 모국어로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임준태 회장은 자신의 자녀들이 어려서부터 중국어를 배우고, 크면서 한국어를 배워 두 가지 언어를 할 줄 아는 인재로 자라길 바라고 있다.


임준태 회장은 국제 결혼으로 여러 어려움이 있다고 솔직하게 털어놨다. “가장 어려운 것은 자녀의 교육 문제이다. 부모의 문화가 서로 달라 다음 세대에게 혼동을 줄 수 있는 상황들이 많죠.” 임준태 회장은 이런 상황을 변화시키기 위해 배려하는 사회 분위기가 꼭 필요하다고 말했다. “문화 차이를 인정하고 편견을 버리고 보다 더 개방적이고 배려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조성해야 한다”


임준태 회장은 중한 관계와 중한 가정의 관계는 다르지만 비슷한 부분도 있다고 보고 있다. 가정 생활 중에 다툼이 생기기도 하지만 서로에 대한 이해와 신뢰도 그만큼 깊어진다. “지리적, 역사적, 문화적으로 중한 양국은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운명공동체이다. 중한 가정의 아이들은 두 나라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미래에 양국의 우의를 증진하게 하는 가교 역할을 할 것이라 믿는다.” 임준태 회장의 말이다.


글|차오멍웨(曹梦玥)

240

< >
微信图片_20120726014049.jpg

중국의 가사 노동 교육

올 초 중국 베이징(北京)에 와서 ‘나 혼자 산다’ 생활을 하고 있다. 청소, 빨래, 설거지는 기본이고, 음식 요리와 다림질 같은 ‘고난이도’ 가사 노동도 수행하고 있다. 가끔 온라인쇼핑으로 주문한 선풍기나 프린터기 같은 가전제품 부품이 따로 분해된 채로 배송되면 적지 않게 당혹스럽다.

읽기 원문>>

‘3감(減)·3건(健)’의 각오

어느 덧 불혹(不惑)을 바라보는 필자는 건강에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베이징(北京)에 파견 온 이후로는 더더욱 그렇다. 때마침 중국에서도 웰빙 건강 식품이 인기몰이 중이라 하니 더 관심이 갔다.

읽기 원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