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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체육복 교복’ 환골탈태 성공할까


인민화보

2019-03-11      인민화보

 
 
2000년대 초반 베이징(北京)에서 유학할 때 아침 식사를 하러 기숙사를 나서면 체육복을 입은 청소년들이 삼삼오오 모여 등교하는 모습을 보곤했다. 모두 같은 체육복을 입고 있길래 학교에서 운동회를 하는 날인가보다 생각했다.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체육복을 입은 학생 행렬을 보면서 좀 의아해졌다. 친구에게 물으니 체육복이 교복이란다. 그 얘기를 들은 뒤 자세히 살펴보니 학교마다 체육복의 색상이나 디자인에 차이가 있었다. 당시에는 활동하기 편하고 교복 다릴 일도 없을 테니 좋겠다 싶은 생각이 전부였다.

10여 년이 지난 올해 초 다시 베이징을 찾았을 때도 학생들은 여전히 체육복 차림이었다. 감수성이 예민하고 외모를 가꾸는 데 관심이 많을 시기라는 점을 감안하면 체육복 형태의 교복에 불만이 많겠다는 생각이 추가로 들었다. 

중국에서는 언제부터 체육복을 교복으로 입기 시작했을까. 중국 검색 포털사이트 바이두(百度)의 설명에 따르면 1920년대까지는 제복식 교복이 유행했다. 상류층을 중심으로 일본의 영향을 받은 제복식 교복이 도입됐다. 1930년대와 1940년대에는 중국 전통 의상인 치파오(旗袍)를 변형한 형태의 교복이 대세를 이뤘다. 1950년대 들어서는 특정한 교복 형태가 사라지고 자유 복장이 대세를 이뤘다. 전 국민이 푸른색과 회색 계열의 솜옷이나 소련 복식인 레닌복을 입던 시기라 학생들도 전통적인 교복 대신 흰 셔츠에 바지나 치마를 입고 다녔다. 이후 1970년대에는 군복을 교복 대용으로 삼았다. 개혁개방이 본격적으로 추진된 1980년대의 경우 교복의 개념이 다시 등장했다. 학교마다 서로 다른 교복 디자인을 채택하고 교복이 없는 학교도 있어 통일된 기준은 없었던 시기다. 

1990년대 이후부터 체육복이 교복 시장을 석권했다. 빈부 격차에 따른 열등감을 최소화하고 평등 의식을 고취하기 위한 목적이었다는 분석이 나온다. 편하고 실용적이라는 장점도 있다. 실제 한국의 여학생들도 치마를 입는 교복이 불편해 등교하자마자 치마를 체육복 바지로 갈아입곤 한다. 다만 심미성이 떨어진다는 것이 체육복 교복의 단점으로 꼽힌다. 청소년의 개성을 억누른다는 불만과 오히려 학업에 집중할 수 있다는 부모들의 반박이 첨예하게 맞서는 배경이다. 

중국에서도 한국식 교복을 도입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한류의 영향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한국의 교복 제조업체인 형지엘리트와 스마트에프앤디 등이 중국 현지기업과 손잡고 최소 17조원 이상으로 평가되는 중국 교복 시장에 진출했다. 미세먼지 침투를 막는 교복 셔츠, 탈부착이 가능한 교복 카라, 길이를 조절할 수 있는 교복 소매 등 새로운 기능을 앞세워 중국 소비자들을 유혹하고 있다. 

중국 사회의 소득 수준과 삶의 질이 높아지면서 획일적인 체육복 교복 대신 품질이 좋고 디자인이 참신한 새로운 형태의 교복을 찾는 수요가 증가하고 있다.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하지만 교복이 부(富)를 과시하는 수단으로 전락해 학부모의 부담이 가중되는 일은 막아야 한다. 교복 가격 때문에 홍역을 치른 바 있는 한국의 사례는 참고할 만하다. 중국의 교복 문화 혹은 교복 시장이 변화의 과도기를 무사히 지나 건강하고 성숙한 단계로 진입하기를 바란다. 


글|이재호(아주경제 베이징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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