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위치 :  >> 특집 >> 중국 개혁개방 40주년 특별보도 >> 본문

리쑤핑, 中 철도운송 발전의 ‘산증인’


인민화보

2018-04-27      인민화보

리쑤핑은 장애인 승객을 위해 물을 떠다 주거나 표를 구매해주기도 하며, 짐을 들어주거나 승객을 열차까지 안내하는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사진설명) 리쑤핑이 거동이 불편한 승객의 승차를 도우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사진/ 베이징기차역 홍보과 제공

베이징(北京)기차역을 자주 찾는 사람들이라면 ‘쑤핑 안내데스크’의 존재를 모르지 않을 것이다. 노약자와 임산부, 장애인 등을 위해 마련된 안내데스크의 명칭으로, 이곳의 책임자 리쑤핑(李素萍)의 이름에서 따왔다. 베이징기차역 장기 근무자인 리쑤핑은 2015년 ‘전국 노동자 모범’으로 선정된 인물로, 승객들 사이에서는 ‘리 선생님’ ‘쑤핑 언니’ 등으로 유명하다. 2018년 춘윈(春運) 기간을 맞아 베이징역의 ‘쑤핑 안내데스크’를 방문, 그 이름의 주인공을 만났다. 
 
올해 55세인 리쑤핑은 크지 않은 체격이지만 넘치는 활기의 소유자였다. 전형적인 ‘베이징 말투’를 구사하며 명랑하면서도 소박한 멋을 풍겼다. “17살때부터 철로국(局)에서 일했으니 올해로 38년째다. 평생을 철도에 바쳤다.” 철도 유지보수 업무에서 승차서비스 업무로, 다시 열차 내 서비스 업무를 거쳐 중점 승객 서비스 업무까지 그는 거의 모든 철도서비스 업무를 맡아왔다. 철도여객운송의 발전사와 사람들 생활방식의 변화를 지켜본 ‘산 증인’인 그는 승객들의 외출에 온기와 존엄을 불어넣었다.
어머니의 뒤를 이어 ‘철도인’이 되다   
 
“1978년, 겨우 15살이었다. 그때 고등학교 입학시험이 시행됐는데, 나는 그때 바로 합격했다.” 1978년부터 시작된 개혁개방은 그의 인생궤도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당시 고등학교 입학시험제도가 막 시행되었지만 불합격률이 높았다. 그렇지만 리쑤핑은 고등학교에 진학한 우수학생 중 한 명이었다. 
 
고등학교 입학시험제도가 시행됨과 동시에 1978년 10월에는 지식청년들의 ‘하향(下鄕)운동’이 폐지되면서 지식청년들의 도시행(行)이 줄을 이었다. 리쑤핑이 인생 최대의 전환점을 맞이한 것도 바로 이때였다.  
 
“1960년대 출생자가 너무 많았다. 한 가정에서 여러 명을 낳다 보니 도시로 온 지식청년들은 일자리를 찾을 수 없었고, 그래서 많은 이들이 청년실업자가 되었다. 1980년 어머니께서 은퇴하시면서 내가 어머니의 일을 맡게 됐다.” 아직 계획경제시대였던 당시, 철도부처에서는 자녀들이 은퇴한 부모의 일을 물려받는 것이 보편적이었다. 리쑤핑 역시 고등학교를 자퇴한 후 어머니의 후임으로 철도부처에 들어갔고, 그때부터 철도와 기차, 승객과의 뗄래야 뗄 수 없는 인연을 맺기 시작했다.  
 
처음 그가 맡은 업무는 철도시설 유지보수였지만, 업무강도가 지나치게 높아 여성에게는 적합하지 않은 것이었다. 2년 뒤, 철로국의 배치에 따라 그는 여객운송부서로 자리를 옮겨 열차 승무원이 되었다. “열차 문을 여닫고, 차 내 순찰을 돌고, 청소를 하는 것이 내 일이었다.” 
 
승무원으로서의 업무가 복잡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쉬운 것만은 아니었다. 돌이켜 보면 철도여객운송 변화의 중심에 서 있던 것이라고 말하는 리쑤핑.
 
“2년간 베이징-란저우(蘭州) 노선을 담당했다. 당시 열차는 모두 녹색이었고 차 내 온도조절 설비가 없었다. 때문에 겨울이면 석탄을 때느라 승무원들의 모자 위로 두껍게 석탄재가 쌓이곤 했다.” 서북지방을 오가던 그 당시 겨울,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구간은 네이멍구(內蒙古) 구간이었다. 특히 네이멍구 지닝(集寧)의 겨울은 중국 동북지역 끝에 있는 하얼빈과 맞먹었다. 지닝에 도착하면 창문이 모두 얼어붙었고, 제때 맞춰 석탄을 때지 않으면 열차 내의 모든 기계가 고장이 날 정도였다. “석탄을 때는 장치의 온도계가 80도를 유지해야만 열차 객실에 온기가 돌았다. 전 객실 모두 석탄을 때서 난방을 했다.”
 
외출방식의 변화는 그로 하여금 시대의 변화를 느끼게 했다. 그가 일할 때만 해도 중국인들의 열차 이용은 흡사 이사를 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농민공(農民工)들은 크고 작은 짐 가방이 몇 개씩 되었다. 심지어 까는 요에 덮는 이불까지 챙기고 다녔으니 말이다. 그런데 요즘은 다르다. 작은 여행용 가방 하나면 충분해졌다.”  

농민공 이야기가 나오자 리쑤핑의 표정이 한껏 상기됐다. “그들은 일찍부터 떠도는 삶을 살며 고생하는 것에 익숙했다”고 그는 회고했다. 특히 쓰촨(四川)·안후이(安徽)·장쑤(江蘇)·저장(浙江)·푸젠(福建) 같은 남방지역 출신의 농민공들이 많았다고 그는 말했다. “언젠가 허페이(合肥)에서 베이징으로 가던 중이었는데, 승객들이 모두 베이징에서 보모 일을 하는 사람들이란 말을 들었다. 생각이 앞선 사람들이라는 것을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1980년, <런민르바오(人民日報)>에 ‘춘윈’이라는 말이 처음으로 등장했다. 언제나 존재했던 춘윈이지만, 그렇다고 승객 운송량이 지금의 춘윈처럼 새해 연휴기간 내내 많은 것은 아니었다고 리쑤핑은 회상했다. “음력 섣달 그믐날부터 정월 초나흗날까지 집에서 지내는 것이 중국의 전통이다. 때문에 그때는 한 개의 노선을 오가는 두 편의 열차가 있을 경우, 음력으로 12월 마지막 날이 되면 열차 한 편은 운행이 취소되었다. 여객운송 극성수기가 지나고 승객이 없으니 열차 운행을 취소하지 않으면 수송력 낭비인 것이다. 그러다가 정월 초닷새부터 천천히 운행이 재개된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설날에 모여 식사를 한 뒤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중점 승객의 열차 탑승을 도운 뒤 해당 열차의 열차장과 승객정보를 확인한 리쑤핑은 열차장에게 승객을 잘 보살펴 달라는 당부도 잊지 않는다. 사진/ 베이징기차역 홍보과 제공
 
중국 철도 변천의 ‘살아있는 역사’  
리쑤핑은 1985년 베이징역에 배치된 이후 벌써 33년째 이곳에서 일하고 있다. “베이징역은 곧 중국 철도 전체의 축소판”이라는 그의 말은 결코 과언이 아니다. 1996년 베이징서역이 생기기 전, 시짱(西藏, 티베트)과 타이완을 제외한 중국의 모든 성도(省都)·직할시, 홍콩특별행정구로 향하는 열차는 하나 같이 베이징역에서 출발했다. 연휴나 명절이 되면 베이징역은 휘황찬란한 불빛으로 장식되었다. 당시 이곳은 베이징에서 가장 빛나는 명주(明珠)로서의 면모를 뽐냈다.  
 
“베이징역에서 제일 처음 맡은 업무는 검표업무였다.” 리쑤핑은 양손의 검지손가락을 펴 명찰 크기의 직사각형을 그려 보이며 말했다. “당시의 기차표는 이 정도 크기의 판지로 만들어져 앞면에 열차 정보가 적혀 있었다. 그러다 나중에 종이 재질의 열차표로 바뀌었다.” 검표작업을 하던 그 시절을 떠올리는 리쑤핑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그때는 기차역에 열차 운행시간을 알려주는 전광판이 없었다. 그래서 승객들은 나 같은 검표원에게 열차 출발시간을 묻곤 했다. 하루 종일 대답을 해주다 보면 너무 지쳐 나중에는 승객을 봐도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춘윈 기간이 되면 정신적 피로감이 더욱 심해졌다. “춘윈 기간이 되면 우리는 역 밖의 광장에서 표지판을 들고 있어야 했다. 열차 대합실은 만원이라서 발 디딜 틈 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검표 일은 한번 시작하면 끝날 줄을 몰랐다. 줄이 어디까지 이어진 것인지 보이지도 않았다. 낮에는 그나마 괜찮다가 새벽 3시가 넘어가면 쓰러질 만큼 피곤했다. 얼마나 허리가 아픈지 땅바닥에 드러눕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그래서 베이징서역을 새로 만든 것이다. 베이징역만으로는 그 많은 승객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1996년 베이징서역이 완공되어 정식으로 운영되면서 기존 베이징역이 담당하던 베이징-광저우(廣州)·베이징-홍콩·베이징-바오터우(包頭) 노선의 일부 여객량을 소화했다. 그리고 이후 상당기간, 리쑤핑은 중국 철도발전사에서 이정표적 의미를 갖는 사건들을 직접 목격할 수 있었다.  
 
1997년 4월 1일~2007년 4월 18일, 중국 철도부처는 6번에 걸친 속도 업그레이드를 단행한다. 제6차 속도 상향조정이 끝난 뒤에는 둥처(動車)라는 신제품이 선보였고, 이때부터 중국 철도는 고속철 시대에 들어섰다. 최초의 둥처열차 D531편의 첫 출발지가 바로 베이징역이었다.  
 
둥처 참관 및 둥처 열차 시승에 참여했던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며 리쑤핑은 중국 철도여객운송 발전에 감탄했다. 그러나 여객운송의 빠른 발전보다 그를 더 감동시킨 것은 역시 중국인들의 ‘불굴의 정신’이었다. “고속철 발전을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해왔는지 느낄 수 있었다. 맨 처음 둥처 시승을 할 때 우리에게 설명을 해준 사람은 모두 외국 전문가들이었다. 그러나 최근‘푸싱(復興)호’ 참관을 할 때는 중국인 기술자들이 설명을 해주었다.”  

사실 리쑤핑이 들려준 이야기는 중국 고속철 발전 뒤에 숨겨진 비하인드 스토리였다. 자주혁신능력 제고에 온 힘을 쏟음과 동시에 승객들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중국은 ‘시장으로 기술을 얻은(以市場換技術)’ 뒤 이를 ‘소화·흡수·재혁신’한다는 전략을 펼쳐왔다. 실제로 최초의 고속철 둥처는 대부분 외국 기술력에 의존한 것이었다. 2006년 생산된 CRH2 모델은 일본의 신칸센 E2계 1000을 원형으로 한 것이고, 2008년 광저우-선전 노선 개통 후 운행에 투입된 CRH1A는 캐나다 봄바디어에서 도입한 것이다. CRH3의 원형은 독일 ICE-3, CRH5의 원형은 프랑스 떼제베로부터 각각 도입한 것이었다.  
 
10여 년의 기술혁신을 거쳐 지난 2015년 6월 30일, 중국 표준의 둥처열차 ‘푸싱호’가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성능표준 및 부대궤도 시공표준 모두 유럽과 일본 보다 높고, 254개 핵심 표준 중 중국표준이 84%를 차지하는 등 푸싱호는 중국의 기술력으로 탄생한 고속철이었다. 2017년 9월 21일, ‘푸싱호’는 베이징-상하이 구간을 시속 350km의 속도로 주파하는 데 성공했다. 이는 중국이 전세계에서 가장 빠른 상업용 고속철을 보유하게 됐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고속철과 함께 발전한 것이 있는데, 바로 철도 건설이다. 개혁개방 초기 중국의 철도운행거리는 총 5만1700km였다. 이후 2004년 중국 국무원이 <중장기 철로망 계획>을 발표했고, 이때부터 중국 철도건설은 고속발전시대를 맞아 이후 철도운행거리는 연평균 4% 이상씩 늘어났다. 2017년 말 기준 중국의 철도운행거리는 12만7000km에 달하며, 이중 고속철 운행거리는 2만5000km로 세계 1위 수준이다.  
 
철도운행거리가 급증하면서 베이징서역 운영으로는 리쑤핑의 업무 부담을 크게 덜 수 없었다. “서역에서 일부 여객량을 소화했지만 경제가 발전하고 사람들의 이동이 빈번해지면서 베이징역의 열차 편 수는 계속해서 늘어났다.” 이러한 가운데 2008년 베이징남역이 문을 열었고, 기존 베이징역이 부담했던 베이징-상하이·베이징-톈진 노선의 운송압력을 해소해주었다. 이로써 현재 베이징역은 주로 동북지역을 오가는 둥처 열차들을 담당하고 있다. “아! 참 많은 것이 달라졌다.” 리쑤핑은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승객 유동량이 늘어남에 따라 중점 승객 또한 늘어난다. 2010년 ‘쑤핑 안내데스크’가 설치된 이후 리쑤핑에게도 제자같은 후배 직원들이 생겼다. (사진설명) 리쑤핑과 그의 후배 직원들이 거동이 불편한 승객들을 열차 플랫폼까지 안내하고 있다. 사진/ 베이징기차역 홍보과 제공

마음으로 전하는 승객 사랑  
각종 서비스 업무 중에서 리쑤핑이 가장 많이 처리하는 것은 중점 승객 응대다. 그는 1990년부터 중점 고객 서비스 업무를 해오고 있다. “아무래도 오지랖 부리는 걸 좋아하는 것 같다. 내 아버지께서는 성실한 분이셨는데 나를 매우 아껴주셨고 나 또한 아버지를 많이 사랑했다. 그래서 그런지 어르신들을 볼 때면 꼭 내 아버지를 보는 것만 같다. 노인들이 헤매는 것을 보면 당장 가서 도와드리고 싶어진다.” 
 
리쑤핑의 정성어린 도움 덕에 많은 이들이 그의 ‘단골 고객’이 되어 베이징역에 올 때마다 그를 찾는다. “너무 많은 사람들을 도와주어서 이름까지 기억하진 못한다. 하지만 나를 향해 웃으며 걸어오는 사람들을 보면 언젠가 내가 도와줬던 사람이라는 것은 알 수 있다.” 둥(董) 씨는 리쑤핑의 많은 ‘단골 고객’ 중 한 사람이다. 주류(酒類)를 거래하는 둥 씨는 몇 년 전 불의의 사고로 다리를 다친 뒤 목발에 의지하고 있다. 둥 씨는 그러나 신체적 어려움으로 인해 삶을 포기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매년 베이징과 선양(沈陽)을 오가며 열심히 사업을 하고 있다.  
 
둥 씨가 베이징역의 리쑤핑을 알게 된 때는 2005년 3월 5일 이었다. 기차역 입장에서부터 대합실에서 열차를 기다리다가 안전하게 착석할 때까지 둥 씨는 리쑤핑의 정성 어린 보살핌과 도움을 받았고, 이를 계기로 두 사람은 우정을 쌓아가기 시작했다. 아직까지도 일년이면 5-6번 베이징과 선양을 오가는 둥 씨는 베이징역에 올 때마다 잊지 않고 리쑤핑을 찾아간다.  
“그런 일이 있었는지 벌써 다 잊었는데 둥 씨는 다 기억하고 있었나 보다. 며칠 전, 둥 씨가 병이 났다며 그의 아내가 나를 찾아 왔었다. 둥 씨 아내에게 올해 퇴직한다고 말했는데, 그 소식을 전해 들은 둥 씨가 바로 다음 날 나를 보러 왔더라. 정말 깜짝 놀랐다.”  
 
베이징역이 바빠지면서 리쑤핑 또한 정신없는 나날을 보내야 했다. 그러던 중 2011년 리쑤핑 이름을 딴 ‘쑤핑 안내데스크’가 설치되었고, 이때부터 후임을 받기 시작했다. 취재진이 리쑤핑을 찾아갔던 그 날, 그의 후임들 또한 안팎에서 승객들을 돕느라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후임들이 처음에는 부끄러워서 사람들과 말할 엄두도 내지 못했지만 지금은 아주 잘해주고 있다. 저마다 각자의 역할이 있다. 우리 안내데스크에 있는 휠체어 등 몇 가지는 승객들이 우리를 위해 기부한 것이다.”  
 
1989년생인 타오즈팅(陶志婷)은 2011년부터 리쑤핑과 함께 일하고 있다. 청순한 외모에 수줍음이 많은 이 아가씨는 언젠가 도와줬던 농촌의 할아버지를 생각할 때마다 눈물을 글썽인다. 암을 앓고 있다던 할아버지는 몇 번이나 안내데스크를 찾았고, 그때마다 머리에는 붕대가 둘러져 있었다고 한다. 한번은 타오즈팅이 당직을 서는 날이었다. 타오즈팅은 할아버지의 가방을 대신 들고 휠체어를 밀어주며 노인의 열차 탑승을 도왔다. 마지막으로 할아버지를 보았을 때 할아버지는 타오즈팅에게 한 가지 부탁을 했다. “아가씨, 아가씨 목소리를 들어보니 전에도 아가씨한테 도움을 많이 받았던 것 같아요. 하지만 목소리만 듣고 얼굴은 본적 없으니, 붕대를 풀어 한번 보고 싶군요.” 타오즈팅의 얼굴을 본 할아버지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정말 예쁘군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예뻐요.” 타오즈팅의 목소리는 어느새 떨리고 있었다. “정말로 잊지 못할 순간이었다.”  
 
중점 승객 안내데스크는 더 이상 작은 규모가 아니다. 중점 승객 안내데스크에서 일하는 직원들의 수는 점차 늘어나고 있다.“중점 승객 안내데스크는 베이징역에 항상 있어왔다. 베이징서역과 베이징남역에도 있다. 이런 중점 승객 안내데스크는 모두 베이징역의 모델이 ‘진출한’ 것이다. 후임자가 있으니 안심하고 퇴직할 수 있을 것 같다.” 올해로 55세가 되는 리쑤핑은 법정 퇴직연령이다. 신기한 것은 2018년 춘윈의 마지막 날인 3월 12일이 그의 마지막 근무일이자 생일이라는 것. “올해 춘윈은 내게 이별을 전하기 위해 있는 것 같다”고 리쑤핑은 웃으며 말했다.  
 
누군가의 말대로라면, 1990년 중점 승객 서비스가 시작된 이후 28년간 리쑤핑이 휠체어를 밀고 베이징역을 돌아다닌 거리는 20여 만km이며, 닳아진 휠체어 수만 100여 개에 달한다. 더욱 존경스러운 점은 업무 부담이 클 때도 그는 한결 같은 태도로 도움을 필요로 하는 모든 승객들에게 진심 어린 도움을 제공했다. 바로 이러한 노력으로 2015년 전국 노동자모범의 영예를 얻었다. “이런 영예는 나에게 과분한 것이다. 내가 하는 일은 아주 간단하다. 이곳에 온 승객들을 돕는 것 뿐이 아닌가. 서로 알지 못하는 사이지만 작은 손길이라도 기꺼이 내민다면 상대방도 그 마음을 충분히 느낄 수 있고, 때로는 진심어린 응답을 해오기도 한다. 나는 여기서 행복을 느낀다.”  
 
 

글|장진원(張勁文)

240

< >
网站专题.png

‘중한 연(緣)문화제’, 빙설의 정으로 인연을 이어가다

땅거미가 내려앉자 아름다운 빛깔의 빙등(冰燈, 얼음 등)이 어둠에 가려있던 룽칭샤(龍慶峽)를 밝게 비췄다. 빙등은 마치 하늘을 수놓은 무수한 별 같았다. 2월 3일 밤, 한국 충남국악관현악단과 뜬쇠예술단이 한국 전통공연인 ‘사물놀이’의 빠른 리듬에 맞춰 무대에 등장한 것을 시작으로 ‘빙설정-중한 연 문화제’가 막을 올렸다. 이제 중한 연 문화제는 얼음과 눈을 다리 삼아 중한 양국의 우정을 이어가는 자리가 되었다.

읽기 원문>>

‘국경을 넘은 예술교류’ -중한 유명교수 2인의 공동 도자기전시회

중국과 한국 양국의 유명교수 두 사람의 공동 도자기 전시회가 1월 13일 베이징 허비싱도자기예술관에서 열렸다. 중국 징더(景德)진(鎭)에서 온 닝강(寧鋼) 교수(징더진도자기대학교 교장)와 한국 단국대학교 도예과 박종훈 교수의 도자기 작품 총 90점이 선보인 이번 전시회는 작품을 통해 관람객들에게 두 학구파 예술가들의 독특한 예술 특징을 보여주고, 서로 다른 역사·문화 배경 하에 자리잡은 도자기 예술의 표현방식 및 심미세계를 확인하기 위한 취지로 기획되었다.

읽기 원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