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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오치정, ‘국제 언어’로 중국의 이야기를 전하다

2019-10-31

 

2018년 12월 18일, 자오치정은 농공민주당 상하이시위원회 개혁개방 40주년 축하 보고회에서 자신이 참여한 푸동 개발·개방 이야기를 했다.사진/ 완취안(萬全) 

  

 

자오치정(趙啓正)은 명문대 출신의 핵물리 전문가이자, 푸둥(浦東)의 기적을 창조한 ‘푸둥자오(浦東趙)’이며, 능숙하게 기자를 대하는 ‘중국 최초의 뉴스 대변인’이자, 세계에 중국을 설명한 ‘교류의 사절’이다. 지금도 중요한 회의와 국제 포럼, 보고회에서 79세의 자오치정의 모습을 볼 수 있다. 1940년생인 자오치정은 직함이 여러 개다. 그는 신중국 발전 단계에 따라 끊임없이 역할을 바꾸며 다채로운 인생사를 써내려갔다.

 

과학기술로 ‘보국(報國)’하겠다 

1949년 10월 1일 개국 기념식, 중국은 신기원을 열었다. “그때 나는 아홉 살이었다. 부모님은 신중국 성립을 매우 기뻐하셨고 라디오에서 마오(毛) 주석의 연설이 방송됐다.” 신중국 성립 때를 말하면서 자오치정은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당시 선생님이 신중국이 성립됐다며 어린이들은 열심히 공부해 이 다음에 나라에 많이 기여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자오치정은 어린 시절 자신은 장난꾸러기였다고 겸손하게 말했다. 하지만 이 장난꾸러기는 나중에 톈진난카이(天津南開)중학교에 입학한다. 난카이중학교는 애국 전통이 강한 명문학교로, 저우언라이(周恩來)의 모교이고, 원자바오(溫家寶) 전 총리도 이곳에서 수학했다.

 

1957년 소련이 세계 최초로 인공위성을 발사했고, 1958년 중국은 최초의 실험 원자로를 건설했다. 수학, 물리학, 화학을 좋아했던 자오치정은 이에 크게 고무됐다. “당시 신중국의 과학기술은 이제 막 발전을 시작한 상황이었다. 첸쉐썬(錢學森), 자오중야오(趙忠堯), 첸싼창(錢三強) 같은 과학자가 내 우상이었다. 나는 물리학을 전공하기로 결심했고 대학 입시에서 모두 물리를 지원했다. 1지망이 중국과학기술대학교의 핵물리학과였다.”

 

1958년 자오치정은 우수한 성적으로 원하던 중국과학기술대학교 근대물리학 핵물리학과에 입학했고 저명한 물리학자인 자오중야요와 첸싼창에게 배웠다. 1963년 졸업한 그는 조국의 부름을 받고 국가의 배치에 따라 제2기계공업부에 입사해 장장 21년 동안 과학자로 일했다. ‘과학보국(科學報國)’이 자오치정의 초심이다.

 

이 기간 자오치정의 삶과 일은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여러 상을 받은 것으로 보아 그가 우수한 핵공업 전문가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항천부(航天部)와 상하이(上海)시로부터 ‘선진 작업자’, ‘노동 모범’이라는 칭호를 받아 당시 상하이시에서 가장 젊은 우주비행 관련 선임엔지니어가 됐다. 당시 그는 예정된 궤도대로 과학기술자의 길을 열심히 걸었다.

 

 

1993년, 자오치정은 헨리 키신저 미 국무부 전 장관을 배동하고 푸둥 개발 모형을 참관했다.  

  

 

지구본 옆에 서서 푸둥을 생각하라 

세월이 흘러 1978년 중국은 개혁개방의 위대한 노정을 시작했다. 시대가 급변하자 자오치정의 인생에도 변화가 생겼다. 1984년 그는 상하이공업공작위원회 당위원회 부서기가 되고 얼마 뒤 중국공산당 상하이시위원회 조직부 부부장, 이어 부장에 임명되어 중국공산당 상하이시위원회 상무위원이 된다. 이로써 자오치정은 도시 관리자로 화려하게 변신했다.

 

1990년 4월 18일, 당 중앙위원회와 국무원이 상하이 푸둥을 개발·개방하겠다고 공식 선언했다. 개혁개방이 푸둥의 기적을 낳았고 푸둥의 개척자들을 만들었다. “그때부터 푸둥의 운명이 바뀌었고, 상하이의 운명이 바뀌었으며, 내 운명도 바뀌었다.” 자오치정은 오늘 날 푸둥이 거둔 거대한 발전에 감탄했다. 그에게는 푸둥의 기억이 깊게 남아 있다.

 

푸둥의 기적은 중국 개혁개방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이다. 푸둥신구(浦東新區) 당 공작위원회 초대 서기, 관리위원회 주임였던 자오치정은 푸둥 기적의 창조자 중 한 명이자 산증인이다.

 

“선전(深圳)은 홍콩과, 주하이(珠海)는 마카오와, 샤먼(廈門)은 타이완(台灣)과 각각 마주하고 있지만 푸둥은 다르다. 푸둥은 태평양, 즉 유럽과 미국, 나아가 전세계와 마주하고 있다.” 1990년 개혁개방의 총 설계자인 덩샤오핑(鄧小平)은 마음속에 그린 푸둥신구를 이렇게 묘사했다.

 

“상하이는 런던, 뉴욕, 파리, 도쿄 같은 세계적인 도시로 발전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가 국제 경제대화에 참여할 수 있다.” 자오치정은 덩샤오핑의 구상에 따라 푸둥은 건설 초기부터 국제적인 대도시를 염두했다고 말했다.

 

“지구본 옆에 서서 푸둥 개발을 생각하라.” 푸둥대도 141호에 위치한 낡은 사무실과 식당에 이 표어를 건 사람이 바로 당시 상하이시위원회 상무위원, 부시장, 푸둥신구 관리위원회 주임을 맡고 있던 자오치정이었다. 그는 푸둥 간부들이 국제적인 시야와 사유, 전략적 사고를 늘 갖게하도록 이 표어를 걸었다고 말했다.

 

푸둥 개방 28년이 흐른 지금, 푸둥의 기적은 세계인의 의심을 잠재웠다. 자오치정은 1993년 푸둥신구 간판을 갓 내걸었을 때를 떠올렸다. 당시 푸둥의 재정수입은 4억 위안 정도로, 월급 주고 유치원과 초중고교를 지원하고 나면 남는 돈이 거의 없었다. “국내외 각계 인사에게 푸둥을 말하면 모르는 사람이 많았다. 심지어 푸둥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모르는 사람도 있었다.” 푸둥을 개발하겠다는 중국의 결심을 믿는 사람이 거의 없었고 푸둥을 아는 사람은 더더욱 없었기 때문에 투자 이야기는 꺼낼 수도 없었다. 자오치정은 세계에 푸둥을 알리는 것이 첫번째 과제라는 것을 깨닫고 푸둥 ‘세일즈맨’으로 변신했다.

 

푸둥관리위원회 주임을 맡는 동안 자오치정은 국내외 각지의 대표단을 자주 만났다. 그는 늘 아름다운 입체모형 앞에서 그들에게 푸둥 개발의 비전을 자세히 설명했다. 많을 때는 하루에 10개가 넘는 국내외 방문단을 맞았다.

 

1994년 초 자오치정은 미국을 방문해 프랭크 웰스 디즈니 회장을 만나 푸둥에 디즈니랜드 건설을 제안했다. “디즈니를 통해 해외언론의 주목을 끌고 더 나가 세계 투자자의 관심을 끌길 바랐다.” 당시 자오치정은 이미 현대 마케팅 예술을 꿰뚫고 있었다. 자오치정의 제안에 웰스 회장은 즉시 푸둥으로 사람을 보내 현장을 시찰했고 푸둥이 디즈니의 요구에 부합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웰스 회장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 이 일은 수 년 동안 성사되지 않았다. 이는 자오치정이 푸둥 개발에서 조금 아쉬워하는 부분이다.

 

푸둥 개발이 진전을 거두면서 ‘푸둥 정신’에 감화되는 서방 정치가와 기업가가 늘어났다. 1994년 조지 H. W. 부시가 푸둥을 방문했다. 자오치정은 레이저펜으로 모형을 가르키면서 푸둥의 개발·개방을 설명했다. 부시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내가 몇 년만 젊었어도 푸둥에 투자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푸둥 개발이 웅장한 교향곡이라면 작곡가는 덩샤오핑 동지다. 나는 연주자로 참여해 푸둥 개발의 어려움과 즐거움을 몸소 느꼈으니 정말 운이 좋았다. 나는 우리의 위대한 시대에 감사하고, 위대한 푸둥 개발에 감사한다.” 푸둥의 기적을 개혁개방의 공으로 돌린 자오치정의 표정에서 자부심과 감사의 마음이 느껴졌다.

 

 

1994년 1월 8일, 자오치정은 조지 H. W. 부시 미국 전 대통령에게 푸둥개발계획을 설명했다. 

  

 

中최초의 대변인, ‘노코멘트’란 없다 

1998년 자오치정은 국무원 신문판공실 부주임이 되고, 몇 개월 뒤 국무원 신문판공실 주임을 맡게 된다. 그의 임무는 ‘세계에 상하이와 푸둥을 설명하던 것’에서 ‘세계에 중국을 설명하는 것’으로 바뀌고 ‘중국 최초의 대변인’이라는 길을 걷게 된다.

 

중국 경제가 발전하면서 중국은 국제무대의 중심으로 나갔고 중국 정보에 대한 국제사회의 관심도 커졌다. 물론 오해도 따랐다. 자오치정이 국무원 신문판공실 주임에 갓 부임했을 때 어려운 문제가 생겼다. 1999년 5월 25일 미국 하원 특별위원회가 <콕스 보고서>를 발표하고 중국이 미국의 미사일과 핵미사일, 위성 등 군사기술을 훔쳐 미국의 국가안보를 위협했다고 주장해 국제 여론이 들끓었다.

 

보고서 발표 6일 뒤 자오치정은 국무원 신문판공실 주임 명의로 <콕스 보고서>를 반박하는 1차 뉴스 브리핑을 가졌다. 7월 15일 2차 뉴스 브리핑을 진행했다. 뉴스 브리핑에서 그는 여러 사실을 열거하며 콕스 보고서를 반박했다. 중국과 세계의 각 대형 매체는 자오치정의 말과 기자 질의응답 내용을 자세하게 보도했다.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은 <콕스 보고서>를 1999년 ‘10대 국제 스캔들’ 중 하나로 선정했다.

 

“우리는 해외 언론이 중국을 객관적으로 보도하지 않는다고 원망만 해선 안 된다. 우리가 세계에 중국을 설명한 것이 어떤 효과를 냈는지 생각해봐야 한다.” 자오치정은 국제사회가 중국을 오해하는 이유는 중국이 제때 정보를 발표하지 않은 탓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많은 나라에서 뉴스 대변인 제도를 채택해 뉴스 브리핑을 통해 정확한 정보를 적시에 전달하는 것을 보고 중국도 규범화된 대변인 제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자오치정의 추진으로 2003년 국무원 신문판공실 제1기 대변인 양성반이 개설됐다. 66개 부처와 위원회의 뉴스 대변인 100여 명이 참가했다. ‘뉴스 대변인’이 중국 매체에서 가장 트렌디한 단어 중 하나가 됐다. 이로써 중국의 뉴스 브리핑 제도가 점차 자리를 잡았다.

 

새로운 자리에서 자오치정은 매력적인 전달자로 변신했다. 그는 중국 기자들이 ‘가장 취재하고 싶은 공직자’였고 외국 기자에겐 ‘중국의 이미지 대변인’이었다. 엔지니어의 이성과 신중함이 그의 대답에 설득력을 더했다.

 

자오치정은 중국 정부 뉴스 대변인과 전국정치협상회의(정협) 뉴스 대변인을 10년 동안 수행하면서 수없이 많은 뉴스 브리핑을 주재했고 국내외 기자들과 인터뷰도 많이 했지만 ‘노코멘트’라고 대답한 적이 없다. 그는 모든 질문에 답하는 것이 뉴스 대변인의 책임이고 ‘노코멘트’라는 말로 기자와 언론의 질문을 막는 것은 ‘직무 유기’라고 생각했다.

 

 

2012년 3월 2일 오후, 정협 11기 5차회의 뉴스 브리핑이 인민대회당 3층 홀에서 열렸다. 대회 뉴스 대변인인 자오치정이 국내외 언론에 대회 관련 소식을 전하고 기자의 질문에 답했다. 사진/돤웨이(段崴)  

  

 

교류에는 진심과 성의가 중요하다 

2005년 자오치정은 국무원 신문판공실 주임직에서 물러나 중국 인민대학교 신문학원 원장에 부임했다. 2008년 전국정협 외사위원회 주임, 뉴스 대변인이 된다. 국가 뉴스 대변인 직에서 물러났어도 그는 여전히 세계에 중국을 설명하는 데 주력했다.

 

그는 한 사람을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한 민족과 한 나라를 이해하는 것은 더 어렵다. 샤를르 드골 프랑스 전 대통령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는 지구와 달의 거리보다 멀다고 말했다. 하지만 자오치정은 세계 각국과 민족이 지리와 문화의 거리를 극복하고 보다 가깝고 친밀해지길 바란다. 세계가 진실한 중국을 이해하도록 하는 것이 자오치정이 추구하는 바다.

 

그는 세계에는 ‘중국 독본(讀本)’이라는 아주 두꺼운 책이 있다며, 이 책은 13억 페이지로 구성되고 중국인 한 명 한 명이 한 페이지를 차지한다고 말했다. 우리 모두가 자신의 페이지를 잘 써야 중국의 이미지가 더 아름다워진다. 그 자신은 업무와 직위 때문에 많은 사람이 읽는 한 페이지가 됐을 뿐이다.

 

그는 박학다식하고 인간관계가 넓다. 자크 시라크 프랑스 전 대통령과 창청(長城)과 고궁(故宮), 발자크와 빅토르 위고에 대해 논하고, 미국의 외교전문가 헨리 키신저와 중·미관계와 세계 질서를 논하며, 종교 지도자 루이스 팔라우와는 과학과 종교에 대해 이야기한다. 또한 이스라엘 정치가이자 노벨상 수상자인 시몬 페레스와 철학과 역사를 토론하며, 옐친 러시아 전 대통령, 피델 카스트로 쿠바 지도자에게는 상하이의 발전을 소개했다.

 

“이야기는 이론보다 생활과 진리에 더 가깝다.” 자오치정은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는 진실한 이야기를 통해 세계에 중국을 알리고 싶다. 자오치정은 어떻게 이야기할 것인가에 관한 자기만의 방법이 있다.

 

그는 이야기를 잘하려면 우선 ‘진실하게 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진실한 이야기를 선택해야 한다. 자기가 감동해야 다른 사람도 감동시킬 수 있다. 나도 믿지 못하고 감동받지 않으면 말할 필요가 없다. 진실된 이야기라도 수식어가 많거나 높이 치켜세우면 사람들은 진실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는 또한 늘 중국이 좋다고만 말하고 중국이 직면한 문제를 회피하면 흡인력이 줄어들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의 공공외교 경험을 배워야 

“한국은 공공외교에서 가장 성공한 나라다.” 자오치정은 한국과 인연이 깊다. 그는 방문단을 이끌고 여러 차례 한국을 방문했다. 또한 <중국은 어떻게 세계와 소통하는가(公共外交與跨文化交流)>, <강변 대화(江邊對話)> 등 저작 4권이 한국에서 번역 출판됐다. 이번 인터뷰 전날에도 그는 한국측의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해 성균관대학교 성균중국연구소와 중국 공공외교협회가 공동 주최한 ‘중국 개혁개방 40주년 평가 및 전망’ 포럼에 참석, ‘푸둥 개발로 본 중국 개혁개방 40년’이라는 기조연설을 했다. 동시에 한국의 오랜 친구들도 만났다.

 

“한국에는 <공공외교법>과 <공공외교시행법>이 있다. 다른 나라에는 없는 것이다. 한국은 2011년부터 공공외교 대사를 임명해 공공외교 업무를 전담하도록 했다. 한국 외교통상부 공공외교 대사를 지낸 마영삼과 현 대사인 박상훈은 내 오랜 친구다. 나는 한국 외교부 장관이었던 김성환 선생과도 공공외교의 정의와 학술적 틀, 공공외교 시행의 중요성에 대해 매우 진진하게 이야기를 나눴다. 그들은 외교에 대한 내 생각에 동의했다.” 자오치정은 한국의 공공외교 경험에서 중국이 배울 만한 것이 있다고 말했다.

 

올해 79세인 자오치정은 지금 가장 하고 싶은 일은 ‘쉬면서 책 읽고 글 쓰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각종 초청 때문에 그는 진정한 ‘퇴직’을 할 수 없다. 한가할 때 그는 자신이 심혈을 쏟은 푸둥을 걷고 본다. 그는 아직도 더 많은 외국인에게 중국의 발전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미서명 사진은 자오치정 본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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