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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고승, 명나라 군대와 함께 왜군을 격퇴


2021-03-11      

유정선사(사명대사)상

1592년, 조선반도(한반도)에 발생한 임진왜란으로 조선의 백성들은 도탄에 빠졌다. 조선과 명나라는 함께 일본의 침략에 맞섰다. 그 과정에서 조선의 이순신, 명(明)나라의 등자룡(鄧子龍) 등 많은 영웅들이 탄생했다. 그러나 장수나 관료 외에도 후세의 칭송을 받을 만한 수많은 민간 영웅들이 있었는데 바로 조선 임제종 고승 휴정(休靜, 1520-1604년)선사(서산대사)와 그의 제자 유정선사(사명대사)가 그들이다.

휴정의 속명은 여신(汝信), 자는 현응(玄應)이며 스스로 청허자(淸虛子)로 칭했다. 휴정은 21세에 출가하여 조선 곳곳을 돌며 행각했다. 30세가 되던 해, 휴정은 승과(僧科)에 급제하여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가 되었다. 그러나 곧 사임하고 한양을 떠나 풍악산에서 수행했다. 휴정은 폐관 수학하며 불법(佛法)에 정진하였는 바, 점차 유명세를 얻게 되고 신도 또한 증가하여 선조(宣祖)에게까지 그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 선조는 휴정의 능력과 인품을 매우 높이 평가하며 여러 차례 선물을 하사하기도 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와 대신들은 한양을 떠났다. 국난 앞에서 휴정은 산 속으로 숨어들지 않고 선조를 만나 승려와 백성으로 이루어진 군대를 이끌고 왜구에 맞서 싸우기를 청했다. 휴정의 뜻에 크게 감동받은 선조는 그를 ‘팔도십육종도총섭(八道十六宗都總攝)’이라는 직함을 내렸다. 휴정은 자신의 제자들과 함께 곳곳에서 의군을 모아 명나라 및 조선군대를 지원하였다. 명나라 제독 이여송(李如松)은 휴정의 용감함에 경의를 표하며 “나라를 위하여 적을 무찌르니 태양을 꿰뚫는 그 충성에 우러러 존경할 뿐”이라고 칭송했다. 이여송 외에도 명나라의 여러 고위 군관들 또한 글월을 보내 휴정에게 경의를 표했다.
 
휴정의 제자들은 모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맹함을 갖추었는데, 그 중 가장 유명한 이가 바로 유정(惟政, 1544-1610년)이다. 풍천 임씨의 명망 높은 가문에서 태어난 유정의 자는 이환(離幻)으로, 어릴 적부터 불심(佛心)이 남달랐다. 1561년 승과 급제 후 유정은 한양에 남아 문인 및 사대부들과 교류하여 불학 외에도 매우 높은 유학(儒學) 소양과 한문 수준을 갖추게 되었다.
 
1575년, 유정은 휴정을 스승으로 모셨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구가 영동 유점사(楡岾寺)로 쳐들어오자 유정은 안색 하나 변치 않고 그들에게 불법을 설파했다. 그의 설법을 듣고 왜군 장수 3명이 귀의했으며, 이로써 무고한 피해를 막을 수 있었다. 선조가 용만(龍灣, 의주)에서 피난했던 당시, 유정은 승려를 모집하여 수천명에 이르는 승군(僧軍)을 조직했으며, 고령의 휴정을 대신해 실질적으로 군대를 이끌었다. 유정의 승군은 류성룡의 군대를 따라 명나라 군대와 함께 전쟁을 펼쳐 결국 평양을 수복했다.
 
그 후에도 유정은 수차례 ‘명 말기 최고의 장수’라고 불리는 총병(總兵) 유정(劉綎)과 함께 전쟁을 치렀다. 순천 예교(曳橋)전투에서는 수훈을 세우기도 했다. 전쟁이 끝난 후, 선조는 유정이 조정에 남기를 바라며 높은 관직과 복록을 약속했으나 유정은 이를 모두 거절했다. 1602년, 유정은 조선의 사신으로 일본으로 넘어가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만나 임금의 국서를 전달하고, 불법(佛法)으로 설득하여 조선 포로 3000명을 데리고 귀국했다.
 
휴정과 유정은 국난 앞에서 세속을 떠난 불자의 신분보다는 유가(儒家)의 인효(仁孝)와 충의(忠義)에 따라 승군을 조직하여 나라를 지켰는 바, 역사에 그 이름을 길이길이 남겼다. 
 
 
글|위셴룽(喻顯龍), 상하이(上海)외국어대학교 글로벌문명사연구소 전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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