浩蕩離愁白日斜,吟鞭東指即天涯。
落紅不是無情物,化作春泥更護花。
Hàodàng líchóu báirìxié, yínbiān dōngzhǐ jítiānyá.
Luòhóng bushì wúqíngwù, huàzuò chūnní gènghùhuā.
호탕리수백일사, 음편동지즉천애. 낙홍부시무정물, 화작춘니경호화.
넘실대는 이별의 슬픔 속에 해가 기울고,
말채찍 울리며 동쪽을 향하자니 곧 하늘 끝인 듯.
꽃이 진다는 게 무정한 일은 아니리라,
봄날의 진흙 되어 또 다음 세대의 꽃을 가꾸리니.
공자진(AD 1792-1841)의 자는 슬인(璱人)·이옥(爾玉), 호는 정암(定庵), 그 외 공조(鞏祚)라는 일명이 있다. 저명한 고증학자이며 언어학자인 단옥재(段玉裁, AD 1735-1815)의 외손으로, 어린 시절 직접 가르침을 받기도 했다. 23세 이래 여러 논설을 통해 전제정치의 폐해를 비판하면서 기득권층의 반발을 샀다. 자연히 과거시험 과정은 물론 급제 이후의 삶 역시 순조롭지 않았으나 훗날 청말 개혁운동의 선구자로 추앙된다.
<기해잡시> 제5수는 기해년(1839) 봄, 관직에서 물러나 북경(北京)을 떠나는 심정을 읊었다. 북경의 동남쪽 멀리, 고향 항주(杭州)로 가는 길이므로 ‘東指’라 했다. ‘吟+鞭’의 조합이 신선하다. ‘채찍의 울림’에 ’읊조릴 吟’을 쓰다니 범상치 않은 감수성이다. 부모를 여의고 돌봐줄 이 하나 없는 사고무친의 미성년을 ‘天涯고아’라 하듯, 天涯(하늘 끝)에 닿은 기분을 드러낸 제2구에서 고독하고 스산한 심정이 물씬 풍긴다. 그러나 거기서 끝나지 않고 ‘희망’을 이야기한다는 점, 바로 이 작품의 두드러진 특징이자 사랑 받는 이유일 것이다.
수 천년 중국대륙에 무수한 이민족이 드나들고 수많은 왕조가 명멸했으나 19세기 중반 이래의 외부적 충격은 이전과 전혀 다른 차원의 위기였다. 아편전쟁(AD 1840-1842)의 전야, 세계 판도의 결정적 전복이 코앞에 닥쳐있었다. 근대자본주의 열강의 물결, 전무후무한 격변기의 개막을 목전에 둔 기해년 음력 4월, 47세의 공자진은 청 왕조에 대한 깊은 절망감 속에 관직을 버리고 낙향, 몇 개월 후 다시 경사(京師=북경)로 가 집안식솔들을 이끌고 돌아온다. 편도 1270km가 넘는 길을 1년에 두 번 왕복한 셈이다. 그 여로에 쌓인 시편들이 바로 <기해 잡시>총 315수다.
고관대작은 아니라도 스스로 밥줄을 포기한다는 것(더구나 대규모 식솔의 가장으로서)은 예나 지금이나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총 5000km를 훌쩍 넘는 긴긴 여로는 국가의 명운에 대한 고민과 좌절감, 사생활의 비애까지 더해 우울한 시간이었을 터, 만감이 교차했으리라. 시인의 다감함과 우국지사의 복잡다단한 심사가 절절이 묻어난다. 만년에 불교(천태종) 연구에 몰두했다는 것 또한 사대부로서 다소 이례적인 일이나 공자진 인생의 전체적 문맥에서는 자연스런 현상으로 보인다. ‘사대부’라는 이성-감성의 변증법적 통일체로서의 인격, 중화문명이 배양한 지식인 상(像)의 한 극치를 대하는 느낌이다.
중국에서 공자진은 애국시인으로 평가된다. 공자진 자신의 말에 그의 시론이 함축되어 있다. “시와 사람은 하나. 사람 바깥에 시 없고, 시 바깥에 사람 없다(詩與人為一 人外無詩 詩外無人).” 당연한 내용 같지만 여간 해선 하기 어려운 말 아닐까 싶다. 시와 시인(사람됨)의 정합적 통일성, 즉 자신의 삶과 시문 앞에 떳떳한 사람이라야 할 수 있는, 무겁고 용감한 선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