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4-11
춘추전국시대는 중국 역사상 분쟁이 끊이지 않는 대변혁의 시기였다. 순자(荀子)는 전국시대 말기의 사상가이자 철학자, 교육가로 유가(儒家) 학파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순자는 깊은 위기의식을 바탕으로 유학과 전국시대 불안정한 사회적 배경을 결합해 자신만의 ‘치국의 도(治國之道)’를 제시했다.
천하의 바른 길은 무엇인가
전국시대 마지막 50년, 지사들과 참모들은 두 파로 나뉘었다. 함곡관(函谷關) 내에 있는 진(秦)나라에서는 법가(法家)와 종횡가(縱橫家)가 활약했고, 함곡관 밖의 육국(六國)에서는 유가, 도가(道家), 병가(兵家), 음양가(陰陽家), 형명가(刑名家)가 활약했다. 제(齊)나라의 직하학궁(稷下學宮)은 육국 지식인의 집결지로 진나라와 대립된 정신세계를 구축했다. 이 정신세계의 지도자가 바로 전국 최후의 유가 대가이자 직하학궁의 제주(祭酒)를 3번 역임한 순자다.
기원전 269년에서 262년 사이 60여 세의 순자는 진나라에 가서 고찰했다. 그는 전통 유가처럼 진나라 정치를 폭정이라고 비난하지 않았다. 오히려 진나라의 하층 관리는 근면하고 충성스러우며 진심으로 일을 처리하고, 고위 관리는 현명하고 공정하며, 조정의 정무 처리는 효율이 높고 간결하다면서 법가의 관리 제도를 높이 평가했다.
그러나 순자는 더 중요한 말을 했다. 진나라는 우수한 면이 있지만 ‘왕자(王者)’의 경지에는 이르지 못했다며 그 이유는 ‘유(儒)’가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면 ‘유’가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진나라의 제도는 이리위사(以吏爲師)인데 순자는 ‘절위반문(節威反文)’하여 군자를 기용해 천하를 통치하라고 제안했다. 이는 후세의 ‘왕권과 사대부가 천하를 함께 통치한다’는 사상의 원형이다.
순자는 유가는 통일된 도덕 질서가 있지만 통일된 통치 체계가 없고, 법가는 통일된 통치 체계를 수립했지만 정신 도의 상 부족한 점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진나라의 법가 제도에 유가의 현능 정치와 신의인애(信義仁愛)를 더해야 앞으로 천하의 정도가 될 수 있다고 했다.
진나라 왕은 이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몇 년 뒤 장평전투(長平之戰)에서 순자의 말이 증명됐다. 진나라는 조(趙)나라 군대가 투항하자 신의를 저버리고 40만명의 조나라 군사를 생매장했다. 피가 강을 이루는 전국시대라고는 하지만 이는 도의의 한계를 넘은 것이었다. 진나라는 늘 현실주의와 공리주의를 앞세워 천하를 취했기 때문에 인의 도덕으로 자신의 손발을 묶지 않았다.
힘 없는 도의와 도의 없는 힘은 모두 눈앞의 현실에 대답할 수 없다는 것이다.
중화문명 속 순학(荀學)의 유전자
장평전투 이후 순자는 정치를 포기하고 저술 활동과 후학 양성에 힘썼다. 그의 사상 체계는 맹자의 순수 유학과는 다르다. 맹자는 인간의 본성은 선하다고 주장했지만, 순자는 ‘인성은 본래 악해’ 가혹한 형벌과 법률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법가 학설에 부합한다. 맹자의 ‘천(天)’은 권선징악의 ‘의리의 천’이지만, 순자의 ‘천’은 자신의 법칙이 있어 성군인 요(堯)나 폭군인 걸(桀) 때문에 바뀌지 않는다. 때문에 ‘천명을 파악해 그것을 이용해야 한다.’ 이는 중국 최초의 유물주의다. 맹자는 왕도를 숭상하고 패도를 경멸시했지만, 순자는 왕도와 패도를 같이 써야 한다고 생각했다. 맹자는 의(義)를 논하고 리(利)는 논하지 않았지만, 순자는 의와 리를 모두 고려해야 한다고 했다. 순자는 의와 리는 인간이 가진 두 가지 천성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고상한 제도라도 리를 추구하는 인간의 마음을 없앨 수 없고, 아무리 어두운 현실도 의를 추구하는 인간의 마음을 사라지게 할 수 없다. 따라서 두 가지를 동시에 작용시켜야 한다. 맹자는 법선왕(法先王, 선왕을 본받자)을 숭상했지만, 순자는 법후왕(法後王, 최근 왕을 본받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순자는 한비(韓非)와 이사(李斯)라는 걸출한 제자를 양성했다. 그들은 학업을 마치고 진나라에서 재능을 크게 펼쳤으나 순자는 이를 슬퍼했다. 그들이 유가와 법가를 융합하지 않고 법가를 극치로 발전시켰기 때문이었다. 한비의 법가 이론은 법, 술(術), 세(勢) 등 3대 유파를 망라했고, 이사는 법가의 전체 정책 체계를 설계했다. ‘분서갱유(焚書坑儒)’가 바로 그의 건의에서 비롯됐다. 그들은 스승 순자가 법가의 수단을 긍정하면서 유가의 가치관을 견지한 것을 잊었다. 예를 들어 충의효제(忠義孝悌)의 윤리, 도(道)를 따르고 군(君)을 따르지 않는 것, 의를 따르고 부(父)를 따르지 않는 사대부 정신, 정치는 왕도가 근본이요 용병은 인의가 우선이라는 것 등이다. 법가와 유가는 대립되면서 통하는 관계로 어느 것 하나도 빠져선 안 된다. 법가가 없으면 유가는 구조화와 조직화를 이루지 못하고 기층 사회를 동원하지 못하며 분쟁의 시대에 자신을 강화할 수 없다. 반면 유가가 없으면 법가는 구속 없는 힘으로 변해 권위 체계는 그저 표준화, 수직화, 동질화된 집행 체계에 불과해진다.
순학에는 유가와 법가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사기(史記)>에 따르면 순자의 사상은 유가, 묵가, 도가의 성공과 실패를 집대성했다.
순학은 중화문명이 큰 곤경과 모순에 직면했을 때의 포용 정신을 가장 잘 구현했다. 순학이 ‘중도(中道)’를 따르기 때문이다. 중도의 기준은 사리(事理)에 맞추는 것이 유익하고, 어떤 특정한 교조를 따를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요즘 말로 하면 ‘실사구시(實事求是)’인 셈이다. ‘일을 할 때 이치에 맞으면 행하고 맞지 않으면 하지 않는 것이 타당하다. 지식과 학설이 이치에 맞으면 취하고 맞지 않으면 버리는 것이다. 일을 행할 때 중도를 잃는 것을 간도(奸道)라고 한다.’ 실사구시의 기반 위에 구축된 중도 정신은 중화문명이 전혀 다른 모순체를 포용하고 불가능해 보이는 모순체를 결합하며 ‘이것 아니면 저것인’ 모든 사물을 조화 공생시키는 데 있어 가장 효능이 높았다.
순자는 70여 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사상은 모순적이라 죽은 뒤에도 많은 곡절이 있었다. 맹자와 나란히 불리는 순자는 유가가 정통이 된 뒤 1800년 동안 유가의 각 파로부터 추앙받지 못했다. 청나라 건륭 시기 고증을 전문적으로 공부한 청나라 대학자들은 한나라 초기 유학이 잿더미에서 건져낸 기본적인 대전(大典)이 모두 순자가 남긴 것이었다는 것을 발견했다.
칠국(七國)에서 전쟁의 불길이 타오르던 마지막 30년 동안 순자는 법가의 귀재인 이사와 한비를 가르치면서 묵묵히 책을 써 유학을 전수했다. 분서갱유 이후 순자만이 ‘사학(私學)’을 통해 이들 경전을 몰래 보존했고 한나라 유가에 의해 다시 서술됐다.
순수하게 행하기는 쉽지만 중도를 행하기는 어렵다. 두 개의 극단에 의해 버려지거나 협공을 당할 준비를 늘 해야 한다. 그래도 역사는 결국 중도를 따라 전진했다. 한(漢) 무제(武帝)와 한 선제(宣帝)는 순자의 ‘예법합일(禮法合一)’, ‘유법합치(儒法合治)’ 사상을 받아들였다. 이어진 역대 왕조도 그의 사상에 따라 계속 전진했다. 유가와 법가는 이로써 진정으로 합류됐다. 법가는 중앙집권 군현제와 기층 관료 시스템을 창조했고, 유가는 사대부 정신과 가국천하(家國天下)의 집단주의 윤리를 창조했으며, 위진(魏晉) 당송(唐宋) 시대에는 도가와 불가를 융합해 유석도(儒釋道) 합일의 정신세계를 창조했다.
이렇게 매우 안정된 대통일 국가 구조는 동아시아 전체로 전파돼 중화문명의 강하지만 패권을 휘두르지 않고 약하지만 분열되지 않으며 끊임없이 이어지는 비밀이 됐다. ‘비밀’이라고 하는 이유는 대다수 서양 학자가 아직까지도 알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글|판웨(潘岳)역사학 박사이고 현 중앙사회주의학원 당조 서기, 제1부원장(장관급)이며 중국공산당 제17차∙제19차 전국대표대회 대표, 중국공산당 제19기 중앙위원회 후보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