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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과 사회를 반영하는 예술-화가 양즈링과의 대화


인민화보

2018-06-05      인민화보



양즈링(楊誌淩), 중국미술가협회 정회원, 국가 1 미술사, 중국 현대 수채화 명화가, 칭화(淸華)대학교 선전(深圳)대학원 겸임교수, 선전대학교 초빙교수, 세계저탄소도시연맹(The World Alliance for Low Carbon Cities, WALCC) 예술분과 고문. 대표작으로 <장밀채의(藏密彩意)> 시리즈, <환경보호(環保)> 시리즈, <화산(火山)> 시리즈, <면비면(面非面)> 시리즈, <광절(光截)> 시리즈, <나는 너만 못하다(我那不如你)> 등이 있다.


화가 양즈링은 1954 네이멍구(內蒙古)자치구에서 태어났다. 어릴 연환화(連環畵) 또는 소인책(小人書)이라 불린 ‘이야기 그림책’에 빠져 지냈다. 양가장(楊家將), 악비(岳飛), 신필(神筆) 마량(馬良)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충성스럽고 정의감 넘치는 역사적 인물들을 보며 어린 그의 마음 속에 우국충정의 정신이 싹텄다. 언젠가 반드시 권선징악(勸善懲惡) 붓으로 그려내겠다는 꿈을 품었다. 네이멍구사범대학교 미술학과를 졸업한 모든 기회를 활용해 그림을 공부했다. 끊임없이 사고하고 치열한 탐색의 과정을 거치며 그의 그림은 점점 인류의 운명과 생존 문제를 고민하는 ‘예술의 길’로 들어섰다.


<새의 죽음(鸟殇)>


그는 예술을 전공했지만 예술을 생계 수단으로 삼은 적은 없었다. 대신 자신의 풍부한 인생 경험을 자신만의 독특한 예술적 체험으로 내재화했다. 이처럼 ‘닿을 듯’한 고도의 거리조절 덕분에 예술의 동향에 대해 냉철한 방관자적 자세를 유지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더욱 너른 시각으로 사회 진보에 기여하는 예술의 역할을 조망할 있었다.


그의 그림은 다른 화가들의 현대회화와 차이가 있다. 그림이 ‘이미지’로서의 경제적 논리에 좌우되고 상업에 소구하는 요즈음, 대부분의 예술가들은 국내외 없이 모두 ‘자신만의 언어’를 확립하는 몰두한다. 그러나 양즈링은 결코 자신을 ‘부호화’하지 않는다. 그의 그림이 돋보이는 점도 바로 부분 때문이다. 다만 그의 작품에서는 대중이 품고 있는 진정한 사상과 자연환경의 변화를 들여다 있다.


그는 평범한 삶의 모습을 그리지 않는다. 그가 그리는 것은 주로 살아있는 생명의 감각과 인류가 추구하는 행복이다. 어떤 형식이든 작품 속에 자신의 정신적 느낌과 인간 세계에 대한 견해를 담아낸다. 이를테면 <새의 죽음(鳥殤)> 자유롭게 날아오르던 새가 갑작스레 딱딱한 사체가 되어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순간을 포착한다. 인류의 기형적인 욕망 확장이 낳은 결과물이다. 삼림파괴로 인해 일부 생물종에 초래된 재앙이 자연스럽게 연상된다. 그는 새가 떨어지는 장면을 통해 인간과 자연의 내재적 동질성이라는 영원한 주제를 표현했다.


예술에 대한 오랜 고민 끝에 그는 가지 ‘자가 훈련법’을 고안해 냈다. 관찰, 스케치, 실험이 그것이다. 관찰은 사회에서, 스케치는 자연을 통해, 실험은 과학으로부터 각각 배운다. 이를 바탕으로 그가 창시한 예술 이론이 바로 ‘인격화된 풍경’, ‘관념의 반사(反射), ‘권선(勸善) 시현(時現·순간적으로 나타남)’이다.


그는 그림 속에 표현된 관념은 관찰자가 작품을 감상하기 이미 관찰자들의 잠재의식 속에 존재하고 있다고 보았다. 관찰자가 작품을 마주하면 잠재의식 속에 숨어있던 관념이 빠르게 떠오른다. 그는 예술을 통해 대중과 맞닿고, 궁극적으로 사회를 진보시키는 대중의 의식을 일깨우기를 바란다.


이런 예술적 이론은 그의 작품 속에도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그의 작품은 사회성, 사상성, 실험성을 기준으로 삼기 때문에 관객들은 작품 속에서 보다 심층적이고 광범위한 의미를 발견할 있다.


<대위덕의 (大威德之光)>


<대흑천의 분노(忿怒大黑天)>


월간중국:이제까지 가지 단계의 예술세계를 거쳐 왔습니까?


양즈링(이하 ‘양’): 단계를 거쳤습니다. 번째는 평면 예술의 단계였습니다. 네이멍구에서 교편을 잡고 있을 때였죠. 전국 미술전에 차례 출품했고, 후허하오터(呼和浩特)시의 고대 사찰 문화재인 다자오사(大召寺) 경당(經堂) 벽화를 복원했습니다. 당시 네이멍구자치구 수채화협회 회장직을 맡으며 여러 작품집을 내기도 했습니다.


번째는 입체 예술의 단계였습니다. 베이징(北京) 인민대회당의 네이멍구청() 수십 건의 최상급 리모델링 사업을 설계하고 총괄했으며, 공로로 국가로부터 여러 상훈을 받았습니다.


번째 단계는 사회적 예술을 바르게 통합하고 재구성하면서 예술을 일종의 ‘사회참여 수단’으로 활용하기 위해 준비하던 시기였습니다.


마지막 번째 단계는 ‘각성과 변화’였습니다. ‘인격화된 풍경’, ‘관념의 반사’, ‘권선의 시현’ 이론을 수립하고 응용했죠. 인류 문명의 발전과 관계된 창작에 힘을 쏟아 부었습니다. 저의 정신과 감상하는 이의 공감대를 강조했고, 인간의 생각과 삶에 개입하기 시작하면서 형식에 얽매이지 않지만 선을 넘지 않는 지금의 풍격과 작품에 도달했습니다. 그대로 ‘각성’과 ‘변화’의 결과물입니다.


월간중국:언제부터 사회와 환경 문제를 창작활동의 핵심 주제로 삼기 시작했나요? 혹시 그렇게 하게 계기가 있나요?


: 인류 사회와 환경 문제를 작품으로 그려보려는 열망은 사실 언제나 있었습니다. 당시 사회적 분위기와 자기발전을 위한 선택 탓에 부분이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죠. 어릴 연환화를 보며 역사 영웅들을 마음 속으로 동경했고, 붓으로 권선징악을 구현하겠다는 다짐을 했죠. 고대 건축물을 복원하고 전국 과학기술상을 수상할 때는 인류 문명과 자연의 생명들을 보호하는 일에 나서겠다고 결심했어요. 혼자 스케치를 하거나 구상용으로 그린 작품 중에는 그런 주제의식이 반영된 것들이 많아요. 예를 들자면 저우산(舟山)군도 수채화 시리즈는 <1급풍>, <2급풍>, <3급풍>, <4급풍>, <5급풍> 풍력(風力)으로 작품명을 붙였어요. 작품에는 파도의 움직임과 변화에 따른 풍력의 크기가 반영되어 있습니다. 당시 제가 가진 환경과 시현성에 대한 시각이 드러나 있죠.


사회가 발전하고 ()시대에 접어들면서 중국은 세계에 ‘인류 운명공동체’를 제안했습니다. 중국이 인류 발전에 점점 많은 기여를 할수록 예술의 시야와 포부도 자연스레 점점 넓어지겠죠. 책임 있는 대국(大國) 화가는 언제나 가슴에 조국을 품고 세계로 눈을 돌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때문에 저는 평생 예술의 형식을 빌려 자연과 생명, 생존 문제, 인류 문명의 발전을 표현하겠다는 원대한 목표를 세웠습니다.


월간중국:창작 기법이나 표현 형식, 그리고 안에 담긴 사상의 관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창작의 매개와 형식을 둘러싼 탐색과 혁신은 ‘이젤 위의 예술(기타 장식이나 부차적인 용도로 쓰이지 않는 순수 독립 예술을 비유)’이 의미의 위기(crisis of meaning) 벗어나는 어떤 면에서 긍정적인 역할을 했을까요?


: 예술은 창조적이어야 합니다. 남과 다른 무언가가 있어야 합니다. 거장의 예술 또는 스스로의 예술과 중복되지 않아야하고, 과학기술과 사실적인 표현을 두고 경쟁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어느 분야를 파고든 복제품을 찍어낼 필요도, 장황한 설명을 늘어놓으며 겨룰 필요도 없으며, 이리저리 시류에 편승하며 뻐기지도 말아야 합니다.


<금강살타(金剛薩埵)>


<땅은 잊지 않는다(土地沒有失憶)>


<석탄에 기대 사는 도시(靠煤吃煤)>


예술은 대중의 마음 외침을 대변하고 자신의 정신세계를 올곧이 표현하기 위해 필요한 형식과 기법을 적절히 활용해야 합니다. 적절한 기법이나 형식이 없다면 새롭게 만들어 내야 하겠죠. 최종적으로는 작품이 대중과 공감대를 자아내는지, 정신적인 상호 소통이 제대로 되는지를 봐야 합니다.


근래 수년 학계와 예술계에서는 가지 뜨거운 논쟁이 이어져 왔습니다. 바로 ‘이젤 회화의 위기’, 때로는 ‘이젤 회화의 사망’으로까지 불리는 그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림을 그리는 이들이 줄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림에 형식이 사라졌다는 얘기도 아니고요. 형식은 여전히 존재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림과 사회의 관련성입니다. 그림에 인생과 시대를 반영하는 소구력이 약해졌다는 것이지요.


어느 새부터인가 예술은 점점 폐쇄적인 영역이 되어 버렸습니다. 처음 사회로부터 출발한 예술이 점점 사회와 멀어지며 소위 ‘이젤 회화의 위기’가 초래된 것이죠. 저는 이런 한계를 깨는 작품을 그리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스스로를 부호화된 성벽 속에 가두지 않고 기존에 확립된 저의 부호에도 끊임없이 도전하며, 확보할 있는 모든 이미지를 활용해 사회가 필요로 하는 곳으로 복귀하고 구조 속에 녹아 들기 위해 애쓰고 있습니다. 이런 방법을 통해 이젤 위의 회화든 설치미술이든 디지털아트든, 예술이 다시금 최대한 사회와 밀접하게 이어지도록 하는 것이 저의 목표입니다.



글|차오전치(喬振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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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한 연(緣)문화제’, 빙설의 정으로 인연을 이어가다

땅거미가 내려앉자 아름다운 빛깔의 빙등(冰燈, 얼음 등)이 어둠에 가려있던 룽칭샤(龍慶峽)를 밝게 비췄다. 빙등은 마치 하늘을 수놓은 무수한 별 같았다. 2월 3일 밤, 한국 충남국악관현악단과 뜬쇠예술단이 한국 전통공연인 ‘사물놀이’의 빠른 리듬에 맞춰 무대에 등장한 것을 시작으로 ‘빙설정-중한 연 문화제’가 막을 올렸다. 이제 중한 연 문화제는 얼음과 눈을 다리 삼아 중한 양국의 우정을 이어가는 자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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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한 관계를 이야기하며 한반도 미래를 탐색하다 -중한 미래발전 싱크탱크포럼 베이징서 개최

중국 차하얼(察哈爾)학회와 한국 국립외교원이 공동 주최하고 한국 아주경제신문사가 협찬한 ‘중한 미래발전 싱크탱크포럼’이 2017년 12월 11일 베이징(北京)에서 개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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