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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호용정(西湖龍井), 봄의 신록을 갈아넣은 듯 압도적인 향


2024-04-10      

‘녹차의 계절’ 봄, 청명절 전에 딴 명전차를 최고로 꼽는다. 사진/VCG

 

차를 마시면 좋은 점이 있다. 계절이 바뀌는 것을 자연스레 느낄 수 있다는 점이다. 다인(茶人)들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기 손에 들어온 차를 차우들과 나눠 마신다.


차를 나누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보이차를 제외한 차들의 유통기한이 짧은 탓도 있을 것이다. 녹차와 홍차는 1년만 지나도 제맛을 내지 못한다. 아무리 차를 많이 마시는 사람이라도 500g의 녹차와 홍차를 1년 안에 마시기에는 무리가 있다. 다인들이 두 가지 차만 마시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다인들 사이에서 차 나눔이 자연스럽게 이뤄진다. 꼭 유통기한의 문제를 떠나서라도 차 생활은 기본적으로 나눔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에 차를 나눠 마시는 일은 일상적이라고 보면 된다.


차를 처음 배울 때 차우들의 도움을 받지 않는 사람은 없다. 처음에는 혼자서 차 생활을 시작했다고 하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어떤 방식으로든 남의 도움을 받게 된다. 자신이 차를 마신다는 것을 숨기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그래서 다인들은 좋은 차를 구하면 차우를 만나는 자리에 가지고 나가 차를 나눈다. 아직 그런 경험이 없다면 어쩌면 좋은 차우를 만나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 아무튼 다인들은 좋은 차를 나누는 것을 미덕으로 여긴다.


다인들은 선물로 들어오는 차를 보며 계절의 변화를 느낀다. 반대로 자신이 누군가에게 선물할 차를 포장하면서 계절이 변했다는 것을 감각하기도 한다.


사계절 중 봄은 차 나눔이 시작되는 절기다. 여기저기서 봄 차가 들어오기 시작하면 다인에게도 봄이 온 것이다. 특히 이 계절에 나오는 녹차는 아주 귀하고 맛과 향이 좋다. 다른 차도 봄차가 좋지만 그래도 봄은 ‘녹차의 계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봄을 여는 대표적인 차는 서호용정이다. 서호용정은 중국 항저우(杭州) 명소인 시후(西湖) 일대 산에서 나는 차를 통칭하는 것으로 사봉(獅峰), 옹가산(翁家山), 호포천(虎跑泉), 매가오(梅家塢), 운서(雲棲), 영은사(靈隱寺) 일대가 주요 산지이자 차의 이름이기도 하다. 이름이 꽤 어려우니 꼭 외울 필요는 없다. 그냥 서호용정이라는 차 이름만 기억하면 된다.

서호용정을 우리고 있노라면 봄이 왔음을 온몸으로 느낀다.


건륭황제가 사랑한 ‘서호용정’, 중국 10대 명차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사진/인공지능(AI) 생성


연한 봄볕이 다구를 어루만지는 시간. 찻물에 비치는 봄 햇빛이 찬란하고 파릇파릇한 찻잎은 생기가 넘치며 봄나물 같은 향긋한 내음이 콧속으로 명주실처럼 선명하게 스민다. 봄을 대표하는 차로 녹차를 꼽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봄의 서호용정을 표현한 ‘백차련(百茶聯)’의 문장을 소개해 본다. ‘원외풍하서자소 명전용정여아홍(院外風荷西子笑 明前龍井女兒紅)’, 담장 밖 봄바람에 연잎이 흔들리는 경치가 마치 서시(西施)의 미소처럼 아름답고 청명(清明) 전에 딴 용정차는 명주(名酒) 뉘얼훙(女兒紅)만큼 귀하다는 뜻이다.


봄에 나오는 녹차 중에서 최고로 치는 차는 명전차(明前茶)다. 녹차면 녹차지 명전차는 또 무슨 차인가 싶을 수 있다. 명전은 청명절(清明節, 양력 4월 5일 즈음) 전에 딴 차를 가리키는데, 다른 때에 딴 것보다 맛과 향이 훨씬 뛰어나다. 그러니까 이 문장은 청명절 전에 딴 용정차를 형용한 것이다. 앞의 문장처럼 용정차는 중국 4대 미녀인 서시에 비유할 만큼 뛰어난 환경과 저장(浙江)성 사오싱(紹興)의 명주 뉘얼훙에 견줄 만한 맛을 지닌 명차 중의 명차다. 요즘 비유로 하자면 오드리 햅번의 미소처럼 아름다운 곳에서 수확한 차가 로마네 콩티(Romanée-Conti) 와인만큼 좋은 맛을 지니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내 모자란 필력으로 아무리 설명해봐야 작가의 의도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니 아쉬울 따름이다. 하지만 한번 서호용정을 마셔 본다면 작가의 심정을 정확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차를 마시는 사람이라면 서호용정을 한 번쯤은 마셔 보았을 것이다. 내게 녹차 가운데 최고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주저 없이 서호용정이라고 답할 것이다. 차를 잘 모르는 사람이라도 ‘용정차’라는 말은 들어보았을 것이다. 그 정도로 명성이 자자하다.


사진/인공지능(AI) 생성

 

서호용정은 중국에서 1959년부터 ‘10대 명차’를 선정한 이래 단 한 번도 그 이름이 빠진 적이 없을 정도로 훌륭한 차다. 10대 명차의 선정 기준은 ‘6대 다류’라 불리는 모든 차를 대상으로 한다. 따라서 날고 긴다는 차가 즐비한 중국에서도 10대 명차에 들어가는 것은 대단히 힘든 일이다.


서호용정이 유명한 이유야 당연히 맛과 향이 좋아서겠지만, 아무래도 어떤 상품의 인기가 높아진 데는 그 배후에서 명성을 널리 알린 셀럽(celebrity)이 있기 마련이다. 서호용정을 알린 셀럽은 청나라 성군으로 불리는 건륭황제다.


건륭황제는 치세 기간 동안 수도 베이징(北京)을 떠나 남쪽 지역인 강남으로 여섯 차례 순시를 떠났다. 이 중 네 번이나 용정 지역을 방문해 서호용정을 마셨다고 하니 용정차에 대한 그의 애정이 남달랐음을 알 수 있다. ‘황제가 사랑한 차!’ 이보다 더 사람들의 마음을 끄는 매력적이고 강력한 타이틀이 어디 있을까.


건륭황제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호공묘(胡公廟)라는 절 앞에서 처음 서호용정을 마신 뒤 절 앞에 있는 18그루의 차나무를 어차(御茶)로 지정하고 봉했을 정도로 서호용정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다고 한다.

서호용정이 나는 항저우는 온난하고 비가 많이 내리며 일조량이 많고 토양이 비옥하다. 또 배수가 좋은 토양 환경도 지니고 있다. 이 지역의 평균 기온은 섭씨 16도, 연 강수량은 1500mm 안팎이다. 흔히 말하는 천혜의 자연 환경을 지닌 곳이 바로 항저우다.


우롱차로 유명한 푸젠(福建)성 무이산(武夷山)이나 타이완(臺灣) 아리산(阿里山)처럼 운무가 많이 끼고 지대가 높은 고산 지역의 척박한 환경에서 자라는 차나무는 깊은 맛을 내는 찻잎을 틔운다. 반면 강남의 온난하고 온화한 기후 속에서 자라는 서호용정은 샘솟는 봄의 기운을 그대로 받은 덕에 오케스트라처럼 조화롭고 부드럽고 그윽한 맛과 향을 낸다.


강남의 온난한 기후 덕에 서호용정의 싹과 찻잎은 계속해 발아한다. 그래서 채집 기간도 길다. 앞서 말한 대로 서호용정은 청명절 전에 딴 것을 최상급 차로 친다. 서호용정의 등급은 총 6등급이 있는데 특급과 1급, 2급, 3급, 4급, 5급으로 나뉜다. 특급은 1아1옆(싹+첫 잎), 1급은 1아2옆(싹+첫 번째, 두 번째 잎)…… 이런 식으로 싹을 기준으로 거친 잎이 들어갈수록 등급이 점점 떨어진다.


가끔 도매시장이나 차를 파는 상점에 가면 서호용정이라고 당당하게 써 붙인 차를 단돈 1만원(약 55元)도 안 되는 가격에 파는 광경을 보게 된다. 이때 “와, 서호용정이 이렇게 싸다니!” 하고 차를 덥석 산다면 그는 아직 차에 관해서는 하수다. 아마도 그 차는 서호용정이라는 이름을 붙이긴 했지만,  5등급이거나 다른 찻잎을 섞었을 가능성이 크다.


사진/인공지능(AI) 생성

 

청명절 전에 따는 명전차는 500g에 60만원 또는 그 이상에 팔릴 정도로 고가다. 하지만 채엽부터 덖기까지 모든 과정이 수작업으로 이뤄지는 데다가, 한 번 사면 일 년 내내 즐길 수 있기 때문에 달리 생각하면 그렇게 비싼 가격은 아니다. 만약 차 가격이 부담된다면 차우들과 함께 구매해 차를 나누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어쨌든 이렇게라도 한 번쯤은 마셔볼 만한 차다.


서호용정은 1200년의 유구한 역사를 가진 차다. 중국에서는 서호용정이 <다경(茶經)>을 집팔한 육우(陸羽)가 살던 당 시대에 등장해, 송대에 이름을 알리고 원대에 소문이 나기 시작했으며 명대에 더 널리 알려졌고 청대에 와서 명성을 얻었다고 한다.


지금이야 고급차의 대명사로 일컬어지지만 처음에는 용정에 사는 주민들의 식후 음료로 쓰였다고 하니 건륭황제의 홍보 효과를 톡톡히 본 셈이다.


이는 우리나라 경상남도 하동 차와도 비슷하다. 하동의 야생차는 그 지역 주민들이 오래전부터 봄마다 물처럼 마셨다고 하지만 지금은 한국의 차 중에서도 가장 고급차로 꼽히지 않는가. 이는 아마도 녹차의 특성 상 찻잎이 특정 시기에 쏟아져 나오기에 가능한 일이 아니었나 싶다.


내가 마셨던 서호용정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차 애호가인 한 지인분이 직접 용정에 가서 사 온 것이다. 내가 마신 차는 용정차 중에서도 최고로 치는 차인 ‘사봉의 차밭’에서 건너온 차였다. 이 지인분은 진짜 용정차를 사고 싶어 사봉에 사는 할머니가 찻잎을 따고 차를 만드는 것을 옆에서 지키고 서 있다가 제다(製茶)가 끝나자마자 차를 사서 포장해 왔다.


맛을 소개하자면 대략 이러하다. 차를 우릴 때부터 향미로 밥을 지을 때처럼 아주 고소한 향이 올라온다. 직접 마셔본다. 입 속에 청량감이 느껴질 정도로 맑은 느낌이 퍼져 간다. 녹차임에도 쓴맛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물론 차는 우리는 기술에 따라 맛이 좌우된다. 그 지인분은 고수이니 분명 잘 우려냈을 것이다. 고소한 향이 가실 때쯤 올라오는 싱그러운 봄 내음은 여태껏 내가 마셔본 녹차에서는 절대 느껴보지 못한 압도적인 향이었다. 마치 신록을 갈아 넣은 것 같은 향과 맛이 마시는 순간 머릿속을 시원하게 해 주었다.


재미있는 사실은 한국에서 대중화된 ‘현미녹차’가 이 서호용정의 맛을 카피한 차라는 것. 고소한 맛을 재현하기 위해 곡물인 현미를 첨가한 것이다. 진짜 서호용정과 현미녹차의 차이는 미슐랭급 식당의 원물만 쓴 감칠맛과 MSG를 쓴 감칠맛의 차이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쉬울 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차를 모르는 사람도 서호용정을 우려 주면 “정말 맛 있다”는 말을 연발한다. 이 글을 쓰다 보니 구수하고 향긋하고 파릇파릇한 서호용정이 떠올라 입에 침이 고인다. 올봄에는 중국 차우들에게 기별을 넣어 명전에 난 서호용정을 구해 마셔야겠다.


서호용정의 그윽한 향과 함께 다인의 첫 절기인 봄은 시작된다.

 

글 | 김진방(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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