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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지(邢繼), 중국 제3대 원자력 기술을 개발한 거장


2019-09-18      

2017년 4월 27일, 중국 국무원 국유자산감독관리위원회의 첫 ‘국유기업 롤모델’ 수상식에서 싱지가 명예칭호를 받았다.  사진/싱지 본인 제공

원자력발전소는 명실상부 ‘국가의 중기(重器)’다. 이러한 ‘중기’를 만드는 사람은 그야말로 ‘대국의 거장’이라 아니할 수 없다. 오늘날 중국 원전에 대해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이 있으니, 바로 제3대 원자력기술 ‘화룽(華龍) 1호’ 독자개발에 성공한 싱지다. 그는 중국핵공업집단유한회사와 중국원자력발전공정유한회사 총엔지니어이며 ‘화룽 1호’ 총설계사이기도 하다.

올해 55세, 백발이 성성한 싱지는 겸손하면서도 기품이 묻어났다. 1987년 다야완(大亞灣)발전소에서 2015년 푸칭(福清)으로 옮기기까지, CP1000에 이어 ‘화룽1호’ 건설에 이르기까지, 싱지는 중국 원전사업 발전의 목격자였으며 중국의 ‘원자력 굴기’를 이끈 안내자 중 한 사람이었다. “엔지니어로서 우리가 바라는 단 한가지, 바로 조국을 위해 우리만의 선진 수준 원자로를 설계하는 것이다.” 

급변하는 세상, 원전과의 인연 
싱지가 태어난 해인 1964년은 중국이 신장(新疆) 뤄부포(羅布泊)에서 최초의 원자탄 실험에 성공한 해였다. 싱지의 고향은 쓰촨(四川)성 난충(南充)으로, 남다른 자연경관을 자랑한다. 강이 도시 중심을 가로지르고 그 양쪽으로는 둑이 세워져 푸르름을 선사하는, 또 저 멀리에서는 푸른 산이 감싸고 있는 듯한, 가히 무릉도원이라 할 만한 곳에서 싱지는 고등학교까지의 유년시절을 보냈다.

고등학교 졸업 후 해군과 선박 건조에 흥미를 느낀 싱지는 하얼빈(哈爾濱)선박공정학원(전 중국인민해방군 군사공정학원. 1970년 ‘하얼빈선박공정학원’으로 개편된 뒤 1994년 ‘하얼빈공정학원’으로 개명)에 지원했다. 대학 입학 후 실제로 그가 전공했던 것은 원자력 장치다. ‘대공지선(大工至善)’의 뜻을 받들었던 학교에서 완전무결함을 추구하는 이념이 그의 피에 완벽히 녹아 들었다. 

대학 진학 후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중국 원전사업은 새로운 이정표적인 사건을 맞이한다. 1984년 저장(浙江)성 하이옌(海鹽)현 친산(秦山)원자력발전소 건설 착공으로 중국이 최초 독자설계하고 건조한 원전발전소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당시 57세이던 어우양위(歐陽予) 원사는 전 중국에 걸쳐 유명세를 떨치며 모두가 인정하는 ‘중국 원전의 아버지’가 되었다. 선대 ‘원전인’들의 업적은 싱지를 크게 감동시켰다. 얼마 뒤 싱지는 ‘선배’들의 뜻을 물려받아 영광과 인내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987년 하얼빈선박공정학원 원자력장치학과를 졸업한 싱지는 원자력공업 제2연구설계원(중국원자력공정유한회사의 전신)에 배정되었다. 같은 해 중국은 프랑스전력공사(EDF)와 손잡고 M310원전기술을 최초 도입하고 100만Kw급 다야완원자력발전소 건설에 착수했다. 

발전소 건설이 진행되면서 중국인의 참여가 필요해졌다. 특히 원자력 관련 부문의 인재가 필요했다. 이러한 가운데 싱지는 여러 단계를 거쳐 다야완원전으로 자리를 옮겼고, 그렇게 원전 삶의 첫 걸음을 떼게 됐다. 

다야완원전 건설에 참여한 싱지는 해박한 전문지식과 끊임없는 노력, 그리고 합리적인 의심으로 순조롭게 프랑스와의 공동사업에 적응했고, 단기간에 프랑스인들과의 대화와 프로젝트 방안 논의 등에도 참여할 수 있게 됐다.

싱지는 생각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그는 결점을 발견하면 끊임 없이 문제를 제기했다.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일부 사소한 부분에 있어 프랑스 엔지니어들과 생각이 다른 경우가 있었지만, 싱지의 의견이 맞거나 합리적인 경우가 많았고, 결국 프랑스 엔지니어들도 싱지의 견해를 존중하기 시작했다. 때로는 도안을 직접 싱지에게 주며 그에게 시공을 지휘하도록 하기도 했다. 다야완원전에서 일하면서 싱지는 당시 국제적으로 가장 앞서 있던 원전 엔지니어링 프로세스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갖게 됐으며, 원전 프로젝트 설계 경험을 쌓았다. 

다야완원전 이후에는 중국 원전사업발전의 거의 모든 중요한 부분에 싱지는 참여했다. 1996년 중국이 예치쩐(葉奇蓁) 총설계사가 설계한 친산 원전2기 건설이 착공되면서 싱지 또한 친산원전사업에 참여했다. 같은 해 친산원전2기 기술을 기반으로 개량된 링아오(嶺澳)원전2기 건설이 시작되었는데, 싱지가 총설계사로 임명됐다. 그의 지휘 하에 링아오원전 2기는 중국 최초로 100만Kw급 원전의 자주화를 실현했다. 

당시 싱지의 업무 부담은 막중했다. 한 해의 마지막 밤, 싱지와 동료들은 원전공사현장을 지켜야 했다. 현장을 찾아온 직원들의 가족들 중에는 싱지의 아내와 이제 갓 초등학교에 입학한 아들도 있었지만, 싱지는 그저 아들을 데리고 원전공사현장을 한 바퀴 돌아보는 것으로 위안을 삼아야만 했다. 달빛이 어슴푸레했던 그날 밤, 어둠에 뒤덮인 원전은 마치 공상과학영화의 한 장면 같았고, 그 장면을 본 아들은 짧은 소리를 내질렀다. 

아들은 무서워서가 아니었다. 뒤늦게 안 사실이지만, 아들은 작문시간에 ‘그 거대한 물건’에 깜짝 놀랐고, 아버지로 인해 ‘자부심을 느꼈다’고 썼다. “아들에게 설명해 주었다. ‘모두들 하루도 빠짐 없이 전기를 써야 한다. 아빠가 하는 이 일은 바로 깨끗하고 값싼 전기를 만들기 위해서다. 이것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일’이라고.” 싱지의 음성은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내 생각에 아들이 내 말을 알아들은 것 같았다.” 당시 아들의 작문을 싱지는 10년 넘게 간직했다. 

2017년 11월 29일, 싱지가 '화룽 1호' 공사 현장에서 시설물을 살펴보고 있다.  사진/싱지 본인 제공

확고한 의지, 자주혁신을 위한 분투 
첫 단계에서부터 중국 원전은 탐색과 도입·소화·흡수·재혁신의 길을 걸어왔다. 이 가운데 혁신은 가장 어려운 고비였다. 다야완원전 건설에 참여하며 싱지는 빠르게 성장했을 뿐 아니라 원전 독자개발능력 확보가 중국에 갖는 중요성과 절박성을 깨달았다. “다야완원전을 건설하던 때 우리는 원전의 바닥타일부터 전화선·시멘트까지 해외에서 수입해야 했다. 정말로 마음이 불편했다.” 

훗날 ‘인진라이(引進來)’가 심화하면서 미국·일본·프랑스의 설비업체들이 중국 원전시장의 거대한 잠재력을 확인했다. 그러나 협상 과정에서 이들은 모두 강경한 태도를 보였으며, 조금의 양보도 하지 않으려 했다. 특히 핵심기술이 탑재된 중요 설비에 대해서는 고가를 요구했다. 이와 함께 일부 외국기업들은 설비 판매에 있어 가혹한 조건들을 내걸었다. 중국 국산의 원자로는 해외시장에서 해당 업체와 경쟁을 할 수 없다는 것 등이 그 예로, 이는 많은 원전인들로 하여금 답답함을 느끼게 했다. 비슷한 사례를 겪으면서 싱지는 더욱 마음을 굳혔다. “국민경제의 명운과 국가안보에 관계된 핵심영역에서 진짜 핵심기술은 돈을 주고도 사올 수 없는 것이고 시장과 바꿀 수도 없는 것이다. 중국 원전은 흔들림 없이 자주혁신의 길을 걸어야 한다.” 

다야완원전 착공 후 중국 원전인들은 프랑스의 M310 원전기술을 기반으로 이를 소화하고 흡수하며 끊임없이 개량하기 시작했고, 재혁신을 실현했다. 이것이 곧 2세대 개량형 100만Kw급 원전기술인 CP1000이다. 

1997년 중국 원전인들은 ‘177노심’ 개념을 제시했고, 100만Kw급 원전방안의 주요 매개변수에 대한 논증을 시작했다. 노심은 원전의 ‘핵심’으로, 핵반응 노심용량 변화를 제시한 것은 중국이 자신만의 원자로를 개발할 때가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다야완원전이 채택한 M310은 ‘157노심’이었다. ‘177노심’과 겉으로 보여지는 차이는 20뿐이었지만 효율성을 높이는 동시에 안전성도 대대로 개선했다. 이는 이후 CP1000의 중요한 개량부분의 하나가 되었다. 

‘177노심’ 외에도 CP1000은 ‘이중안전장치’ 등 21개 항목의 핵심 개량기술이 집약되었다. 모든 기술개량 과정 과정마다 싱지와 그의 동료들은 자신의 극한에 도전해야 했다.  

2009년 1월 17일 CP1000기술방안에 대한 전문가 토론회가 열리며 원전분야의 전문가들이 운집했다. 긴장되지만 열띤 분위기 속에 진행된 당시 회의의 핵심 의제는 바로 CP1000 안전장치 설계문제였다. 단층안전장치를 선택함으로써 프로젝트의 진행속도를 확보할 것인지, 이중안전장치를 채택함으로써 설계를 우선 추구할 것인지를 놓고 전문가들의 의견이 첨예하게 대립했다. 

발언 차례가 된 싱지는 노트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전날 밤 쓴 원고였다. “이중안전장치 채택을 건의합니다. 도전이 따르는 일이지만 더욱 높은 목표이고, 해야 한다면 가장 좋은 걸 해야 합니다.” 

짧지만 결연함이 느껴지는 발언이 끝나자 회의실은 잠시 적막함에 빠졌다. 곧 이어 열렬한 박수가 터져 나왔다. 싱지의 의지는 CP1000 추진의 방향을 제시해 주었고, 무엇보다 훗날 탄생한 ‘화룽 1호’라는 최신 3세대 원전의 기틀이 되었다.

2011년, 싱지는 CP1000의 총설계사가 되었다. 그 해 싱지와 같은 세대 원전인들은 중국 최초의 2세대 개량형 100만Kw급 원전 CP1000 독자개발을 완수했다. 이는 심각한 사고에 대비한 예방 및 완충조치를 강화한 모델로, 원자로 전반의 안전성과 경제성·기술력을 한 단계 더 끌어올림과 동시에 원전건설 리스크를 효과적으로 낮추었다. 

CP1000이 심사와 함께 본격 가동을 앞두고 빛을 발하기 시작할 무렵, 일본 후쿠시마 원전에서 사고소식이 들려오며 모든 것이 순식간에 중단되었다. 
 
 2018년, 푸칭 원자력 발전소 5호 유닛의 항공사진  사진/싱지 본인 제공

흐름을 거스른 성과,‘화룽’의 탄생  
2011년 3월 11일, 일본에서 발생한 지진과 쓰나미로 후쿠시마현은 중대 재해지역 중 하나가 되었다. 지진이 초래한 쓰나미의 파고는 무려 14m에 달하며 후쿠시마 원전에 설치된 방파제 높이를 넘었다. 해수로 인해 비상 디젤발전설비가 침수됨으로써 발전소의 모든 전원이 꺼졌고, 에너지가 방출되지 못하자 결국 후쿠시마 원전의 심각한 방사능 유출사고가 일어나게 되었다.

후쿠시마 원전사고는 전세계 원전사업에 엄중한 경고음을 울렸다. 사고 발생 5일만에 중국 국무원은 <원전산업 발전에 관한 4가지 의견>을 긴급 하달해 중국 국내의 모든 원전프로젝트 심의를 전면 중단했다. 이로써 당초 2011년 말에 착수 예정이었던 CP1000 프로젝트 또한 보류되고 만다. 2012년, 국무원은 3세대 원전 표준에 부합하는 프로젝트만 심사 및 통과시킬 것을 주문했지만 CP1000은 그 대상에 포함되지 않았다. 그 해 연말로 계획했던 CP1000푸칭 5호기 건설 착공도 중단됐다.

2018년 4월, 싱지와 '화룽 1호' 연구팀이 단체사진을 찍었다.  사진/싱지 본인 제공

그러나 지싱 등의 원전인들은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오히려 당시의 위기를 한 걸음 더 나아가기 위한 동력으로 삼았다.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후 중국핵(원자력)공업집단유한회사는 원로 전문가들을 초빙해 분석과정을 거쳤고, 이를 통해 ‘2세대 개량형 포기, 3세대 기술 추진’의 결정을 내렸다. 모두들 3세대 원전기술 개발에 박차를 가했고, 마침내 ACP1000 기술을 개발했다. 

177노심이나 이중안전장치 외에 지싱과 그의 팀원들은 후쿠시마 원전사고를 거치며 ‘능동+비능동’의 안전설계이념을 독창적으로 제시했다. “이른바 능동안전이란 사고가 발생했다고 가정했을 때 전력구동의 안전시스템의 물 공급을 통해 원자로를 냉각시키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시스템은 여러 층의 중복장치가 있어야만 안전기능의 신뢰성을 높일 수 있다. 반면, 비능동 안전이라는 것은 주로 설비가 비상전원을 포함해 모든 전원을 상실한 극단적인 상황이 발생했을 때 전력구동의 물 펌프가 정상 작동할 수 없어도 안전하게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다. 비능동 안전시스템은 외부 전원에 의지하지 않아도 되는데, 중력과 온도 차 등에 의지해 동력을 제공하기 때문에 시스템 작동을 유지할 수 있고, 원자로 사고 후에 발생되는 에너지를 방출할 수 있다. 때문에 더욱 효과적으로 안전을 보장할 수 있다.” 지싱에 따르면, 이러한 개념에 따라 설계된 ACP1000은 완벽한 위험사고 예방 및 위험성 완화 조치를 갖추고 있다. 오늘날 세계 최고 수준의 원전 설계방안과 견주어도 전혀 손색이 없는 ACP1000이다. 

중국 원전업계는 2013년 후 희소식이 끊이지 않았다. 먼저 2013년 4월 중국핵공업집단유한회사의 ACP1000 기술과 중국광핵집단유한회사의 ACPR1000기술 결합으로 ‘화룽 1호’가 탄생했다. 이후 2014년 12월, ‘화룽 1호’는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상용원자로 상용안전성검사를 통과했고, 앞서 2014년 11월에는 중국국가에너지국(國家能源局)이 푸칭 5·6호기의 ‘화룽 1호’ 기술 채택을 승인했다. 2015년 5월 7일, ‘화룽 1호’의 첫 시범사업이 착공됐다. 

훗날 지싱은 일기에 이같이 기록했다. “중국 원전발전과정에서 2015년 5월 7일은 발전사에 길이 남을 하루였다. 이날 푸칭 원전 5호기에서 ‘화룽 1호’ 시범사업의 첫 삽을 뜬 것은 중국 독자 개발 원전기술이 세계 선진 대열에 합류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화룽 1호’ 착공 이후 한 달 여가 지난 6월 15일, 리커창(李克强) 중국 국무원 총리가 중국원자력발전공정유한회사를 찾았다. 이후 리 총리는 지싱과 그의 연구원들에게 “원전 발전은 안전이 첫 번째다. 절대적으로 안전을 확보해야 한다. 우리는 중국 국내 원전 규모를 더 크게 발전시켜야 할뿐 아니라 중국 원전설비를 가지고 세계로 나아가야 한다.… 이 국가의 중기를 만든 여러분은 우리의 이름을 드높여 주고 우리는 여러분들을 지지해 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리 총리가 말한 바와 같이 ‘화룽1호’는 탄생과 동시에 전세계 원전시장에서 가장 주목받는 신성이 되었다. 2015년 8월 20일, 파키스탄 카라치 원전 1호기에 ‘화룽 1호’ 채택을 위한 작업이 시작된 데 이어 2016년에는 카라치 원전 3호기 또한 착공되었다. 파키스탄 외에도 중핵공업집단은 아르헨티나 원전회사와 2020년까지 아르헨티나에 100만Kw급 원전 1기를 건설한다는 내용의 협의를 체결했다. ‘화룽 1호’, 즉 중국 원자력기술이 국경을 넘어 신시기 중국의 또 다른 ‘명함’이 된 것이다. 

중국 원자력사업의 성장과정을 돌아보던 싱지는 격앙된 어조로 말했다. “중국 원자력은 수십 년 간 발전해오는 동안 줄곧 ‘따라가는’ 수준에 있었지만 ‘화룽 1호’는 ‘비슷한’ 수준을 실현해 주었다. 이는 전세계 원자력 발전에 있어 중국이 만든 역사적인 변화다.” 물론 이러한 성과는 3대에 걸친 원전인들이 노력과 청춘을 바쳐 이룬 것들이다. “원로 원전인들은 목숨을 바쳐 국가에 충성했다. 중국의 원자력산업을 위해 견실한 기초를 다져주었다. 중견역량은 기다리고만 있지 않았다. 먼저 출격하며 자주화를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또 젊은 세대의 부단한 자주혁신이 있었기에 중국 원자력산업의 오늘이 있는 것이다. 우리는 앞으로 분명히 ‘앞서 뛸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럴 것이라고 굳게 믿는다.”

글|장진원(張勁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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