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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시법랑창’, 중국 경태람의 영광을 재현하다


2019-08-15      

베이징시법랑창 회사 빌딩 모습 사진/베이징시법랑창 제공

중국은 ‘자기’로 유명하다. 그러나 자기보다 더 유명한 공예품이 있다. 정교하고 우아한 문양, 눈부시게 빛나는 금색과 청록색의 하모니, 마음을 움직이는 화려한 정취, 휘황찬란한 예술적 음률, 독자적인 파(派)를 형성한 민족 풍격 등이 하나로 어우러져 보고 있으면 화려하고 아름다운 자태에 탄복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경태람(景泰藍)이다.

경태람의 학명은 ‘동태겹사법랑(銅胎掐絲琺琅)’으로 원나라 때 아라비아에서 중국으로 들어온 공예품 제작기술이다. 명나라 경태 연간에 성행해 ‘경태람’이라고 한다. 자금성 금란보전(金銮寶殿), 국자감 피옹궁(辟雍宮), 이화원(頤和園) 배운전(排雲殿) 같은 황실 전당에도 경태람의 보석 같은 빛이 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낸다. 때문에 경태람은 ‘중국람’이라고도 한다.

경태람은 ‘수입품’이지만 중국에서 가장 발전했다. 경태람은 명청 양대의 번영과 민국 시기 쇠락을 거쳐 신중국 성립과 더불어 다시 한번 생기를 띠게 됐다. 이제 중화 정수인 경태람은 가장 가치있는 국가문화 명함 중 하나가 됐다. 이 명함의 낙관 자리에는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베이징(北京)시법랑창(琺琅廠) 이름이 찍혀있다.

베이징시법랑창이 설립한 경태람예술박물관. 사진은 경태람예술박물관의 일부 내부 모습이다. 사진/베이징시법랑창 제공

경태람의 ‘위기’에 설립되다
중국의 고대 공예품은 대부분 관(官)과 민(民)이 공유했지만, 경태람은 예외였다. 중국에 들어오고 1860-70년대까지 경태람은 궁궐에서만 제작됐다. 경태람은 미술, 공예, 조각, 상감, 야금, 유리 정련 등 복잡한 기술의 결정체이기 때문이다. 경태람 제작기술은 복잡하고 신비로워 제품 하나를 완성하려면 108번의 공정을 거쳐야 한다. 전 공정을 다 배우려면 10년이 걸렸다. “경태람 하나가 관요(官窯) 10상자”라는 말이 생길 정도였다.

명청 시기에 경태람 공예가 전성기를 누렸다. 명나라 때의 ‘어용감(禦用監)’과 청나라 때의 ‘조판처(造辦處)’는 황제가 쓰는 법랑작(作)이나 법랑창을 설치했다. 이 시기 경태람은 대형 기명(器皿)을 위주로 역대 도자와 청동기의 전통 조형에 따라 금과 동 두 재료로 제작했다. 제품으로는 병(瓶), 반(盤), 완(碗), 합(盒), 로(爐), 훈(薰), 정(鼎), 준(樽), 납태(臘台) 등이 있다. 장식 도안은 대명련(大明蓮)이 주를 이루고 화초도 있으며 청동기 문양 변형과 기용기봉(夔龍夔鳳) 등 상서로움을 뜻하는 도안이 사용됐다. 색채의 가장 큰 특징은 남색을 바탕으로 홍, 백, 녹, 황, 자 등을 배합해 화려하고 고전적이면서 우아한 스타일을 보여주었다.

청나라 말에 이르러 민족 색채가 선명한 경태람은 해외로 나가 서양 국가들의 주목을 받았다. 1904년 경태람 공예품인 ‘보정로(寶鼎爐)’가 미국 시카고세계박람회에서 1등 상을 받았고, 1915년 파나마 만국박람회에서 다시 한번 1등을 수상했다.

그러나 청나라가 멸망하자 경태람은 큰 타격을 받았다. 궁궐의 수공업 장인들이 민간으로 흩어졌고 원재료 값이 상승하고 정세마저 불안해 정부는 수공예업의 발전을 관리 감독하고 지원할 여력이 없었다. 신중국 성립 전까지 업계 전체가 위태로운 지경이었다. 인적·물적 지원이 끊기자 경태람 업계는 고인 물처럼 활기를 잃었고 모조품이 범람했다. 당시의 경태람 모조품은 도안이 단순하고 색채가 단조로우며 태골(胎骨)이 가볍고 얇아 물에 들어가면 뜰 정도여서 ‘하표자(河漂子)’라고 불리기도 했다.

존망의 기로에 섰던 경태람에 서광이 비쳤다. 부흥하게 된 계기를 설명하면, 유명 건축가 린후이인(林徽因)과의 인연을 빼놓을 수 없다. 어느 날, 린후이인이 베이징 하이왕(海王)촌 골동품 시장에서 경태람 화병을 샀다. 주인은 그녀에게 “베이징 경태람은 수백 년 동안 유행했지만, 지금은 거의 맥이 끊겼다”고 말했다. 그 말에 그녀는 걱정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남편과 유명 건축가인 량쓰청(梁思成)과 함께 칭화(淸華)대학교 건축과에 특수공예 경태람을 구하기 위한 공예미술팀을 마련했다. 이후 린후이인 팀은 생산 조사 연구, 도안 디자인 작업 등을 진행해 경태람에 다시 생기를 불어넣었다.

다행히 신중국 성립 이후 중국 정부가 경태람을 살리기 위해 ‘인재를 초빙하고 기술을 보존하며 제자를 양성해 특수공예를 근본적으로 보호하고 발전시킨다’는 정책을 내놓고 다양한 우대 정책과 지원책을 내놓았다. 1950년 베이징시는 경태람 국영기업을 설립하고 법랑 작업장을 마련해 집체(集體) 또는 민관 합작경영 기업을 설립했다. 이렇게 경태람은 회복에서 발전의 궤도로 올랐다. 1956년 1월 10일, 42개 법랑 작업장과 공장이 합병해 민관 합작경영사인 베이징시법랑창을 설립했다. 이것이 베이징시법랑창 유한책임공사의 전신이다.

아펙회의에 사용된 국가선물 ‘사해승평' 사진/베이징시법랑창 제공

심혈을 다 바친 거장들
베이징 징타이루(景泰路)와 안러린루(安樂林路) 교차로 남서쪽에 베이징시법랑창이 있다. 베이징시법랑창은 중국 경태람의 첫 국가급 비물질문화유산(무형문화재) 생산·보호 시범기지다. 이 기업의 생명선은 수많은 장인의 공헌으로 연장됐다.

베이징시법랑창 하면 첸메이화(錢美華)를 빼놓을 수 없다. 그녀는 법랑창의 1대 총공예사이자 량쓰청과 린후이인의 제자다. 린후이인이 임종 전 “경태람은 국보이니 신중국에서 계승이 끊겨선 안 된다”고 당부했다. 그녀는 경태람 발전과 전승에 필생의 정력을 쏟았다. 1958년 첸메이화는 베이징시법랑창에서 경태람 설계 업무를 시작해 60여 년 동안 경태람을 위해 자신의 청춘과 심혈을 다 바쳤다.

당시 량쓰청은 첸메이화에게 경태람의 발전 과정을 알려주기 위해 선생님 한 분을 소개해주었다. 그가 바로 중국 역사박물관 연구원인 선충원(沈從文) 선생이다. 선충원은 유명한 고고학자로 당시 고궁(故宮)박물관에서 겸직해 일하고 있었다. 그는 첸메이화에게 고궁에는 경태람이 많으니 고궁에 가서 도안을 모사해보라고 제안했다. 고궁에서 경태람을 보관하는 진보관(珍寶館)은 보통 대외에 개방하지 않기 때문에 첸메이화와 고궁 담당자는 상의해서 첸메이화가 안에 들어가면 문을 잠그기로 했다. 새벽에 들어가면 저녁이 돼서야 나왔고 10여 일 연속 작업을 한 끝에야 마침내 전통 문양의 규칙을 알게 됐고 유실된 도안도 찾았다.

공장에 입사하자마자 첸메이화는 경태람 공예가 매우 복잡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작업장의 모든 공정을 표로 만들고 통계를 내보니 공정은 크게 제태(製胎), 겹사(掐絲), 소한(燒焊), 점람(點藍), 소람(燒藍), 마광(磨光), 도금(鍍金) 7개 공정으로 나뉘었고, 세부 공정은 108개나 됐다. 매 공정은 다시 여러 세부 작업으로 나뉘었다.

설계를 담당하게 된 첸메이화는 우선 경태람의 조형 규격화에 나서 도안대로 생산하는 것을 시행했다. 예전 작업장은 사부가 제자를 양성하는 시스템이었다. 사부들은 조금 보수적이어서 제자들에게 비법을 전부 알려주지 않았다. 이 기간 동안 첸메이화는 중국 최초의 경태람 창작 교재인 <경태람 창작설계(景泰藍創作設計)>를 집필해 사람들에게 조형과 문양 규칙, 색 배합 방법을 알려주었다.

첸메이화 외에 베이징시법랑창은 탁월한 장인을 많이 배출했다. 미젠슝(米振雄), 다이자린(戴嘉林), 중롄성(鍾連盛), 이푸청(衣福成) 등은 선배 대가의 의발을 계승하고 경태람 발전에 헌신해 스승을 넘어선 작품을 내놓아 베이징시법랑창의 영광을 새로 썼다. 현재 전국의 2/3에 해당하는 경태람 우수 인재가 이곳에 운집해 있다.

베이징시법랑창은 또한 업계 표준화 작업을 대대적으로 추진했다. 1963년 베이징시법랑창은 <경태람 공예작업 규정(景泰藍工藝操作規程)>과 <공정품질 표준(工序質量標準)>을 마련해 경태람 업계 최초로 문자화된 표준을 만들었다. 1986년 12월 베이징시 표준계량국은 베이징시법랑창이 초안한 <경태람 공예품 기업 표준(景泰藍工藝品企業標準)>을 발표하고 시행했다. 1996년 3월 베이징공메이(工美)그룹, 베이징시법랑창이 초안하고, 같은 해 6월 중국 경공총회가 <중화인민공화국 경태람 공예품 업계표준(中華人民共和國景泰藍工藝品行業標準)>을 발표하고 시행했다. 이로써 경태람 업계는 통일된 제품 품질 표준이 생겨 경태람 생산이 과학적으로 관리되기 시작했다.

1999년 베이징시법랑창은 첫 번째 ‘중화 라오쯔하오(中華老字號)’ 기업에 선정돼 중국 경태람 업계에서 유일한 중화 라오쯔하오가 됐다. 2006년 경태람 제작기술이 중국 국가급 비물질문화유산 명단에 등재됐다. 2011년 11월 중국 문화부는 베이징시법랑창을 국가급 비물질문화유산 생산 보호 시범기지로 선정했다.

업계 부흥의 기억을 보존하고 기업 발전의 생명선을 전시하기 위해 2012년 6월 베이징시법랑창은 중국 최초의 경태람 예술박물관을 개관했다. 약 1000㎡ 규모의 박물관 안에는 경태람 발전사와 베이징시법랑창의 진귀한 자료는 물론, 최근 법랑창이 복원한 원·명·청 시기별 특징을 살린 법랑기도 전시돼 있다. 전시관에는 또한 베이징시법랑창 설립부터 시기별 작품, 공예미술 대가와 노(老) 예술가의 대표작을 전시해 이 기업의 날로 새로워지는 생명선을 보여주었다. 첸메이화의 복수주기루(福壽周器垒), 중롄성의 번화사금(繁花似錦) 상반(賞盤), 하몽(荷夢) 시리즈와 첸메이화, 다이자린, 미전슝, 중롄성 4인이 공동 창작한 <천룡팔보호존(天龍八寶壶尊)> 같은 작품이 관람객의 감탄을 자아냈다.

‘파(破)’와 ‘립(立)’하며 단련해 나가다
1990년대는 중국의 많은 업계가 발전의 분수령이었다. 베이징시법랑창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전 계획경제 시대는 경태람이 수출로 외화를 벌던 시대였다. 베이징시법랑창 제품은 거의 전부 대외무역공사에 의해 일괄 수매돼 일괄 판매됐다. 기업은 주문에 따라 생산하고 국제시장의 중국 전통 수공업품에 대한 수요만 만족시키면 됐기 때문에 혁신 제품이 비교적 적었다. 1980년대 말부터 개혁개방과 시장경제로의 전환이 진행되면서 경태람은 베이징이 독점해 수출하던 구도가 깨졌고, 국내시장 점유율도 점점 커졌다. 때문에 베이징시법랑창은 전통 계승을 기반으로 더 많은 문화적 의미와 시대성을 부여해 시장 수요를 만족시켰다.

이푸청(衣福成) 베이징시법랑창 유한책임공사 대표이사는 “1980년대 이후 기술자들은 혁신을 거듭해 경태람에 새로운 요소를 주입했다. 색깔을 살펴보면 원, 명 양대에는 7개를 썼고, 청대에는 20여 개를 썼지만 지금은 70여 개로 늘었다. 소한 과정에서는 기존의 석탄 연료를 천연가스로 바꿔 온도 조절이 쉬워져 표면이 더 반들반들하고 색깔이 균일하며 기포가 거의 보이지 않게 됐다. 겹사와 점람 과정에서는 보조 도구를 혁신하고 개선해 겹점(掐點) 기술이 더 정교해졌다”고 말했다.

2002년 11월 베이징시법랑창은 체제 전환을 끝냈다. 새로 설립된 베이징시법랑창 유한책임공사는 경태람 공예의 응용 분야를 적극 모색하고 확장해 경계를 넘고 융합하는 대담한 시도를 했다. 새로운 디자인 철학이 있고 현대적 감각이 선명하며 시대적 분위기가 담긴 대형 경태람 예술 작품이 속속 제작됐다.

2005년 6월 중롄성 총공예사가 ‘화개부귀(花開富貴)’ 경태람 분수를 디자인했다. 이것은 단동(斷銅)과 참동(錾銅) 장식과 조명, 분수 시스템을 결합한 대형 환경예술 작품이다. 총 길이 28m, 넓이 8.2m, 열쇠 모양에 조명을 더해 메인 통이 어우러져 자연스럽게 중국의 전통적인 ‘취보분(聚寶盆, 화수분)’ 이미지가 만들어져 현지의 새로운 시각 중심이 됐다.

경태람이 국가 선물로 외교 무대에 오르면서 국가 선물 제작사 중 하나인 베이징시법랑창도 주목받게 됐다. 2014년 베이징시법랑창은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회의에 사용된 국가 선물 <사해승평(四海升平)> 경태람 상병(賞瓶)을 60일의 노력 끝에 완벽하게 완성했다.

<사해승평> 경태람 상병은 중국의 국가급, 베이징시 공예미술 대가 여러명이 공동 창작한 작품이다. 38cm 높이로 톈단(天檀) 기년전(祈年殿)의 높이 38m를 같은 비율로 축소했고, 최대 직경은 21mm로 APEC 21개 경제체를 대표했다. 얇고 긴 목이 병의 형태를 우아하고 아름답게 보이게 했고 청람색 병 몸체에 물결이 넘실거리며 APEC 휘장, 천단, 장성, 한당 건축 등을 병에 새겼다. 병 문양은 중국 실크로드에 있는 둔황(敦煌)의 특별한 보상화(寶相花) 색을 사용해 태평양의 푸른색을 대표했다. 전체적으로 전통과 현대를 완벽하게 융합한 디자인과 경태람 전통 공예 특유의 정교한 기술을 재현했다.

이밖에 2017년 다보스포럼 연차총회의 국가 선물 ‘사면방존(四面方尊)’과 같은 해 UN 본부 국가선물 ‘성세환가(盛世歡歌)’ 모두 베이징시법랑창에서 제작했다. 이푸청 대표이사는 “이런 국가 선물용 경태람은 우리 중화민족의 예술 수준과 제작이 최고 수준인 것을 보여주었다. 제작자들은 자신의 지혜와 땀으로 국가 선물 제작에 가장 완벽한 답안을 제출했다”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산업화와 대량화 생산이 주류를 이루는 오늘날에도 베이징시법랑창은 여전히 전통 기술을 유지하고 있다. 시장에 의해 흔들리지 않고 108개 공정을 엄수해 작품 하나를 완성하는데 최소 3개월이 걸린다. 이푸청 대표이사는 “이렇게 해야만 경태람 기술의 혼을 지킬 수 있고, 모든 제품이 명품임을 보장하며, 장인의 품질을 진정으로 전승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글|장진원(張勁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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