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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숨결을 간직한 고도(古都) 난징


인민화보

2017-02-14      인민화보

 

어둠이 내려앉은 현무호 사진/ 후더원(胡德文)

 

금릉(金陵) 또는 건강(建康)이라 불렸던 난징은 베이징(北京), 시안(西安), 뤄양(洛陽) 함께 중국 4 고도(古都)’로 꼽힌다. 서기 229 삼국시기 동오(東吳) 손권이 처음으로 난징에 수도를 세운 동진(東晉) 남조의 ()·제()·량()·진() 잇따라 이곳을 도읍으로 삼았다. 이어 남당(南唐), 남송(南宋), (), 태평천국, 중화민국의 도읍지가 되었으며 이로 인해 ‘십조도회(十朝都會)’라고도 불린다. 이토록 유서 깊은 도시인 난징을 걷고 있노라면 마치 역사의 중심에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문화와 교육의 도시  

손중산(손문) 선생은 난징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난징은 중국의 고도로 베이징 보다 앞에 있다. 난징은 지리적으로도 뛰어나 높은 산과 깊은 , 평원을 가지고 있다. 3가지 천혜의 환경이 곳에 있으니, 세계 어떤 도시도 이곳에 비할 아니다.

 

창장(長江) 하류 중부, 장쑤(江蘇) 남서부에 위치한 난징은 물산이 풍부하다. 동서남북 장방형의 도시로 남북 직선거리는 150km 달하고, 동서 너비는 중부가 50-70km, 남부와 북부 양단은 각각 30km 정도다

 

난징의 볼거리는 대부분 시내에 집중되어 있다. 북동쪽의 서하산(棲霞山)에서 시작해 남쪽으로 뻗은 시가지까지가 ‘종산풍경구(鐘山風景區). 명효릉(明孝陵), 중산릉(中山陵), 영곡사(靈谷寺) 이곳에 있으며 두타령(頭陀嶺)풍경구를 비롯한 다른 풍경구도 함께 둘러볼 있다. 난징 사람들은 종산(鐘山) 자금산(紫金山)이라고 부르는 익숙한데, 자금산과 현무호(玄武湖) 난징의 중심으로 여긴다.

 

종산풍경구 외에도 난징에는 명승고적이 많다. 산과 물과 숲이 도시와 뛰어난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역대 왕조와 중화민국, 불교 관련 문화적 색채도 매우 짙다.

 

부자묘(夫子廟) 일대는 난징 남쪽의 진회하(秦淮河) 축으로 했을 때의 중심이 되는 곳으로 난징에서 가장 번화한 지역이다. 공자묘, 학궁(學宮), 강남공원(江南貢院) 등이 있는 부자묘 일대는 진회하 경관의 으뜸이다. 난징의 대표 건물을 있음은 물론이고 민속문화, 먹거리, 야시장까지 체험할 있어 난징 그대로의 멋을 만끽할 있는 곳으로 꼽힌다.

 

 

진회하를 따라 이어지는 첨원(瞻園)·백로주(白鷺洲)공원·중화문(中華門), 도엽도(桃葉渡) 진회교(鎮淮橋) 오고 가는 유람선, 강변의 누각이 연출하는 아름다움 등으로 난징은 ‘십리주렴(十里珠簾)’이라는 미칭(美稱) 얻었다

 

난징은 예로부터 배움을 중시하는 도시였다. 문헌 기록에 따르면, 일찍이 동한 건무(建武) 6년인 서기 30 단양태수(丹陽太守) 학교를 세웠던 것으로 전해진다. 오나라 영안(永安) 원년인 서기 258년에는 오경제 손휴(吳景帝 孫休)가 오경박사(五經博士) 설치하면서 난징 최초의 국립 고등교육기관인 국학(國學) 설립됐다. 국학은 이후 여러 왕조를 거쳐 존속되다 명대에 이르러 당시 중국에서는 물론, 전세계적으로도 가장 번성했던 국립대학 남경국자감(南京國子監)으로 발전되었다. 남경국자감은 규모 면에서나 교육의 면에서나 뛰어난 수준을 갖추고 있어 주변국의 많은 학생들이 이곳으로 유학을 왔다.

 

강남공원은 명·청 시기 중국 강남지역의 과거시험장이었다. 명·청 시기 장원 급제자의 절반 이상이 이곳에서 배출되어 난징은 ‘천하문추(天下文樞) ‘동남제일학(東南第一學)’이라 불리는 영예를 얻었다. 이러한 전통을 이어받아 오늘날에도 난징은 베이징과 상하이(上海) 뒤를 이어 중국에서 우수 대학과 연구기관이 가장 많은 곳이며, 중국과학원 원사와 중국공정원 원사를 대거 배출한 지역으로 손꼽힌다.

 

  따라 흐르는 풍월(風月)

 

강남공원을 이야기할 때면 진회하 강변 주점의 재주꾼과 미인을 빼놓을 없다. 과거를 보기 위해 사람들이 강남공원으로 몰려들면 인근 주점은 ‘대목’이었다. 낮에 시험을 치른 밤이면 주점에서 술을 마시는 것은 과거 응시생 삶의 일부분이었다. 과거에 붙거나, 혹은 떨어졌기 때문에 술을 마셔야 하는 이유는 충분했다. 급제자는 강에 놀잇배를 띄워놓고 연회의 주인공이 됐고, 낙방자는 강변의 작은 주막에서 달빛을 벗삼아 홀로 술잔을 기울이곤 했다.

 

그런데 이들과 쌍을 이루는 이들이 있었으니, 이른바 ‘진회팔염(秦淮八艷)’이라 불렸던 기녀들이었다. 명나라 숭정(崇禎) 10(AD 1621), 당시 유명세를 떨치던 복사(復社) 4공자 한명 후방역(侯方域) 과거를 보기 위해 난징에 왔다가 시험을 치르기도 전에 수방(繡坊, 여자들이 사는 ) 계단을 올랐다. 소설 ‘도화선(桃花扇)’에서 후방역과 기녀 이향군(李香君) 연애 스토리는 바로 이렇게 시작된다.

 

비슷한 이야기는 있다. 명대 말기 4공자 한명인 모벽강(冒辟疆) 오로지 동소완(董小宛) 수를 놓으며 곤곡(昆曲) 부르는 모습을 보기 위해 여고(如臯)에서 난징까지 왔다. ‘홍루몽’의 저자 조설근(曹雪芹) 조부 조인(曹寅) 8 한명인 마상란(馬湘蘭) 그림에 3번이나 시를 써주며 마상란에 대한 연모의 정을 나타내기도 했다.

 

난징은 석두성(石頭城)이라는 별칭도 가지고 있다. 우화석(雨花石, 난징 일대서 나는 매끄럽고 무늬가 고운 조약돌) 많이 나서 붙여진 이름이다. 조설근은 처음 ‘홍루몽’의 제목을 ‘석두기’로 지었는데, 주인공 가보옥이 ‘통령보옥’이 변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고증 결과 ‘통령보옥’은 우화석일 가능성이 매우 것으로 알려졌다. 세기의 걸작인 홍루몽은 ‘금릉12(金陵十二釵)’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이는 속에 12명의 미인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남경팔염’이 외지에서 유입된 기녀를 가리키는 것과 달리 ‘금릉12채’는 대부분 현지 출신으로 난징 사람들이 생각하는 대가집 규수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금릉12채’는 바로 여성에 대한 전통적 심미관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옛날의 미인들은 진회하 강물과 함께 떠내려간 하다. 지금은 12명의 초상화가 그려진 초롱과 문병(門屏) 위의 ‘진회팔염’ 조각상만 남아있을 뿐이다. 현재 난징 오의항(烏衣巷) 있는 리향군기념관은 ‘진회팔염’ 유일하게 남아있는 수방이다. 2층짜리의 건물은 강을 사이에 두고 강남공원과 마주보고 있다.

 

 아련한 중화민국의 추억

 

유구한 역사와 남다른 역사적 지위를 가진 난징이지만, 이곳에 남은 고건축 가장 깊은 감명을 주는 것은 역시 근대 중화민국 시기의 건물들이다. 현재와 멀리 떨어지지 않은 시기에 지어진 건축물들은 거센 변화의 소용돌이와 문화의 바람이 몰아쳤을 당시의 상황을 떠올리게 한다.

 

난징의 민국시기 건축물에는 중국 북방지역 건축물의 웅장함과 남방지역 건축물의 섬세함, 서양 고대 건축물의 우아함과 현대의 단순함이 모두 어우러져 있다.

 

자금산의 중산릉은 민국시기 건축물의 정수가 집대성된 건축물로 중국 고대 건축양식과 서양의 건축양식의 특징이 고루 녹아있다. () 구조에 패방(牌坊) 묘도(墓道)·능문(陵門)·비각(碑閣)·묘실(墓室) 등이 있다. 미령궁(美齡宮) 중산릉 건축물 중에서도 최고의 걸작으로, 3층짜리 메인 건물은 궁전 양식을 따라 지어졌으며 정상부에는 녹색 유리 기와가 얹혀져 있다. 유리 기와에는 1000 마리의 봉황이 새겨져 있는데, 이는 중국에서 유일무이한 것이다. 산세를 따라 지어진 미령궁은 위에서 내려다 봤을 에메랄드가 박힌 진주 목걸이를 연상케 한다. 프랑스산 오동나무가 심어져 만든 고리형 길이 목걸이의 부분이라면 대문 입구는 목걸이의 연결 부분, 짙은 녹색의 기와는 에메랄드 같다.

 

현무(쉬안우, 玄武)구에 위치한 난징 총통부는 현재 중국 근대사 유적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현존하는 중국 근대 건축물 최대 규모이며 원형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난징 중화민국 시기 건축물의 대표격으로, 600년이 넘는 역사를 간직한 중국 고대 전통 양식의 강남원림(園林) 함께 난징을 상징하는 건축물이다.

 

난징총통부의 시작은 명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명나라 초기에 세워진 귀덕후부(歸德侯府) 한왕부(漢王府) 청대에 강녕직조서(江寧織造署) 양강총독서(兩江總督署) 쓰였고, 강희황제와 건륭황제는 남순(南巡) 이곳을 행궁(行宮)으로 사용했다. 태평천국 시기 천경(天京,난징) 도읍지로 정해졌을 때는 천왕부(天王府) 확장되었고 이후 짓고 부수고가 반복됐다. 1912년에 이르러 손중산이 이곳에서 임시 총통 취임을 선언하면서 대총통부가 됐고, 이후 중화민국 총통부가 됐다

 

난징총통부는 그야말로 역사 변천의 산물이자 목격자라고 있다. 동시에 이곳은 섬세한 면도 가지고 있으니, 서양 절충주의 건축의 영향을 받은 ‘서화정(西花廳)’은 같은 특징을 반영한다. 총통부 북쪽에 남향으로 지어진 서화정은 7칸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중화민국이 건국 했을 임시 대총통 사무실로 쓰였다. 이웃해 있는 600 역사의 ‘희원(熙園)’과 함께 강남원림의 전형을 보여주면서도 서양식 사무실이 빼곡히 들어서 총통부 전체 건물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밖에도 석가루(夕佳樓), 망비각(忘飛閣), 의란각(漪瀾閣), 인심석실(印心石屋) 역사를 머금은 다양한 볼거리들이 많다.

 

고루(구러우, 鼓樓)구에 위치해 있는 이화로공관(頤和路公館)구는 중국에서 중화민국 시기 공관이 가장 많이 보존된 지역이다. 닝하이(寧海) 로터리를 중심으로 뻗어나간 길에 민국정부 관리들이 썼던 공관 200 채가 있다. 여러 차례 거쳐 개조된 근현대 문화체험 호텔에서는 당시 의복과 음식문화를 체험할 있음은 물론, 곤곡과 교육서적 등도 보고 확인할 있다. 역사가 건축물, 예술이 음식을 즐기다 보면 절로 중화민국에 듯한 기분이 든다.

 

 

 

리후이펑(李慧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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