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8-16
여름방학이 또다시 돌아왔다. 방학은 학생들이 마음껏 놀거나 재충전하는 시간이기도 하지만 성적을 올리기 위해 학원을 집중적으로 다니기도 한다. 교육열이 높은 중국과 한국은 전통적으로 어머니가 자녀 교육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여겼다. 이 때문에 중국에는 자녀를 엄격하게 훈육하는 ‘타이거맘(Tiger mom)’ 문화가, 한국에는 ‘강남 엄마’라는 용어가 생겨났다. 이러한 현상은 유교 문화권에서 특히 흔한데, 그 원류를 좇다 보면 고대 주나라 문왕의 어머니인 태임(太任)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유교에서 ‘현모’로 추앙받는 태임
태임은 대임(大任) 등으로도 불렸다. ‘태(太)’는 존칭, ‘임(任)’은 성씨이다. 여남(汝南)현 평여(平輿)현(현재의 허난(河南)성 핑위(平輿)현)에서 태어나 지금으로부터 3200년 전을 살았던 인물이다. 태임은 주나라 선대왕 계력(季歷)(또는 왕계(王季))와 혼인하여 주 문왕 희창(姬昌)을 낳았으며, 시어머니 태강(太姜), 며느리 태사(太姒)와 함께 ‘주실삼모(周室三母, 주나라 왕실의 세 어머니)’라 불린다.
<사기(史記)>에 태임은 현숙한 여인으로 기록돼 있다. 희창을 낳은 뒤로는 더욱 상서로운 일이 잇따랐다. 계력의 부친인 주 태왕 고공단보(古公亶父)는 주나라의 흥성과 번영이 손자 희창에게 달려있다고 여겼다. 부왕이 장남 태백(太伯)과 둘째 우중(虞仲)을 뒤로 하고 셋째인 계력에게 왕위를 물려주려하자, 두 형제는 형만(荊蠻, 창장·長江 중하류 지역)으로 떠나 왕위를 동생에게 양보했다. 계력이 왕위를 계승할 수 있었던 것은 아내인 태임의 현덕(賢德)과 깊은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역사가 조선시대 때 태종이 맏아들인 양녕대군과 둘째 아들인 효령대군 대신 막내아들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준 것과 흡사하다는 것이다. 훗날 영조는 효령대군의 사당을 건립하며 ‘청권사(淸權祠)’라 이름 지었는데, 여기서 ‘청권’은 동생에게 임금 자리를 양보한 태백과 우중의 미덕을 공자가 논어에 ‘신중청, 폐중권(身中淸, 廢中權·몸가짐이 청렴하고 스스로 권력을 포기한 것이 도리에 맞다)’이라며 칭송한 말에서 나왔다.
<시경·대명(詩經·大明)>에는 태임이 상나라 출신으로 주나라에 시집왔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하늘의 도(天道)가 주나라로 옮겨왔다는 것을 의미해 주 문왕의 계승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또 <열녀전(列女傳)>에 따르면 태임은 직접 덩굴풀을 채취해 베를 짤 정도로 검소한 생활을 했다고 한다. 태임은 왕비로서 늘 몸가짐을 단정히 하고 왕가의 화목에 힘썼다. 임신 중에는 음란한 것을 보거나 듣거나 말하지 않았고, 자세와 걸음걸이는 물론 음식과 일상의 언행에도 각별히 신경썼으며 밤에는 수시로 악사(樂師)를 불러 시를 낭송하게 했다. 그 결과 희창은 태어날 때부터 매우 영특했고, 이것은 모두 태임의 태교 덕분이라고 여겼다.
고대 한국 국모(國母)상
고대 한국의 통치자들은 중국 유교 문화의 영향을 받아 태임과 같은 ‘위대한 어머니상’을 받아들이고 이를 후궁과 비빈들이 배워야 할 본보기로 삼게 했다. <고려사(高麗史)>에는 숙종 4년에 왕비로 책봉된 유씨(훗날 명의태후)의 이야기가 수록돼 있다. 유씨의 책봉 조서에는 주나라 태임이 왕비로 간택된 이후 왕업(王業)이 융성했던 것처럼 유씨도 태임처럼 왕실에 길운을 가져다 주길 바란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태조 이성계는 자신의 고조부모를 목왕(穆王)으로 추존하는 조서에서 “고조부와 고조모가 계력과 태임처럼 서로 좋은 배필이 되어 복덕을 통해 대대로 자손이 이어졌고, 그 덕으로 조선왕조의 기틀을 닦을 수 있었다”고 찬양했다. 1480년 성종은 윤씨(중종의 생모 정현왕후)를 왕비로 책봉할 당시 조서에서 “태임의 덕행을 이어받아 시부모님께 효도하고 부군을 잘 섬기라”고 언급했다.
태임의 고사를 들은 인조는 ‘먼저 어머니가 현명하고 덕이 있으면 대부분 자녀와 형제들이 화목할 수 있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영조 때 관리 주진(周鎭)은 주 문왕이 위업을 이룬 것은 상당 부분 태임과 같은 현모(賢母)와 태사와 같은 현처(賢妻)가 있었던 덕분이라고 생각했다. 즉 ‘성공한 남자 뒤에는 모두 여자의 공로가 있다’는 것이다. 이밖에도 일부 신하들은 영조를 주 문왕에, 인원왕후를 태임에 비유해 효성스러운 아들과 자애로운 어머니라 흠송했다. 장헌세자(사도세자) 역시 <장락사(長樂辭)>를 지어 같은 의미를 담아낸 바 있다.
조선 순조는 태임이 태교에 힘쓰고 문왕을 낳은 이야기를 찬양하는 시를 지었어며 자신도 이처럼 현명한 아내를 찾고 싶다고 밝혔다. 철종 때의 문신 정원용은 순원왕후의 추가 책봉을 주청올리며 그녀가 태임처럼 ‘여중요순(女中堯舜, 전설 속의 성군인 요·순 임금에 비유해 슬기롭고 현명한 여자를 이르는 말)’이며 어머니로서 지켜야 할 도리(母道)와 군주로서 지켜야 할 도리(君道)를 모두 짊어지고 있다고 칭찬했다. 고종은 자신의 혼삿날 신하들의 하례를 받으며 ‘과거 주 왕실은 태임을 아내로 맞아 자손을 번영시켜 800년의 기틀을 닦았다’는 내용의 조서를 내림으로써 자신의 혼사가 나라에 중대사임을 밝혔다.
조선시대 부녀자들의 귀감
조선시대에는 후궁이나 비빈뿐 아니라 사대부나 선비 집안의 부녀자들까지 모두 태임을 귀감으로 삼았다. 조선 후기의 학자 유중교는 “주 왕실의 선조들은 배우자 선택에 탁월해 전부 태임처럼 현명한 처를 맞이했다”고 감탄했다. 조선후기 문신 홍직필은 넷째 딸을 낳고 이름을 짓지 못하고 있었다. 어느 날 그는 ‘태임지성 단일성장(太任之性 端一誠莊, 태임의 성품은 단정하고 정숙하다)’이라는 고사를 떠올리고 태임을 본보기로 삼아 배우라는 의미에서 딸의 이름을 단성(端誠)이라 지었다. 조선 후기의 또 다른 학자 김평묵은 <태교문답(胎教問答)>에서 “태어난 아이의 좋고 나쁨은 선천적 운에 달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교는 여전히 중요하다”면서 여성이 태교를 할 때는 태임처럼 치심(治心, 마음을 다스림)하고 수신(修身, 행실을 바르게 함)해야 한다고 전했다. 화서(華西) 이항로는 시집 간 둘째 딸이 더 이상 방직이 아닌 시문(詩文)과 서화(書畵)를 배운다는 말을 듣고, 서신을 통해 ‘태임은 왕후의 신분이 되어서도 스스로 베를 짰다’는 고사를 전하며 방직은 농업사회 부녀자의 본분임을 강조했다. 그는 또, “만약 남자가 학문을 닦을 때 요·순 임금과 공자를 모범으로 삼아야 한다면 여자는 태임과 태사를 본보기로 삼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조선후기의 문신 이재(李縡)는 사람됨의 교육을 태교(胎教)와 유교(幼教), 시례(詩禮) 세 단계로 구분하고 태교는 태임에게, 유교는 맹모(孟母)에게, 시례는 공자에게 배워야 한다고 말했다. 이승희는 <대계수(大溪水)>에서 김덕령의 부인 흥양(興陽) 이씨의 일화를 소개하며, 그녀가 태임의 태교에 관한 고사를 읽고 크게 감명 받아 임신할 때마다 몸과 마음을 삼갔다고 전했다.
한국에서 최고의 현모상이라하면 대부분 ‘신사임당’을 꼽을 것이다. 조선 시대 중기의 여성 문인이자 유학자, 화가인 그녀는 율곡 이이를 낳아 위대한 성리학자로 키워 내기도 했다. 호를 ‘사임당(師任堂)’으로 지은 까닭 역시 태임을 스승(師)으로 삼겠다는 의지가 투영됐다. 전통적인 가치관에서 보면 그녀는 분명 ‘성공한 어머니’이다. 물론 태임으로 대표되는 것들은 전통 가부장제 사회가 지향하던 ‘현모(賢母)’의 이미지가 대부분이고, 이는 여러 맥락에서 현대사회의 가치관과 더 이상 맞지 않다. 하지만 시선을 돌려 보면, 태임의 본질은 고대 중국과 한국인들이 자녀 교육에 헌신하던 어머니의 노고를 충분히 인정하고 찬사를 보낸 상징으로 볼 수 있다.
글|위셴룽(喻顯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