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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문해자>와 고대 조선반도(한반도)


2022-11-21      


동한(東漢)시대 경학자이자 문자학자인 허신(許愼)이 편찬한 한자 자전인 <설문해자(說文解字)>는 <설문(說文)>이라고도 부른다. 중국 최초로 한자 자형을 체계적으로 분석하고 글자의 기원을 연구한 사전으로 2000년에 가까운 역사가 있다. <설문>은 총 15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자 자체(字體)는 소전(小篆)이며 약 1만자의 한자를 수록했다. 중국 역대 문인과 학자들의 교정, 주석을 거쳐 여러 판본이 남아 있으며 후세에 큰 영향을 미쳤다. 때문에 허신은 ‘자성(字聖)’이라고 불린다.


<설문>에 기록된 고대 조선반도

<설문>이 언제 조선반도에 전해졌는지 확실히 알 수 없지만 늦어도 고려시대인 것으로 판단된다. 흥미로운 점은 <설문>에 1세기 전후 조선반도에서 사용한 한자의 뜻이 기록돼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설문>에 ‘훤(咺)’과 ‘우(盱)’ 자가 등장하는데 “조선위아읍부지왈훤(朝鮮謂兒泣不止曰咺, 조선에서는 아이가 계속 우는 것을 ‘훤’이라고 한다)”이라고 했고, “조선위로동자왈우(朝鮮謂盧童子曰盱, 조선에서는 검은 눈동자를 ‘우’라고 한다)”라고 했다. 이뿐이 아니다. <설문>에서는 조선반도 낙랑지역의 물고기(魚)를 ‘노(䲐), 첩(鯜), 국(䱡), 사(魦), 역(鱳), 옹(鰅)’ 등으로 기록했다. 이것이 지금의 어떤 물고기인지 알 수 없지만, 최소한 1세기 전후 조선반도와 중원지역 간에 경제 무역, 문화 교류가 활발하게 이뤄졌다는 것은 알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허신이 조선반도에서 나는 물고기의 종류를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조선 말기의 실학자 서유구(徐有榘)는 <설문>에서 말한 물고기 관련 기록에 흥미를 느끼고 과거 낙랑지역을 찾아가 현지인에게 물어봤지만 안타깝게도 “낙랑 사람들도 낙랑의 물고기를 모른다”고 기록했다. 1800년이나 지났으니 옛 모습이 남아 있을 리가 없었다.


<설문>과 고대 조선반도의 한문 교육

조선반도는 일찍부터 한자를 도입했고 발전을 거듭해 정부의 공식 문자가 된 것은 모든 사람이 다 알고 있다. 통치자와 사대부도 한자 사전으로서의 <설문>을 중요하게 여겼다. 고려 인종 때 ‘명서(明書)’ 과목을 통해 한자 훈고(訓詁) 전문 인재를 선발했다. <설문>은 ‘명서’ 과목에서 가장 중요한 학습 교재와 수험서 목록 중 하나였다.


인종은 또한 국자감에 교육 과정을 마련하고 공부하도록 했다. 당시 국자감 학생은 전부 귀족이나 관원의 자제로, 그들은 유가 경전과 역사서 외에도 과외 시간에 <설문> 등 한문 자전을 읽어야 했다. 이런 한문 자전은 경전이나 사서를 읽는 데 도움이 됐고 한자와 한문의 기초를 다질 수도 있었다. 조선시대에도 <설문>은 한문 교육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예를 들어 대신이 헌종에게 논어 ‘사물(四勿)’ 편을 강의할 때 <설문>으로 ‘물(勿)’ 자의 본의를 설명해 임금의 경전에 대한 이해를 높여주었다. 실학자 이규경(李圭景)은 “허신의 <설문>은 공이 크다. 후대에 공부하는 자는 이를 규범으로 삼았다”고 했다.


이뿐이 아니라 <설문>은 한문 자전으로서 조선시대 국가 법령 제도 발전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예를 들어 <경국대전주해(經國大典註解)>, <국조오례의서례(國朝五禮儀序禮)>, <국조오례의통편(國朝五禮儀通編)> 등에 나타난 전문 단어를 <설문>을 인용해 주석을 달았다. <세종실록> 기록에 따르면, 당시 아악(雅樂) 악기 규범 등에도 <설문>을 참고했다. 광해군 시대에 대신은 예복의 ‘참(黲)’색이 무슨 색인지 <설문>에서 찾아 예의 규범의 근거로 삼았다. 1789년, 정조는 부모의 능묘를 건설하고 이름을 ‘현륭원(顯隆園)’이라고 했다. ‘륭’ 자를 선택한 이유는 <설문>에서 ‘륭’이 ‘풍대(豐大)’의 뜻이기 때문이었다.


조선반도 문인, <설문>을 인정하고 발전시켜

조선시대에는 허신을 저명한 학자라고 생각했고 <설문>은 한자 해석의 권위 있는 저작물 중 하나로 봤다. 게다가 주희가 <설문>을 인용해 유가 경전에 주해를 달았기 때문에 주자학을 숭상한 조선의 주류사회는 <설문>을 매우 높이 평가했다. 예를 들어 종부시 관원은 피휘(避諱)를 논하면서 숙종에게 “허신은 한나라 때의 저명한 유학자이고 <설문>을 편찬했다. <설문>은 황제에게 상소를 올릴 때 근거가 됐으며, 후에 주자가 경서를 집주(集註)할 때 인용했다”고 말했다. 실학자 정약용은 <설문>을 매우 중요시해 글 쓸 때 자주 인용했다. 대한제국 때도 <설문>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 많았다. 봉상사는 김태제가 고종에게 올린 진언에서 태학 교육에서 <설문> 학습을 중요시해야 한다고 했다고 했다.


그러나 18세기부터 조선에는 <설문>에 부족한 부분이 있다고 생각하는 학자가 나타났고, 이를 토대로 보충 발전시켰다. 실학자 이규경은 많은 글에서 <설문>을 인용했지만 <설문변증설(說文辯證說)>에서 <설문>에 부족한 부분이 존재한다고 명시했다. 성호(星湖) 이익(李瀷)은 “한나라 허신의 <설문>은 가장 오래되고 믿을 수 있지만 지금의 글과 많이 다르다”고 하면서 <설문>은 신중하고 믿을 수 있으며 중고(中古)시대 이전의 한자 연구에 도움이 되지만 시대의 차이로 지금의 한자 해석에는 부족한 점이 있다고 했다. 19세기 문신 박선수(朴瑄壽)는 <설문해자익징(說文解字翼徵)>을 편찬했다. 김윤식은 이 책의 서문에서 “<설문>은 자서의 조상이다. 창힐(倉頡)이 한자의 정신과 의미를 창조했는데 이(<설문>)가 없었더라면 전승되지 못했을 것이다. 다만 유감스럽게도 체재(體裁)상 완벽치 않고 다 교열감수도 못했다”고 밝혔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설문>이 한문 자전으로 자연스럽게 한자 문화권 문인들의 교류 매개체 중 하나가 됐다는 것이다. 1521년, 조선에 파견된 명나라 사신이 <설문> 한 권을 조선 문신 남곤(南袞)에게 선물했고, 조선에서 편찬한 <설문해자익징>은 근대 일본에 전해졌다. 김윤식은 <설문해자익징>을 일본 학자 도쿠토미 소호(德富蘇峰)에게 주었고, <증 도쿠토미 소호(贈德富蘇峰)>라는 시에서 도쿠토미 소호와 글로 나눈 우정을 그리면서 “천년 <설문>학을 교정해주어서 고맙다”고 했다. 1912년 조선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는 <설문해자익징> 한 부를 덕수궁에 헌납했다. 이렇듯 <설문>은 2000년 동안 한자의 무한한 매력을 보여주었을 뿐 아니라 중한 간, 더 나아가 한자 문화권 전체의 문화적 보물이 됐다.


글|위셴룽(喻顯龍), 상하이(上海)외국어대학교 글로벌문명사연구소 전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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