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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청심환’, 중한 교류 매개체 역할 ‘톡톡’


2022-08-05      



조선의 문신 이조원은 시에서 ‘금탄환(金彈丸)이라는 단약이 있는데 이름은 청심(淸心)으로 삼한에서 나왔다. 한인(韓人) 진귀하게 여기지 않으나 중국에서는 신단(神丹)으로 불린다 했다. 그가 말한 청심이 바로 조선의 ‘청심환(淸心丸)’이다. 그렇다면 ‘청심환 중국과 어떤 인연이 있고  중국인은 ‘신단이라고 불렀을까?


청심환 원래 고대 중국의 환약 이름이었다.  처방이 최초로 등장한 것은 중국 송나라의 의서 <태평혜민화제국방(太平惠民和劑局方)>(이하 화제방)이다. 주로 우황  여러 약물로 만들어져 중국에서는 ‘우황청심환이라고 불린다. 기록에 따르면 ‘우황청심환 중풍, 어지럼증, 가슴 답답함, 의식 불명 등의 증상을 완화하고 치료한다. 이후 중국에서 대대로 계승되고 개선되면서 궁정 비방으로 보존됐다. 현재 베이징(北京) 퉁런탕(同仁堂)  라오쯔하오(老字號, 오랜 역사를 지닌 중국 브랜드) 약국에서 오래된 명약으로 판매되고 있다.


<화제방> 조선 유입과 ‘청심환 탄생

고대 동아시아 문화가 교류하면서 중국의 의서도 조선반도(한반도) 다량 유입됐다. <화제방> 구체적으로 언제 조선반도에 전해졌는지에 대해 정확한 기록이 없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 따르면 적어도 15세기  <화제방> 조선 의관 시험의 참고서로 사용됐다는 것을   있다. 조선 단종 시대 함경도 지방관이 현지 의료가 낙후됐다는 상소에 <화제방> 포함한 의서를 하사했다. 1479 승지 이경동이 성종에게 조선인이 <화제방> 좋아해 조선에서 편찬한 <향약집성방(鄉藥集成方)> 널리 보급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로써 <화제방> 조선에서 얼마나 널리 사용됐는지   있다.


중국 의학서의 유입과 보급은 조선의 의학 발전과 충돌되지 않았다. 조선의 ‘청심환 바로  좋은 예라   있다. 학자들의 판단에 따르면, 조선의 ‘청심환 <화제방> 기록에 따라 끊임없는 연구와 시험, 개선을 거쳐 조선의 특색이 담긴 환약으로 발전했다. 이후 ‘구미청심환(九味清心丸)’, ‘대청심환(大清心丸)’  여러 종류가 개발되기도 했다. 그러나 처음 만들어진 구체적인 시기는   없었다. 사료의 ‘청심환 관련 기록은 조선 ·후기에 많아져 대략  시기인 것으로 추측할 뿐이다. 조선에서 ‘청심환 차츰 인정을 받았고 급병 치료와 번열증을 치료하는 영약으로 자리잡았다.


조선 궁궐과 민간에서 두루 사용

청심환 만들어진 초기, 조선 궁궐은 이를 ‘임금의 이라고 여겨 일반인은 구하기 어려웠다. 귀족과 대신은 병이 나면 국왕에게 간청해야 얻을  있었다. 1676 동부승지 유헌이 급병이 나자 숙종이 특별히 ‘청심환  약을 하사해 병이 나았다. 1728 좌의정 조억태가 갑작스러운 중풍으로 말을 하지 못하자 바로 ‘청심환 먹고 목숨을 부지했다. 조선 후기의 문신 임헌회는 ‘청심환이 백병에 기여한다  ‘청심환 만병통치의 영약으로 묘사했다. 이로써 귀족이든 일반 백성이든 ‘청심환 대한 수요가 늘었다는 것을   있다. 일찍이 1653 효종은 경기도, 황해도 등에서 역병이 발생하자 약품 등을 보냈다. 그러나 ‘청심환 겨우 200 뿐이어서 크게 부족했다.


조선 영조는 ‘청심환 팬이었다. 그는 김재로에게 자신이   이룰  탕약을 마시기 번거로워 ‘청심환 3알을 먹는다고 말했다. 김재로는 3알은 너무 많아 깜짝 놀랐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영조, 순조  임금이 문신과 사병, 유생에게 ‘청심환 하사했다는 기록이 많다.  밖에 사도세자는 아버지 영조와 다투다가 정신 이상이 나타났는데 ‘청심환 먹고 정신을 차렸다고 한다.


그러나 ‘청심환 약효는 한계가 있다. 정약용은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에서 “우리나라 청심환은 천하에 유명하다 했다. 그러나 그는 “어리석은 사람이나 ‘청심환 ‘기사회생 영약으로 여긴다 지적했다. 1544 조선 중종은 병이 깊어지자 다른 약은 물리고 ‘청심환 먹었지만 결국 생명을 연장하지는 못했다. 1660 조선 현종은 두통이 심해 금은화차(金銀花茶) ‘청심환 같이 복용했지만 효과가 없었고 오히려 증세가 악화됐다. 대신들은 임금에게 먼저 의관에게 병세를 보여야지 함부로 약을 복용하지 말라고 건의했다.


청나라에서 유명해진 ‘청심환 

조선 ‘청심환 청나라 초기부터 인정을 받았다. 이는 건주여진과 조선  무역과 문화 교류 때문이었을 것이다. 1645 조선으로 향한 청나라 관리는 무더위와  여정을 앞두고 더위 먹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 조선 측이 ‘청심환  약을 보내주길 바랐다. 1655 조선으로 향한 청나라 사신은 눈에 병이 생기자 조선 의사가 진료를 해주고 ‘청심환을 주기를 바란다 했고 조선은 바로 그의 청을 들어주었다. 이로써 당시 청나라 관리들도 조선 ‘청심환 약효를  알고 있었다는 것을   있다. 이후 ‘청심환 조선 조정이 청나라 사신단에게 증정하는 정례 선물이 됐다.


조선의 ‘청심환 청나라에서 유명해졌고 가격도 비싸졌다. 조선 근대 문인 이승희는 <청심환설(清心丸說)>에서 청심환은 ‘중국 북경에서 3 가격에 판매된다 썼다. 바로  때문에 청나라에서 조선으로 향한 역관의 ‘청심환 수요는 사신들보다 훨씬 많았다. 그들은 종종 상인 신분이었기 때문이다. 1728 청나라를 방문한 조선 정사(正使) 밀창군 이직은 영조에게 ‘청심환 ‘효과가 좋아 중국에서 인기가 많다고 전했다. 1749 청나라로  조선 사신도 영조에게 ‘청심환 구하고 싶어하는 청나라 태학 유생이 많다고 보고했다.


청나라 궁궐에서도 조선의 ‘청심환 인정했다. 이친왕 윤상은 조선에서 약을 구해달라고 부탁했고, 건륭황제는 1786 중풍에 걸린 복건 수군제독 황사간에게 ‘고려 청심환 20개를 하사했다.


또한 ‘청심환 조선 연행사가 청나라 문인, 관리에게 주는 최고의 선물  하나로 휴대가 간편하고 인기도 좋았다. 조선 연행사는 ‘청심환 매개로 북경에 있는 유구인(琉球人), 안남인(安南人) 접촉하기도 했다. ‘동문휘고(同文彙考)’ 따르면, 조선이 일본에 보내는 선물에도 ‘청심환 포함됐다. 근대 들어 김윤식은 ‘청심환 리훙장(李鴻章) 톈진(天津) 세관 관리에게 선물로 주었고 여행길에 청나라 여관 주인 제선주에게  알을 주기도 했다. 제선주는 너무나 기뻐 풍성한 음식을 제공했고 시집  선물을 주기도 했다.작은 ‘청심환  알에 천년의 중한 교류사가 담겨 있다. 이는 ‘문화 교류는  방향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그것이 만든 문명이 우리의 상상을 훨씬 뛰어넘는다 것을 말해준다.  


위셴룽(喻顯龍), 상하이(上海)외국어대학교 글로벌문명사연구소 전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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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감(減)·3건(健)’의 각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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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은 음식에서 시작한다...한국의 건강식 트렌드

얼마 전, 필자는 서울에서 택시를 탔다가 기사와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필자가 외국인인 걸 안 기사는 한국 음식이 입에 맞는지 물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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