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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1-23      글ㅣ임명신(한국)

古人學問無遺力,少壯工夫老始成。

紙上得來終覺淺,絕知此事要躬行。

gǔrénxuéwèn wúyílì, shàozhuàng gōngfu lǎoshǐchéng. 

zhǐshàng délái zhōngjuéqiǎn, juézhīcǐshìyàogōngxíng.


   고인학문무유력, 소장공부로시성. 

지상득래종각천, 절지차사요궁행. 

학문에 온 힘을 다한 옛사람들도, 

젊어서부터 공부해 노년에야 겨우 이루었지. 

책 보며 얻은 학식이 얕고,  

실천이 필요함을 뼈저리게 깨닫노라. 

 

자신의 일곱 아들 중 막내 자율(子聿)에게 주는 칠언절구다. 같은 제목의 8수 가운데 제3수로, 1199년 21세 막내아들에게 주는 간곡한 가르침을 담았다. 인생선배, 75세 늙은 아버지의 자애이자 간절한 마음이다. 중국어에서 독서(讀書)란 취미 영역인 가벼운 책읽기라기보다는 ‘공부하다’ ‘탐구하다’의 의미가 강하다. 지식인(知識分子)이라는 현대 어휘도 있으나 독서인(讀書人) 역시 많이 쓰인다.

 

갑골문의 ‘學(학)’자를 보면 매듭짓는 법을 배우는 모습의 형상임을 알 수 있다. ‘효(爻)’ 좌우 부분의 ‘구(臼)’는 식재료를 빻는 절구를 가리키게 됐으나, 본래 양손을 아래로 뻗어 무언가를 감싸는 모습을 본뜬 글자였다. 그 아래 집 ‘면(宀) ’과 아들 ‘자(子)’, 즉 집안에서 자식에게 당시의 소통방식인 매듭(結繩)문자를 배우게 하는 광경이 ‘학(學)’자에 담겨 있다. 

 

‘물을 문(問)’자는 문(門) 안으로 들어가 입(口)을 놀리는 모양이다. 일상적인 의사소통의 물음이 아니라 심문하듯 절박하고 심각한 ‘탐구적 질문’을 말한다. 요컨대 ‘학문(學問)’이란 ‘배우고 질문하는’ 행위인 것이다. 현대에까지 통용되는 학문의 근본정신, 기본자세란 ‘진지하고 예리한 질문’이다. ‘학문(學問)’은 ‘학문을 하다(연구하다)’에 해당하는 어휘가 ‘배우다’의 함의에 한정된 영어 study, 불어 etudier, 독어 studieren 등 보다 심오한 어원을 가졌다. 

 

‘공부(工夫)’는 현대중국어에서 ‘짬’ ‘(어떤 일에 들인) 시간’을 뜻하는데, 고전중국어로는 한국어의 ‘공부’와 더 일치한다. 옛사람들이 그러했듯 젊은 시절부터 ‘남는 힘이 없도록(無遺力)’ 공부에 진력해도 늙어서 겨우 달성되는 게 학문이라고 작자는 역설한다. 후반부엔 ‘배우는 자’의 숙명이 언급된다. 공부를 할수록 아는 게 많아지지만 실은 자신이 잘 모른다는 것을 깨닫는다. 뭘 모르는지 아는 것이야 말로 공부의 높은 경지다. 

 

작자 육유(1125-1210)의 삶과 문학에 시대상을 논하지 않을 수 없다. 여진족 금(金)나라의 공격을 받아 북송(北宋) 나라가 망했을 때 그는 젖먹이였다. 한발 앞서 남쪽으로 피난 온 그의 부친 육재(陸宰)는 회계산(會稽山) 북쪽의 산음(山陰, 현 저장(浙江)성 사오싱(紹興))에 정착해 스스로 경서를 읽으며 자녀들을 교육했다. 육유의 문인 자질은 타고난 것 외에 이런 유년환경 영향 또한 크다. 이미 소년기에 그는 출세길에 초연했던 도연명(陶淵明)과 왕유(王維), 이민족의 위협을 일깨우는 변새시(邊塞詩)의 잠삼(岑参)에 심취해 있었다. 

 

육유는 평생 북벌을 꿈꿨으나 주화파에 밀려 번번이 좌절했고 울분은 깊어졌다. 그런 시대를 살아가는 심경이 약 1만 수의 시(詩)와 145수의 사(詞)로 전해진다. 임종의 순간까지 중원회복의 염원을 놓지 않았다. 북송 이래의 전통을 계승하는 동시에 독자적인 영역을 개척했다는 문학사적 평가를 받는다.  

 

 

글ㅣ임명신(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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